[점점… 사라져가는 것들](9)풍금

2004.04.11 15:49

학교엔 아직 풍금이 있었다. 교실 한쪽 구석에 놓인 풍금 위엔 시험지며 교과서가 가득 쌓여 있었다. 서울 용산구 청파초등학교 박영주 교사(27)는 낡은 풍금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탁자로 쓰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풍금소리를 들려주고 싶긴 하지만, 컴퓨터보다 음감이 떨어지고 건반 몇 개가 안 눌러져서 음악시간엔 못 씁니다.”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9)풍금

20년 전만 해도 초등학교 교실마다 풍금이 있었다. 흰 건반 29개, 검은 건반 20개. 정식 명칭은 ‘리드 오르간’이지만, 발로 페달을 밟아 바람을 불어넣어 연주한다고 ‘풍금(風琴)’이란 이름이 붙었다. 고동색 악기엔 ‘KS마크’와 함께 ‘36대 육성회장 기증’ 같은 기증자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 뚜껑을 열면 철로 만든 악보대가 툭 떨어졌다. 음악시간을 제외하면 풍금은 항상 흰 덮개로 덮여 있었다. 개구쟁이들은 선생님 몰래 풍금 뚜껑을 열고 아무 건반이나 누르며 장난을 치곤 했다.

올해로 초등학교 교사 33년째인 같은 학교 정모 교사는 “부임 초기에 풍금 연수를 따로 받았다”고 기억했다. 교대에선 피아노로 음악교육을 받았지만, 학교 현장엔 풍금밖에 없었다. 방학 중 교원연수 프로그램엔 풍금이 포함돼 있었다. 정씨가 교사 생활을 시작할 무렵엔 풍금이 무척 귀했다. 풍금 한대를 복도에 놓고 음악시간마다 이 교실 저 교실로 옮겼다. 그러다 보면 풍금이 계단이나 복도에서 굴러 고장나는 일이 흔했다. 음악시간이 겹치지 않게 시간표를 짜느라 교사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오르간 제조업체 아리아오르간의 한승원 부장(51)은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가 풍금의 전성기”라고 말했다. 70년대 초반 풍금 한대가 3만5천원, 피아노는 70만원이 넘었다. 당시 초임 교사 월급이 1만5천~2만원이었다. 피아노가 ‘금값’보다 비싼 탓에 학교에선 풍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가 대중화한 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풍금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풍금은 천천히 전자오르간으로 교체됐다. 학교 풍금의 수명은 15년. 학교들은 새 풍금 대신 전자오르간을 들였다. 가격 차이가 거의 없는 데다 사용하기도 훨씬 편했다. 99년 교과전담교사제가 시작되면서 음악전담교사들은 이동식 전자오르간을 들고 다니며 수업을 했다.

현재 대부분 초등학교 음악시간엔 교육자료를 제공하는 유료 사이트 ‘티나라’(tnara.net)를 활용한다. 3~4년 새 전국 학교에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렸기 때문이다. 교실마다 놓인 35인치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로 악보를 보고, 클릭 한번으로 반주를 듣는다. 한 소절씩 따라 부르기·반주 듣기·가창 듣기 등 내용도 다양하다. 건반악기 수업은 풍금 대신 실로폰이나 멜로디언을 이용한다. 시골 학교들은 전자오르간을 사용한다.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는 충북 옥천시 증약초등학교는 3년 전 풍금을 디지털 오르간으로 모두 바꿨다.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9)풍금

풍금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이 팔릴 땐 하루 2~3대, 안 팔리면 한달에 2~3대가 고작이다. 선일악기 유상선 사장(54)은 “풍금은 전자오르간에 비해 고장이 잘 나지 않아 자녀 많은 집에서 교육용으로 찾는다”고 전했다. 그래도 손님 대부분은 풍금소리에 향수를 가진 60~70대 노인들이다.

“물어보면 다들 교편 잡으셨던 분들이에요. 풍금소리를 못 잊어 찾아왔다고 하시더군요. 페달 밟으면서 손도 움직이니까 노인들껜 운동도 되는 셈이죠.”

학교에서 풍금소리가 그친 지는 5년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풍금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풍금의 기억이 수십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 유년의 추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칼로 흠집을 파놓은 책상, 마룻바닥을 굴러 다니던 몽당연필, 교실을 가득 채우던 풍금의 깊고 삐걱거리는 소리. 풍금소리는 그때 그 시절의 배경음악이었다.

〈글 최명애기자 glaukus@kyunghyang.com〉

〈사진 김영민기자 viol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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