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선을 넘은 ‘고대사 논쟁’…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2016.04.10 21:42 입력 2016.04.11 07:15 수정

재야사학계에 거침없는 반격…젊은 역사학자 3인을 만나다

젊은 역사학자인 위가야, 기경량, 안정준씨(왼쪽부터)가 지난 4일 한자리에서 만나 한국 고대사 논쟁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젊은 역사학자인 위가야, 기경량, 안정준씨(왼쪽부터)가 지난 4일 한자리에서 만나 한국 고대사 논쟁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역사문제연구소의 계간 ‘역사비평’ 2016년 봄호에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기획 발표문 3편이 실렸다. 기경량 강원대 강사(38), 연세대 박사과정 안정준씨(37), 성균관대 박사과정 위가야씨(36) 등 30대 역사학자 3명이 각 1편씩 글을 썼다.

내용과 논조는 파격적·공격적이었다. 이들은 한국 고대사를 다루면서 국력과 영토 범위에 집착하는 일련의 연구를 ‘사이비 역사학’이라 비판했고, 그 행태를 ‘역사 파시즘’으로 규정했다. 이른바 재야 사학계를 ‘사이비’로 신랄하게 비판한 이들 젊은 역사학자의 기고는 학계에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낙랑군 등 한사군의 위치, 단군왕검의 실체, 고조선의 도읍지 위치 등 해묵은 고대사 논란에 대해 주류 사학계는 그동안 재야 사학계의 비판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젊은 역사학자가 지난 4일 경향신문에서 만나 고대사 연구 전반에 대한 생각들을 드러냈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학 산물?

한사군(낙랑·임둔·진번·현도) 위치를 놓고, 주류 학계는 기원전 108~107년 한 무제가 고조선 영토 내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한사군 한반도설’을 강조한다. 특히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 반면 재야 사학계는 한사군 한반도설은 “1차 사서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일제 식민사관을 추종한 결과”라며 낙랑군은 평양이 아니라 중국 요동 또는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학문의 선을 넘은 ‘고대사 논쟁’…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젊은 역사학자들은 “(재야의) 낙랑군 요서설·요동설은 현재 학계에서 학술적 지지를 전혀 얻지 못하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소수설로 생명력은 있었지만, 1990년대 들어 평양 지역에서의 발굴 결과 고고학적 자료가 쏟아져 나오면서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1990년 평양 정백동 고분에서 ‘초원 4년 호구부’ 목간이 나왔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인구 센서스 자료인데, 낙랑군 25개 현의 구역별 인구 분포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는 중국 한나라 때인 기원전 45년 당시에 평양을 중심으로 한 군현의 행정지배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자료를 요동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다.”(안정준) “호구부 목간뿐 아니다. 고분에서 나온 칠기가 있는데 전한시대의 연대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게 많고, 무덤 양식·부장품 형태도 전형적인 당시 중국식이다.”(기경량)

이들은 일제가 식민사관을 주입하기 위해 한사군 한반도설을 만들었다는 재야 사학계의 주장도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이미 조선 후기에 정약용·한백겸 등 일군의 실학자들이 문헌연구로 낙랑군 위치를 평양이라고 결론지었다는 것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얘기는 고려 때부터 나왔고, 조선 후기에는 이미 문제가 거의 정리됐다. 이후 일본 학자들의 연구가 이어졌고, 1990년대 고고학적 발굴 결과도 나오면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기경량) “그러다보니 이제는 (재야 사학계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사대주의자라서 그랬다고 한다. 실학자들은 그저 사료를 따라 결론을 냈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사료가 우리를 인도한 셈이다.”(위가야)

주류 사학계는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1차 사료를 종합하면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도 1차 사료를 강조하며 “<후한서>나 <사기> <태강지리지> 등을 보면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북부에서 요령성 서남부였다”고 주장한다. 중국 사서를 두고 반대의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학문의 선을 넘은 ‘고대사 논쟁’…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안씨는 “사이비 역사학 쪽 분들이 교군·교현의 개념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결과”라고 조목조목 비판했다. 교군·교현은 기원후 300년대 남북조 혼란기에 강남 지방으로 집단이주한 화북 출신 주민들을 위해 임시 설치한 군·현을 의미한다. 당시 남북조 각국은 군사력과 노동력 확충 등을 위해 이주민을 적극 유치했고, 이를 위해 출신 군·현을 이주 후에도 그대로 쓰게 하고 세금 면제 등 편의를 도왔다. 사서에 낙랑군이 하북성·요령성 지역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교군·교현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이병도와 식민사학 카르텔 없어

재야 사학계는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인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의 후예들이 카르텔을 맺고 역사학계를 장악해 한사군 한반도설 같은 식민사학이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학계 내 위계 때문에 후학들이 선대의 주장(식민사관)에 반론을 펼칠 수 없다는 얘기다.

젊은 학자들은 “학문이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스승이나 앞선 사람이 한 얘기를 ‘아 그렇습니까’ 하고 받아들이면 그건 학자가 아니다. 누구보다 새로운 해석에 목마른 사람이 젊은 역사학자들이다.”(기경량) “젊은 고대사 연구학자들이 괴로운 게 뭐냐면, 이미 사료가 다 나왔고, 여기에 관한 어지간한 연구도 이미 했다는 점이다. 한반도 한사군설처럼 선대의 통설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나오길 바라는 건 오히려 우리들이다.”(위가야) 한사군 한반도설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이를 뒤집을 만한 학술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 강사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건 중요하지만, 입증 근거와 논리 없이 얘기를 하면 학문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엄밀한 학술 논쟁이 사라져

“학문의 선을 넘은 ‘고대사 논쟁’…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기 강사 등은 지난해 9월 연구자 30여명과 ‘젊은 역사학자 모임’을 결성했다. 재야 사학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매국의 역사학>을 출간한 직후다. 이 소장은 책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 역사지도가 중국 동북공정과 일본 식민사관을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야 정치인들도 이 소장의 주장에 동조했다. 결국 정치권의 잇따른 문제제기, 대중의 분노 등으로 역사지도 사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젊은 역사학자들은 재야 사학계의 비판이 엄밀한 학문 영역에선 용납될 수 없는 주장들이어서 건전한 학술적 논쟁의 범주를 넘어섰다고 본다. 이들은 특히 “국회의원들이 학계 연구 성과를 무시하고 민족주의에 편승한 정치적 논리로 실질적 영향력까지 행사하려 한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실제 지난해 국회에서 열린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 회의에서 한 의원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앞세워 주류 학계의 사료 연구 결과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상황을 두고 “(정치인들은) ‘정치외교적으로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료가 있는데 왜 그걸 쓰지 않나’라고 하는데 사료는 비판적 검증을 거쳐야만 한다”며 “더욱이 역사학이 어떤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기 강사는 “고대사 논쟁에서 강력한 민족주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애국’ 대 ‘매국’의 프레임으로 고대사 문제를 설정하고 대중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한다는 얘기다.

■주류 학계, 대중과의 소통 필요

고대사 논쟁에 대해 “논문으로 이야기하라”는 이야기가 많다. 주류든 재야든 학문의 장 안에서 엄밀한 근거의 논문으로 학설을 펴라는 것이다. 젊은 학자들은 쟁점은 이미 학문적으로 정리됐다고 말한다. “사이비 역사학계는 사실 ‘우리 땅이 옛날에 얼마나 넓었나’ 그거밖에 없다. 사실 학계의 관심은 강역이 얼마나 넓었나 등은 진작에 넘어섰고, 사회구조와 문화 등 더 세밀한 연구를 한 지 오래다. 논문 한 편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할 때, 학계 안에서 오래전에 학문적으로 정리돼 상식화된 문제를 새삼 논문 주제로 삼는 것은 의미가 없다.”(기경량)

그러나 이들은 이제까지처럼 재야 사학계의 공세를 애써 피하는 게 답은 아니라고 했다. 또 국정교과서가 재야 사학계의 입장을 적극 반영해 ‘고대사 뻥튀기’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도 한다. 이들을 비롯한 젊은 역사학자들은 향후 ‘역사비평’에 고대사 쟁점 글을 계속 기고할 예정이다. 여름호에는 ‘교군·교현’ 등 3편의 글을, 연말에는 역사대중서도 출간한다. 안씨는 “학계가 역사대중화에 소홀한 측면이 있었다”며 “대중의 수요와 문제의식을 발빠르게 따라가면서 이를 해소하는 글을 많이 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위씨는 “(재야 사학계의 주장이 계속되자) 학계에서는 1990년대에 <한국사 시민강좌> 시리즈를 내면서 역사대중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논문 수준으로 대중과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90년대의 ‘역사대중화 시즌1’을 이어받아 우리가 ‘시즌2’를 준비하는 셈인데, 이번에는 좀 더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고 밝혔다.

▶“정치외교 이득 따라 움직이는게 진짜 학문 맞나” 젊은 역사학자들 방담(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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