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언제 등교시킬 것인가보다 중요한 것

2020.06.02 03:00 입력 2020.06.02 03:02 수정

[장대익 칼럼]누구를 언제 등교시킬 것인가보다 중요한 것

대학 역사상 이런 학기는 처음이라고들 한다. 이번 학기 대학 수업은 결국 비대면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으로 수업 한두 번 만에 종강을 맞던 1970~80년대 대학가도 있었고, 6·25전쟁 통에도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이 있었다. 하지만 테크놀로지 덕분에 이젠 등교 없는 학업도 가능해졌다.

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그렇다면 우리나라 초·중·고 중에서 굳이 등교하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할 학년은 누구일까? 당연히 고3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정부가 선택한 등교 1순위는 고3·중3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책상마다 투명 아크릴 방패를 부착하거나, 아예 복도로 책상 한 줄을 뺀 기이한 고3 교실 풍경도 보게 되었다. 우리가 좀 역동적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등교가 중요한지, 대체 왜 고3부터였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묻자. 대체 학교란 무엇인가?

고3을 등교 1순위로 둔 것은 입시생에 대한 배려란다. 입시를 치르려면 내신이 있어야 하고 내신은 시험 점수가 필수적이니 등교해야 한다는 논리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면 한국인은 분명 입시를 숭상하는 입시교인들이다. 입시에서의 성공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는 사람들이다. 어떤 위협이 와도 입시와 시험은 금과옥조다. 그러니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서도 교육계의 관심사는 온통 어떤 학년을 언제 등교시킬 것인가이다. 올림픽처럼 열리는 ‘정시 대 수시 비율’ 정하기가 교육계의 최대 연례행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교주는 때마다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변경함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것에 목을 맨 입시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힘과 다양한 경험, 새로운 지식과 가치를 어떻게 교육하여 훌륭한 인재로 성장시킬 것인지에 대해 심혈을 기울일 틈이 없다. 역시나 이번 사태에도 고3 우선주의가 교육계의 최우선 가치였다.

교육적 관점에서 보자면, 등교를 위한 배려 대상 1순위는 비대면 수업이 힘든 학생들이어야 했다. 가정 형편상 온라인 접속이 어렵거나 어른의 돌봄을 받기 힘든 아이들이 첫 번째 등교자들이어야 했다. 만일 고3 내신 평가가 그렇게도 중요했다면, 해법은 그들을 먼저 등교시키는 안일함이 아니라 비대면 시험 및 수행평가 방법을 찾는 창의성이어야 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누구를 먼저 등교시키느냐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이어야 한다. 학생들도 이 코로나19가 대체 왜 일어났는가가 궁금하고, 이 때문에 우리 사회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이런 팬데믹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진도 빼기에 몰두하고 있다.

팬데믹은 방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크게는 인류 문명의 기원, 성장, 멸망에 관한 대서사이다. 저명한 의학사학자 스노든이 최근 <전염병과 사회>라는 책에서 서술했듯이, 모든 팬데믹에는 희생양 찾기와 혐오,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이 공통적으로 뒤따라왔다. 예컨대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인의 3분의 1이 사망했던 14세기에는 유태인들이 희생양이었고, 농노들이 대거 사망함으로써 봉건제도의 기반 자체가 흔들렸으며, 중세가 무너지고 르네상스라는 휴머니즘이 등장했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음을 우리는 매일 목격하고 있다. 미·중 대통령들은 연일 서로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고 있고, 우리는 성소수자를 희생양 삼아 이태원 클럽 관련 집단감염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며, 북미·유럽 중심의 선진국 담론이 의심받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싹트기 시작했다. 며칠 전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 백인 경찰의 과잉제압으로 비참하게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미 전역의 항의 시위는 팬데믹에 만연하는 인종 간 혐오와 차별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번 팬데믹은 진화생물학, 통계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서부터 철학, 역사 같은 인문학, 그리고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초학제적 주제인 셈이다. 지금 여기서 이보다 더 좋은 교과서가 또 있겠는가? 학교에서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팬데믹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2차 세계대전 후에 전쟁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우리에게는 인류가 겪고 있는 위협에 대해 후손들에게 해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쩌면 팬데믹보다 더 크고 위급한 위협은 기후변화일 것이다. 기후 전문가들에 따르면, 앞으로 한 세기 내에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을 1.5도 선에서 막지 못한다면 달궈진 지구는 사피엔스 문명 자체를 쓸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류 전체가 저지른 과오 때문에 100년 내로 인류 문명이 붕괴할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입시용 오지선다형 문제 풀이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가? 그러나 고3 등교 1순위를 당연시하는 입시교인들에게는 “학교에서 지금 당장 팬데믹과 기후변화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오히려 한가로운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1820년대 전염병으로 이누이트족의 노인들이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누군가 사망하면 그가 만든 물건도 함께 묻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결국, 생필품이었던 카약, 작살, 활 등을 만드는 지식을 전수해줄 수 있는 선생들과 그들의 물건이 동시에 사라졌고, 40년이 지난 후 구원의 손길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아사 직전의 상태에 내몰렸다.

사피엔스에게 학교란 사실과 가치의 전수를 통해 세대의 말단에까지 지혜의 혈액을 공급해주는 문명의 심장이다. 전수하지 않으면 문명은 죽는다. 전수의 방식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전수의 내용이다. 지금은 누구를 언제 등교시킬 것인가를 물을 타이밍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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