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사철 검푸르던 지리산의 ‘회색 탈모’…그 자리를 활엽수들이 차지

2020.06.29 06:00 입력 2020.07.07 09:54 수정
김한솔 기자·영상 최유진 PD

지리산 구상나무

[기후변화의 증인들]②사철 검푸르던 지리산의 ‘회색 탈모’…그 자리를 활엽수들이 차지

지리산 임걸령으로 가는 길에서 발견한 구상나무 고사목들. 뿌리가 통째로 뽑힌 채 죽어 있거나(왼쪽 사진), 선 채로 고사해 회백색으로 변해 있다. 국립공원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인해 지리산 반야봉·영신봉·천왕봉의 구상나무 고사목이 최근 10여년간 2~5배 이상 증가했다.

지리산 임걸령으로 가는 길에서 발견한 구상나무 고사목들. 뿌리가 통째로 뽑힌 채 죽어 있거나(왼쪽 사진), 선 채로 고사해 회백색으로 변해 있다. 국립공원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인해 지리산 반야봉·영신봉·천왕봉의 구상나무 고사목이 최근 10여년간 2~5배 이상 증가했다.

산을 어쩌다가 찾는 이들에게 5월 초의 지리산은 썩 건강해 보인다. 밝은 연두색부터 탁한 풀색까지, 세상의 모든 초록이 지리산에 있는 것 같다.

지리산국립공원 산청분소 직원인 민병태씨(64)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의 기억 속 지리산의 색깔은, 더 짙었다. “저기가 옛날에는 시커맸는데…. 시커맸어요, 침엽수 때문에. 사시사철 ‘푸른’ 게 아니고, 사시사철 ‘검은’색이었죠.”

이곳의 직원이 되기 전 그는 30년간 지리산 치밭목대피소의 산장관리인이었다. 지리산 해발 1425m에 위치한 이 대피소는 지리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1916m)과 500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높고 외딴 곳에 있다. 그는 치밭목대피소가 ‘대피소’라는 이름을 갖기도 전부터 그곳에 살며 등산객들을 돌봤다. 공단이 노후한 산장을 철거하고, 새로 짓기로 하면서 3년 전에야 비로소 ‘하산’했다. 수십년간 산 한가운데서 살았던 그는 지리산, 그중에서도 인간의 접근이 쉽지 않은 아고산대 생태계 변화를 가까이서 목격한 몇 안 되는 증인이다. 그와 지난달 초 지리산에서 만났다.

지리산 아고산대 침엽수인 구상나무 집단 고사 가속
30년 산장관리인 출신 “어느날 풍경이 낯설게 보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 산청분소 직원인 민병태씨가 지난 5월7일 지리산 임걸령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공단 직원으로 일 하기 전 수십년 간 지리산 치밭목대피소의 산장 관리인으로 일했다. 최유진PD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 산청분소 직원인 민병태씨가 지난 5월7일 지리산 임걸령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공단 직원으로 일 하기 전 수십년 간 지리산 치밭목대피소의 산장 관리인으로 일했다. 최유진PD

아고산대는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활엽수들이 있는 온대림과, 나무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고산지대 사이에 위치한 식생대다. 이곳의 연평균 기온은 4~5도 이하로 춥고, 비와 눈이 많이 내리며, 바람이 많이 분다. 아고산대는 민씨가 기억하는 ‘사철 푸르다 못해 검었던’ 상록침엽수의 주 서식지이기도 하다. 상록침엽수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지리산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은 구상나무(Abies Koreana)다. 지리산 아고산대의 침엽수 분포 면적은 총 41.88㎢인데, 이 중 99.84%가 구상나무의 서식지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산의 색은 그 색을 채우던 것들이 줄어들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산에 살았던 민씨도 산의 색깔이 ‘옅게’ 변하는 것을 눈치채는 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문 지식도 없고, 또 계속 보던 것(풍경)이다 보니 오히려 변화의 심각함을 잘 못 느꼈어요. ‘뭔가 이상한데’ 싶으면서도 감이 잘 안 왔던 거죠.” 그러다 문득 매일 보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 날이 있었다. “겨울에 숲의 푸른색이 없어졌어요. 회색지대로 변한 겁니다. ‘어? 뭐지?’ 했어요.” 그가 반야봉 능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엔 숲이 시커멀 정도로 전체가 다 침엽수였는데, 지금은 활엽수들이 치고 올라와서…. 탈모현상처럼 보여요. 다 녹색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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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해발 1320m의 임걸령까지 가는 길에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모여있는 곳이 나왔다. 한때 소규모로나마 군락을 이뤘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은 다양한 형태로 죽어있었다. 누군가 나무를 손가락으로 집어 땅에서 쏙 뽑아낸 것처럼 뿌리가 통째로 뽑힌 채 죽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어떤 나무는 뿌리는 박혀 있으나 중간이 뚝 부러져 있었다. 똑바로 선 채로 죽어 색깔만 옅은 회색으로 변해 있는 나무 옆에는, 마치 종이가 찢어진 것처럼 몸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채 죽어있는 나무도 있었다. 민씨가 찢어져 죽은 나무 옆에 섰다. 땅에서 산 시간보다 산에서 산 시간이 더 긴 그는 나무를 ‘친구’라고 불렀다. “전문용어로는 잘 모르겠고, 그냥 약해요. 싱싱한 친구들은 탄력이 좋아서 바람에 움직였다가도 다시 돌아오죠. 그런데 탄력이 없는 친구들은 그냥 갈라집니다. 통째로 찢어져요. 한쪽은 이렇게 서 있고, 한쪽이 (찢어져) 쓰러져 버리면, 남아있는 부분도 결국은…(죽는 거죠).”

강설량 줄고 고온건조해진 봄에 생육시기 수분 부족
한국에서만 자생하지만 국내선 멸종위기종 분류 안 돼

녹색연합 자연생태팀 서재철 전문위원. 최유진PD

녹색연합 자연생태팀 서재철 전문위원. 최유진PD

26년차 환경운동가인 녹색연합 자연생태팀의 서재철 전문위원도 지리산 구상나무의 고사 현장을 목격한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2010년 백두대간 생태조사를 하던 과정에서 처음 침엽수 고사 현장을 봤다. “(보자마자) ‘아, 죽어간다’ 했어요. 그런데 그 뒤로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거예요. 2012년, 2013년에는 더 많이 보였어요.” 그러다 2014년 지리산 천왕봉 인근에서 대형 산사태가 발생했다. 그는 산림청 요청으로 산사태 현장을 모니터링하는 헬기에 탔다. “카메라 셔터스피드를 500분의 1로 놓고 훑듯이 죽 찍었어요. 나중에 사진 판독을 하는데 깜짝 놀란 거예요. 반야봉 쪽에서 떼로 죽어있는 게 나오더라고요. 이 정도인가, 심각하다(고 생각했죠.)”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반야봉의 해발고도는 1732m다. 그는 사진에 찍힌 현장을 직접 찾아갔다. 사진에서 봤던 그대로 집단 고사한 구상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때부터 아고산대 침엽수 고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고, 2년 뒤인 2016년 식목일에 이 문제를 대대적으로 제기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정보기술(IT) 회사에서 일하는 박진성씨(38)는 2018년 내내 서 위원과 함께 전국의 산을 함께 다니며 침엽수 고사 현장을 조사했다. 그는 민병태씨 같은 산악인도, 서 위원과 같은 환경운동가도 아닌, 휴일마다 ‘백패킹’하는 것이 취미인 직장인이다. 녹색연합에서 침엽수 생태조사를 함께할 일반인들을 모집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지원했다. 그는 1년간 고산지대 고사목의 높이와 너비를 재고, 색이 변한 잎사귀들을 체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처음엔 어떤 것이 구상나무 고사목인지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아 온종일 10~20그루를 찾는 것도 힘들었는데, 나중엔 하루에 40~50그루는 쉽게 찾아냈고, 속도가 더 붙은 뒤엔 하루 조사로는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고사목 수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못 찾아서 안 보였던 것일 뿐, 보이게 되니까 조사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올해 2월 발간된 국립공원연구원의 ‘지리산 아고산대 침엽수 고사개체 공간정보 구축 및 입지환경 분석’ 보고서에는 세 사람의 증언이 통계로 기록돼 있다. 지리산 반야봉·영신봉·천왕봉의 구상나무 고사 현황을 조사한 이 보고서는 “세 지역 모두 최근 10여년간 고사목 개체수가 2~5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다. 또 구상나무에 대해 “기후변화에 따른 수분 공급량 부족, 증발산량 증가, 광합성-호흡량 불균형 등에 따른 생리적 스트레스 가중으로 자생지 소멸 위험성이 점차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연구에 참여한 국립공원연구원 이나연 연구위원은 “전 세계적으로 고지대에 살고 있는 구상나무 같은 ‘바늘잎’ 나무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면서 “지구의 기후변화를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녹색연합 ‘그린 백패커’로 활동하며 고산 침엽수 생태조사에 참여했던 시민 박진성씨.최유진PD

녹색연합 ‘그린 백패커’로 활동하며 고산 침엽수 생태조사에 참여했던 시민 박진성씨.최유진PD

사실 나무는 여러 원인으로 고사할 수 있다. 태풍이나 강풍에 꺾일 수도 있고, 자연적으로 수명이 다할 수도 있다. 최근 10여년간 가속화되고 있는 구상나무 고사의 주된 원인이 ‘기후변화’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연구위원은 ‘온도 상승’을 들었다. 이 연구위원에 따르면 전라북도 남원의 연평균 기온은 2012년 11.9도였는데, 2019년 13.3도로 1.3도가 올랐다. 같은 기간, 고지대인 지리산 반야봉 지역의 연평균 기온은 4.2도에서 7.7도로 상승했다.

민병태씨는 그것을 피부로 느꼈다. 겨울철 내리는 눈의 양이 줄었고, 봄은 고온건조해졌다. 그는 “1980년대 초반만 해도 5월 말~6월 초까진 비탈진 계곡이나 응달 쪽에는 잔설이랑 얼음이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2월 말쯤 되면 잔설이 없다”면서 “작년 겨울엔 측심할 눈도 없었다. 한 번 폭설이 왔는데 온도가 높다보니 2~3일 사이에 다 내려앉아 버렸다”고 했다.

제주의 해녀들이 기후변화로 바다 수온이 높아져 더 이상 예전만큼 두꺼운 잠수복을 입지 않게 된 것처럼, 민씨의 겨울산행용 보호장비 역시 간소해졌다. “장갑 하나만 있어도 어지간히 버티고, 신발도 완벽한 동계화가 아니더라도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어요.”

이러한 변화들은 복합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나무의 떼죽음을 야기하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겨울철 눈 녹은 물이 토양으로 흡수되면서 나무의 생육을 활성화시키는데, (눈의 양이 줄면서) 나무들이 한창 생육을 해야 할 시기에 수분이 부족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태풍의 빈도나 강도가 높아진 것도 지리산 나무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구상나무는 뿌리를 수직으로 깊게 박아내리는 대신 얇은 뿌리를 수평으로 퍼뜨리며 자라난다. 토양의 깊이가 얕고, 암반지대가 많은 아고산대 환경에 버틸 수 있게 발달한 뿌리다. 하지만 따뜻하고 건조해진 환경에서 이런 뿌리는 쉽게 뽑혀 버리고 만다.

세계자연보전연맹(ICUN)이 ‘위기종(Endangered)’으로 지정한 구상나무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에서밖에 자생하지 않지만 아직 국내에선 멸종위기종으로 분류조차 돼 있지 않다. 사실 아고산대는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어서 구상나무가 없어졌다고 당장 ‘인간의 생활’에 타격을 줄 것 같진 않다. 구상나무가 사라진 땅이 황무지로 남는 것도 아니다. 쇠약해진 구상나무가 고사한 자리엔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는 낙엽활엽수가 들어서고 있다. 구상나무가 외국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가 있다고는 하나, 그게 구상나무 고사를 우려해야 하는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구상나무의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연구위원은 “식물의 변화는 수백년, 수천년에 걸쳐 일어나는데, 현재의 변화는 인간의 ‘인위적인’ 활동으로 인해 (지구) 온도가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라 자연이 스스로 변화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행기’를 비유로 들었다. “비행기를 생태계라고 한다면 부품 한두 개가 빠져도 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부품이 사라지거나 고장나면 날 수 없잖아요. 아고산 생태계가 사라지는 것도 그런 위험성이 있는 거죠. 구상나무의 고사는 단순히 침엽수에서 낙엽활엽수로 ‘세대교체’가 되는 게 아니라, 생태계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부분으로 봐야 합니다.”

지리산국립공원 전남사무소의 신창근 계장은 ‘팔각’의 예를 들었다. “신종플루의 치료약, 타미플루의 원재료가 되는 나무가 ‘팔각’인 거 아세요? 과거엔 중국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 정도로 쓰였지만, 지금은 위상이 달라졌잖아요. 구상나무도 지금은 몰라요. 한 종 한 종의 가치는 현재 일부만 밝혀져 있을 뿐이죠. 지금으로선 가치 평가를 할 수 없어요.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까, 우리로서는 한 종이라도 더 갖고 있는 게 유리한 거죠.”

마지막으로 민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온도가 갑자기 이렇게 올라가 버리는 것은 (구상나무에는) 천재지변이에요. 여기서 붙박이로 살고 있는 친구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거잖아요. 가끔 산에 오는 등산객 중에는 (심각성을) 못 느끼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전 심각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인류도 (지구의) 전체 틀에 한 구성원이잖아요. (자연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관계잖아요. 그래서 저는…, 전 인류의 회의가 필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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