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집, 이윤을 욕망하다

2016.12.19 20:48 입력 2016.12.19 20:58 수정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결핍이 낳은 허영의 거처

1980년대 초반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일대 정체불명의 ‘불란서식 2층 양옥’들(왼쪽 위 사진)과 1980년대 후반 아파트와 구별되는 주택양식으로 부유층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10억원을 호가하던 강남구 양재동의 대형 호화빌라들(왼쪽 아래). 1981년 신문 부동산 정보란의 서울지역 주택 가격(오른쪽 아래)과 1990년대 후반 아파트에 ‘아트월’ 도입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오른쪽 위).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 초반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일대 정체불명의 ‘불란서식 2층 양옥’들(왼쪽 위 사진)과 1980년대 후반 아파트와 구별되는 주택양식으로 부유층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10억원을 호가하던 강남구 양재동의 대형 호화빌라들(왼쪽 아래). 1981년 신문 부동산 정보란의 서울지역 주택 가격(오른쪽 아래)과 1990년대 후반 아파트에 ‘아트월’ 도입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오른쪽 위). 경향신문 자료사진

잠시 위임받은 국민의 권력을 마치 제 것인 양 휘둘러대는 자들의 몰염치와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천박한 언행이 세모의 풍경을 여지없이 구겨버리고 있다. 늘려 잡아도 100년, 아주 좁혀 보면 반세기를 조금 넘겼을 정도에 불과한 우리 거처와 삶에 뿌리내린 가치관이며 의식은 어떤 모습일까.

일컬어 주거문화라 에둘러 부르는 것 안에 똬리를 튼 채 언제든 튀어나올 욕망으로 잔뜩 부풀린 그것은 아마도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가장 강력한 동기인 이윤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결국 삶의 토대라거나 거주의 장이라는 따위 말은 책에나 실릴 법한 것으로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집’으로 불리는 거처가 이미 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하였다는 거절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 단순하게 권력자의 천박함이나 정치인들의 몰염치로 등치시켜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대로 이미 사고양식이 되어버린 아파트에서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은 되돌아봐야 할 것들이 아닐까 여겨지기에 한 해 끄트머리를 빗대 되새김해 본다.

■ 몰염치와 천박함

며칠 전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읽은 내용인데, ‘대학 시절 은사님을 뵈러 재건축된 아파트단지에 갔는데, 단지 안에 카페가 있어 들렀더니 찻값은 아파트 카드로만 지불하고 다음달 관리비에 청구된다는 것’이었다.

외부인에겐 찻값을 지불할 권리조차 사라진 ‘신세계’라 했지만 입주자들의 경우에는 그저 사고양식일 뿐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옥상의 민들레꽃>은 “우리 아파트 칠층 베란다에서 할머니가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로 시작된다. 누군가가 어디 사느냐 물었을 때 궁전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그렇게 묻던 사람 얼굴에 담빡 부러워하는 빛이 역력해지는 그런 아파트에서 사람이 죽은 것이다. 곧이어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벌써 두 사람째나 살기가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질까 궁전 아파트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궁전 아파트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 소문이 퍼져 보십시오. 사람들은 궁전 아파트 사람들의 행복이 가짜일 거라고 의심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썼다. 사람의 죽음보다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만이 부풀어 오를 뿐이다.

만약 아파트에서 누군가 몸을 던져 자살이라도 했다고 한다면 아파트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누구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혹시라도 집값이 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돈을 좇고 부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 불과한 것이다. 자살을 택한 사람의 극한적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그 자살이 아파트 내에서 일어났는지 여부와 그것이 미칠 부동산 가격에의 부정적 영향이 중요할 뿐이다.

하나 더 보자. 한수영의 소설 <조의 두 번째 지도>에 등장하는 묘사다. “조가 뛰어내렸다는 아파트에 사는 녀석은 부녀회장처럼 투덜거렸어. 지랄, 왜 남의 아파트에서 그런 거냐? 집값 떨어지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다른 소설인 <공허의 1/4>에서 ‘잔뜩 발기한 것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는 아파트 덩어리는 다시 거대한 난수표가 된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라 했듯 새삼 스스로를 다독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세칭 교육특구에서 벌어진 고등학생 ‘조’의 투신을 통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주변인들의 잠재적 불안과 불안의 자각 주체가 곧 ‘나’인 셈이다. 괴물로 변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 결핍과 과잉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이라는 책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이나 자각 혹은 드러냄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 집을 고를 때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 혹은 어떤 대상을 두고 호명하는 방식 등은 대부분 결핍에서 유래한다. 아이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를 두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한 결과가 아이의 성장과정이며 미래에 성취되길 바라듯 결핍에 들어있는 다른 말은 소망이기도 하다. 장미 문양을 요란하게 박아놓은 가정용 식칼처럼 거의 모든 사물에는 소망과 결핍을 각인해 그것이 성취되거나 향유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50년쯤 전인 1968년에 발표된 이범선의 소설 중에 ‘문화주택’이라는 단편이 있다. 동철이네 가족의 빈번한 이사와 관련한 일화를 그린 작품인데 부모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곳곳에 문화주택을 지어 겨울을 나기 전 다른 이에게 팔아치운 탓에 봄부터 가을까지 이미 일곱 번이나 집을 옮기자 동철의 누이가 엄마에게 투덜대는 장면이 흥미롭다. ‘식구가 들어 살아야 할 집, 그게 어째 상품이냐는 것이었다. 사실 동철도 누나의 그 말이 맞다’고 했던 것이다. 아이들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어떨까.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결코 나아졌다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풍경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말들 가운데 ‘로열층’이라는 것이 있다. 그나마 모두가 순진하던 시절 생겨난 말이어서 가만히 읊조리면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1982년에 발표된 박완서의 소설 <로열박스>에는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다. ‘십사층 아파트에서 십층이면 로열의 첫째 조건 합격. 게다가 정남향이고, 코너가 아니고 엘리베이터 박스 옆이 아니고 앞의 녹지대가 넓어 전망 좋고 그런 위치를 로열박스라고 하는 거’라고 말이다. 물론 여럿이 붙어살 수밖에 없는 아파트에서 비가 샐 이유도 없고,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울 일도 적을 뿐만 아니라 소음 역시 우려될 만한 곳이 아니니 살기에는 상대적으로 나을 것이라는 의미라지만 그 속내에 감추고 있는 진실은 비싼 값을 매겨 되팔 수 있다는 것이다.

로열층이 회자되던 그 시절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만들어 유통시키고 있을까. 천천히 지나온 세월을 거슬러 오르면 단박 만날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아트월’이나 ‘포인트 벽지’쯤이 아닐까. 아트란 곧 예술이고, 예술이라면 회화나 조각쯤을 상정했을 시절이니 분명 문화적 결핍이 드러낸 욕망이다.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서양 그림이나 조각을 어떻게 하면 늘 곁에 두어 문화의 동의어인 교양이라는 결핍을 해소할 수 있을까를 시장 주택인 아파트가 고민해 낳은 결과가 곧 아파트 거실의 일정 부분을 도려내고 이태리에서 수입한 대리석을 붙여놓은 것이다. 아트월의 탄생이다. 이범선의 <문화주택>에서 등장한 바 있는 ‘벽에다 인조대리석 조각을 붙여 전면을 마감’했던 것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면 장미칼에서 본 요란한 무늬와 색채를 가진 벽지로 거실의 한 면을 모조리 채우는 것이다. 포인트 벽지라 부르는 것이다.

‘역세권’이라는 말은 도시계획 분야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문용어였다. 도심교통난 해소를 위해 지하철이 등장하면서 정거장으로부터 500미터 이내 권역을 일컫는 말이다. 아무래도 이곳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니 땅값에 부합하도록 건축물 용량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말이다. 서울 최초로 서울역~청량리 구간이 개통된 것이 1974년이니 비록 1960년대부터 역세권이 회자되었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그 실제를 경험한 것은 40년 전이 처음이다. 그런데 지금은 도시계획이라는 전문영역에 비해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수막에서 더욱 자주 그 용어를 보곤 한다. 물론 과잉이 거듭된 말로 변해버린 역세권이다. 역세권보다는 초역세권, 더블 역세권, 트리플 역세권, 쿼드러플 역세권까지 볼 수 있다. 숲세권까지.

그런데 내용은 모두 다 분양이나 임대를 위한 술책에 불과한 허명이니 더블 역세권이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역과는 거리가 다소 있다는 말이고, 쿼드러플 역세권은 사실상 지하철역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때 다목적 홀이며, 다목적 운동장이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한 곳에 다목적 홀이나 다목적 운동장을 지어놓으면 모든 행사며 운동경기를 치를 수 있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축구전용 경기장이나 야구장 혹은 콘서트홀이 왜 필요할까. 다목적이라 이름 붙인 곳은 사실 어떤 운동경기에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블 역세권이며 트리플 역세권 등도 그렇다는 뜻이다.

■ 껍데기는 가라

우연히 라디오에서 나오는 광고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과거에는 작업복이라 했고, 한때는 유니폼이라 했지만 지금은 컴퍼니 웨어로 부른다는 것이다. 쓴웃음이 났다. 작업의 조건이며 노동 강도 혹은 대가는 변한 것이 없는데 작업복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말이다. 작업복이라 부르던 것을 컴퍼니 웨어라 부르기까지 과연 노동 강도며 환경이나 대가 혹은 작업에 임하는 사람들의 주머니 속 형편이나 복지수준이 얼마나 나아졌는가를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는 것이라면 이 역시 호칭의 과잉에 불과한 것이고 차라리 허영이라 불러야 옳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다시 아파트로 돌아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엔 아파트 단지를 들고 나는 출입구를 정문으로 불렀고, 하나로 충분하지 않을 때 둔 다른 곳은 후문 등으로 불렀다. 지금은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특히 최근에 새로 꾸민 아파트 단지라면 당연하다는 듯 게이트라 일컫는다. 내용은 그대로인데 호명 방법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물론 형식에는 조금 덧붙여진 것이 있기는 하다. 문주(門柱)라 부르는 기괴한 장식물이다. 문주는 문설주에서 유래된 말이다.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해 양쪽에 만든 기둥이 문설주다.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는 시어가 담긴 박목월의 시 ‘윤사월’의 고즈넉함이 정확하게 70년 만에 그 정반대 의미로 귀환한 셈이다. 강고한 배격과 함께 타자를 철저하게 구별하는 장치요, 수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빌라’나 ‘타운하우스’ 역시 마찬가지다. 고급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을 굳이 빌라나 타운하우스로 부르는 이면에는 역시 과잉과 구별 짓기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이미 고깃집으로 용도를 바꾼 ‘가든’도 매한가지다. 1970년대 후반 유행을 끌었던 ‘불란서식 2층 양옥’이 프랑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택양식이듯 대단위 단지형 아파트가 보편적인 도시주택의 규범이 되자 그것이 갖는 편리성을 유지하면서 작은 규모로 단지를 만드는 시장이 만들어졌는데 아파트로 부르거나 연립주택으로 부르자니 구별이 쉽지 않아 애써 만들어낸 말이 빌라요, 타운하우스인 것이다. 빌라나 타운하우스에 사는 이가 건축물대장을 떼 확인하면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으로 분류돼 있을 것이니 이 역시 과잉이거나 결핍이 빚은 허명이다.

“이들 빌라 내부는 1400만원짜리 이탈리아제 욕조, 오스트리아제 크리스털 샹들리에, 1000만원씩 하는 싱크대 등 값비싼 수입품목으로 꾸며져 있으며, 바닥은 평당 50만원씩 하는 대리석으로 깔려져 있다. 일부 빌라에는 엘리베이터와 유럽식 사우나, 실내 수영장까지 갖춰져 있다. …(중략)… 이들 호화빌라들은 대개 분양가가 평당 1000만원이 훨씬 넘고, 양재동 등 일부 강남지역 빌라들의 경우 매매가가 평당 1700만~2000만원에 달해 최고급 아파트로 손꼽히는 서초동 삼풍이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수준을 이미 뛰어넘었다. 부유층에게 80년대가 대형 아파트 시대였다면 90년대는 호화빌라의 시대인 셈”이라는 묘사는 이순원의 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시장에는 늘 광풍이 분다. 신동엽 시인은 오래전 몰염치와 천박함의 광풍 앞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박철수의 ‘거취와 기억’](13)집, 이윤을 욕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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