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간판을 바꿔달기로 했다…‘꼰대질 사절’에서 ‘꼰대질 환영’으로

2019.08.17 06:00
김혼비 | 에세이스트

나만을 믿을 수는 없어서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분위기 모르는 진성 꼰대들만 남고 진짜 충고는 듣기 어려워진 세상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혀 있는 줄도 모르는 유리상자 안에 내가 갇혀 있을 때
누군가 거센 두드림으로 유리에 균열이 가게 해주길 바란다
내가 알아서 그리하면 참 좋겠지만, 나만을 믿고 살 수는 없기에

‘꼰대질 사절!’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온몸으로 내뿜고 다니던 시절이 있다. 말로도 내비치고, 글로도 쓰고, 미간 주름 생성과 볼 근육 경직을 이용해 얼굴에도 매달고 다녔다. 결과는?

나의 희망사항과 완벽하게 거꾸로였다. 내가 질색하는 종류의 꼰대질은 양이 전혀 줄지 않았다, 전혀! 진짜 꼰대들은 내가 그런 메시지를 송출하고 있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해 여전했고, 눈치챈들 그 메시지의 수신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해(자기가 꼰대질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해) 또 여전했다. ‘혹시 이건 꼰대질 아닐까’라고 자기 검열할 줄 아는 사람들만 내 앞에서 조심했는데, 여기서 커다란 딜레마가 생겼다. 그렇게 고민할 줄 아는 사람들인 경우, 내가 귀담아들을 만한 충고나 조언을 해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그러니까 ‘꼰대질 사절’ 메시지가 결과적으로 순도 100% 고농축 꼰대들만 깔끔하게 남겨놓고 정작 듣고 싶은 이야기들은 싹 걸러버리는 바람에, 애초에 박멸하고자 했던 꼰대질‘만’ 계속 듣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작전은 대실패였다.

몇몇 친구들은 그게 왜 딜레마냐며, 충고나 조언이 걸러진 것만도 한결 상황이 나아진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작년 말,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초등학생이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를 묻는 사회자에게 명쾌한 답을 내린 적이 있다.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 이 장면은 캡처본으로 온갖 인터넷 게시판과 SNS를 떠돌며 큰 공감을 샀고, 충고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졌는데, 대체로 충고는 하지 않을수록 좋다, 누가 주제넘게 남의 인생을 두고 충고를 한단 말인가, 내 인생 가장 잘 아는 건 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충고에 지쳐 있었다. “이게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충고’의 외피를 빌렸지만 꼰대질로 느껴지는, ‘충고’를 핑계 삼아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을 뿐인 그런 말들에. 생각해보면 내가 ‘꼰대질 사절!’이라고 외치고 다녔던 것도 그런 말들에 지쳐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반응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곤 했다. “충고 따위 필요 없어, 아임 고잉 온 마이웨이!” 유형의 사람들에게 내가 품고 있는 커다란 동경심과 별개로 실제의 나는 그럴 만한 배포와 자기 확신이 없다는 걸 작전실패와 함께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배포란 것이 ‘자, 지금부터 배포와 ‘베프’가 되어보자!’라고 마음먹는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 확신이란 것이 ‘자기(확신이)랑 나랑 오늘부터 1일!’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내 곁에 우뚝 서는 것도 아니니까.

꼰대질은 질색이지만, 나는 나에게 꼰대질과는 조금 다른 질감을 가진 타인의 충고나 조언, 쓴소리들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문득문득 스쳐가며 도움이 되었던 빛나는 충고들이 수북이 쌓인 꼰대질에 묻혀 한 덩어리로 버려지는 것이 조금 아쉽다. ‘충고는 하지도 듣지도 말자’가 대세인 분위기를 마주할 때마다, 작전실패의 경험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처럼 결국 분위기 파악 못하는(할 생각도 없는) 진성 꼰대들만 남고, 조심성 많고 지각 있는 사람들의 적절한 충고마저 점점 듣기 어려워지면 어쩌지?

게다가 나와 비슷한, 충고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40대 중반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충고해주는 사람이 빠른 속도로 줄어간다는데, 30대의 끝물에 접어든 나도 벌써 20대 시절과는 달라진 걸 느낀다. 쓴소리들이 확실히 줄었다(그에 비해 꼰대질은 줄지 않았다는 점이 새삼 놀라운데, 지구가 멸망해도 두 가지가 살아남는다면 바퀴벌레와 꼰대질이 아닐까 싶다. 바퀴벌레들이 꼰대질을 하겠지). 나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을지 몰라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연령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사회구조 안에서 내가 서있는 자리의 좌표도 어느새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중간관리자 내지는 완연한 기성세대인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늘었고, 충고에 따라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가변성의 측면에서도 30대 후반은 20대에 비해 촉망받을 만한 구석이 많지 않(아 보이)기에 충고는 더욱 줄어든다. 그래도 아직은 20대 친구들에게 충고도 듣고 조언도 받지만, 그들도 같이 나이를 먹을 테니 몇 년 후에는 나에게 충고를 해줄 만한 그 시대의 20대가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주변에는 그 누구의 충고도 필요 없이, 자기 소신껏, 길을 잃지 않고, 혹은 길을 잃더라도,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잘 끌고 나가는 주체적이고 현명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기분을 거스르는 말들(“충고는 더 기분 나쁘다”는 초등학생의 통찰력이란)에 귀를 꽉 막은 채, 듣고 싶은 말들만 듣고,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들로만 곁을 채우며 살다가 견고해진 아집과 함께 훌쩍 꼰대가 되어버린 사람들 또한 있다. 나도 당연히 전자처럼 살고 싶지만, 남들이 그걸 할 수 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나는 충고나 조언을 멀리했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은 사람이기에 마음 놓고 귀를 막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가끔 스스로에게 이런 의문이 든다. 언젠가부터 꼰대질이 될까봐, 꼰대가 되기 싫어서, 더 솔직히 말하면 꼰대로 여겨지기 싫어서, 누군가 충고나 조언을 해달라고 청해도 가급적 다 피하게 됐는데, 그렇다고 내가 꼰대가 아닌 것일까? ‘타인에게 충고하는 행위’가 꼰대의 특징으로 워낙 많이 회자되다 보니, 충고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나 꼰대 아님’ 인증서를 쉽게 획득하려는 마음이 기저에 있는 건 아니고? 마치 그게 꼰대의 전부인 것처럼. 사실 꼰대의 특징 중에는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경험, 지식만이 대체로 옳다고 여기는 상태’ 또한 분명히 있는데. 나는 이 특징을 극복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느낀다. ‘남에게 충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이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꼭 타인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필요한 충고를 대신할 만한 것을 책에서, 경험에서, 사고실험에서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나는 나를 그리 믿지 못한다. 나의 뇌는 게으르고 보수적이며 다분히 확증 편향적이다. 의식을 벼려 노력하지 않는 한(어쩌면 노력해도) 평소 생각해오던 방식, 익숙해서 편안한 방식대로 정보를 처리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책을 고를 때나 읽을 때, 이미 무의식적인 어떤 의도가 반영된 시선으로 나에게 유리한 근거들을 모으고, 내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볼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는 원하는 것만 보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맞춤법 책을 읽다가 운 적도 있다. 한창 되는 일도 없고 하는 일마다 망해서 내 자신이 너무나 ‘무쓸모’하게 느껴져 괴롭던 시절, 맞춤법 책을 읽다가 ‘쓸모 있다’는 띄어 쓰고 ‘쓸모없다’는 붙여 써야 문법에 맞으며, 그건 ‘쓸모없다’는 말이 ‘쓸모 있다’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기 때문에 표제어로 등재되어 그렇다는 구절을 읽고, 그래, 세상에는 ‘쓸모없다’를 쓸 일이 더 많은 거야! 쓸모없는 것들이 더 많은 게 정상인 거야! 나만 쓸모없는 게 아니야! 이 책은 은근히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어!(당연히 그럴 리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맞춤법 책이다…)라고 멋대로 위로받고 운 것이다. 이런 나를 무슨 수로 믿는가….

경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경험에서 배운다’라는 말을 반 정도만 믿는다. ‘본인이 직접 경험하는 것 이상의 답은 없다’라는 말 역시 반 정도만 믿는다. 경험을 응용하고 받아들이고 쌓아가는 방식에는 여전히 확증 편향적으로 ‘믿을 수 없는 나’가 개입한다. 비슷한 상황을 앞서 겪어본 타인의 충고는 그 사람만의 경험일 뿐, 내가 겪을(혹은 겪은) 경험의 양상과는 다르겠지만, 그 ‘다름’은 내가 내 안에 갇혀 있느라 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는 다른 가능성들에 때때로 눈을 돌리게 해서 고민해볼 수 있는 선택지의 폭을 넓힌다. ‘내가 괜히 건넨 충고가 저 사람의 경험을 제한해버리면 어쩌지’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은데, 머리에 총을 겨누며 “내 충고대로 무조건 따르라!”고 협박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꼭 그러리라는 법도 없다. 똑같이 따르지 않더라도, 고민해 볼 수 있는 선택지를 늘려주는 타인의 경험들은 적어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된다. 사람은 경험에서도 배우지만 어떤 선택을 하기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과정에서 배우기도 하니까.

‘자기 인생에 관해 가장 잘 알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건 자신이다. 타인이 뭘 안다고 남의 인생에 충고하는가’라는 말은 일리 있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시야 또한 매우 좁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의 여러 방향에서 남동쪽만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남동쪽만 바라보며 1000번 걱정하고 1만번 고민한들, 죽어도 북서쪽은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속도 모르고, 속편하게, 툭툭 던지는 말들 중에 비로소 북서쪽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말이 끼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역시 나는 충고 듣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꼰대질 사절!’을 철회하는 동시에 ‘꼰대질 환영’으로 간판을 바꿔 걸었다(울며 겨자 먹기로 바꾼 거라 차마 느낌표까지 그대로 찍지는 못하겠다). 어차피 ‘사절’이든, ‘환영’이든 순종 꼰대질의 양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 그러니까 꼰대질은 선언적으로 필터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포기하고, 꼰대질이 될까봐 충고를 아끼고 머뭇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아예 활짝 개방한 것이다. 물론 오랜 세월 곁에서 충고와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신뢰하는 친구들이 이미 있지만,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의, 나에 대해 (친구들에 비해)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그렇게 환영 메시지를 1년쯤 말로도 내비치고, 글로도 쓰고, 입꼬리 상승 각도와 볼 근육 이완을 이용해 얼굴에도 매달고 다녔더니 그제야 입이 무겁고 신중한 사람들의 충고들까지 내 귀에 닿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러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꼰대란 정말 무섭구나. 변함없는 꼰대질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 사람들이 지친 나머지 귀를 막아버린다 → 양질의 충고들까지 차단된다 → 자기 안에 갇힌다, 이 네 단계를 거치며 2세대 꼰대들을 양산하기 딱 좋은 포맷인 것이다.

남에게 충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가장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혀 있는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쪽도 좀 보라고, 잠깐 나와 보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으로 유리에 균열이 가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뜻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주기를 바란다. 내가 알아서 먼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나만을 믿을 수는 없어서. 나만을 믿고 살 수는 없어서.

▶필자 김혼비

[김혼비의 혼비백서](4)간판을 바꿔달기로 했다…‘꼰대질 사절’에서 ‘꼰대질 환영’으로


퇴근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출근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직장인이자 틈틈이 이런저런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이다. 축구와 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2018년에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2019년에 <아무튼 술>을 썼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