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경계에 버티고 선 아이들아, 괜찮니?

2020.07.31 13:45 입력 2020.07.31 21:46 수정

[책과 삶]경계에 버티고 선 아이들아, 괜찮니?

곰의 부탁
진형민 지음
문학동네 | 192쪽 | 1만1500원

시급 없이 건당 3000원. 수수료 500원을 제하면 한 ‘콜’에 2500원이 남는다. 망해가는 동네 피자집에서 배달을 하는 소년은 피자 배달을 그만두고 애플리케이션으로 ‘콜’을 받는 배달대행에 나선다. “너 정도면 한 달에 3백도 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사장 형의 말에,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보기도 한다. 부지런을 떨면 할머니에게 다음달 생활비를 줄 수 있고, 돈이 모자라 하나밖에 사지 못한 ‘커플링 아닌 커플링’의 나머지 한 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형민의 소설집 <곰의 부탁>에 수록된 단편 ‘헬멧’은 배달대행 플랫폼노동에 뛰어든 10대 청소년 이야기다. “돈 생각 좀 안 하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소년은 머릿속으로 쉼 없이 돈 계산을 한다. 하지만 계획은 금세 어그러진다. 배달대행의 세계에서 ‘시간은 곧 돈’이지만, 그의 셈법 밖에 있던 변수들이 번번이 그를 넘어뜨린다.

“피자집에서 일할 때는 배달 주문 없는 날이 땡잡는 날이었는데 여기서는 아니었다. 배달을 한 번이라도 더 뛰어야 내 손에 쥐는 돈이 그만큼 많아졌다. (…) 이왕이면 가깝고 편한 코스로 두 개든, 세 개든 배달을 업어 가려고 다들 눈이 벌게져 있었다.” 더 많은 ‘콜’을 잡기 위해 배달노동자들끼리 대놓고 신경전을 벌이지만, 아무도 먼 거리에서 온 피자집의 ‘콜’은 받지 않으려 한다. 피자집의 단골이었고,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철길 너머 ‘이태리 할아버지네’의 주문이었다.

소설가 진형민. 문학동네 제공

소설가 진형민. 문학동네 제공

배달 노동 목숨 건 질주
각자의 사정과 상처를 안고
변방으로 밀려나 살아가는 청소년
어설픈 위로와 섣부른 희망보다
거기에 있음을 아는 것이
안부 인사가 나의 시작

손해를 보면서도 멀리 사는 단골의 배달 요청에 응하는 피자집 사장도, 마음속 계산기를 두드리면서도 결국 배달에 나서는 소년도 소설이 그리는 ‘속도의 세상’에선 비켜 있는 존재들이다. 소설은 자꾸만 위험한 질주로 내몰리는 가난한 10대 청소년의 눈을 통해 달라진 세상의 풍경을 대비시켜 보인다. 속도의 세계에서 누구도 소년에게 안전을 위해 ‘헬멧을 쓰라’고 얘기하지 않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소년은 스스로 헬멧을 눌러쓴다.

책에는 2500원에 목숨을 건 질주로 내몰리는 청소년들을 그린 소설(‘헬멧’ ‘그 뒤에 인터뷰’) 외에도 퀴어(‘곰의 부탁’), 난민(‘람부탄’), 다문화가정(‘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날’) 등 교차하는 경계 위에 선 아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2012년 창비 좋은어린이책 대상을 받은 후 동화를 주로 써온 진형민 작가는 자신의 첫 청소년 소설집인 이 책에서 각자의 사정과 상처를 안고 버티며 살아가는 아이들을 소설이란 무대 위에 올렸다.

표제작인 ‘곰의 부탁’에서 화자인 ‘나’는 친구 ‘곰’으로부터 몇 년 전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발견됐다는 로마시대 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손을 잡고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사람의 뼈는 ‘모데나의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몇 년 뒤 DNA 검사에서 뼈 주인이 모두 남성으로 밝혀지자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진다. “두 사람은 형제라고, 사촌이라고, 전쟁 때 같이 싸우다 죽은 전사들이라고. 모데나의 연인이 하루아침에 모데나의 전사가 된 거야. 웃기지 않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마침 ‘곰’은 학교 연극 동아리가 축제 때 올릴 연극에서 로미오 역을 맡았다. 어느 날 동아리에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데, ‘곰’과 ‘양’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 봤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맡은 역할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 ‘로미오와 머큐시오’였고, 소문이 돌자 ‘양’은 사라진다. 작가는 첫사랑이라는 환희의 감정과 함께 찾아온 두려움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곰’과, 그런 친구 곁을 지키는 ‘나’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따뜻하게 풀어보인다.

소설의 말미, ‘곰의 부탁’으로 ‘나’는 곰, 양과 함께 겨울바다를 찾는다. “한 번도 자세히 본 적 없었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해는 빨간색’이라고 믿어왔던 ‘나’는 눈부신 노란색의 해가 하늘을 불긋불긋한 물결로 물들이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새 해가 훌쩍 떠올라 세상이 구석구석 또렷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 수록작인 ‘그 뒤의 인터뷰’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이, ‘정현’을 기억하는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각자가 알고 있는 정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 형식 구성을 취했다. 정현에 대한 이야기의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지면서, 독자들은 또 다른 단편 ‘헬멧’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진형민 작가는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학생들 이야기를 담은 약전에 참여했다. 그는 약전 작업을 통해 ‘내 곁으로 온 아이들’인 고운이와 경미를 이야기하며, “이 책을 (여름에 태어난) 두 아이에게 생일 선물로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썼다.

“세상은 순식간에 나아지지 않아서 여전히 변방으로 밀려나는 아이들을 만난다”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은 어딘가에서 긴 터널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이들에게 ‘괜찮냐’고 묻는 안부 인사처럼 읽힌다. “어설픈 위로도, 섣부른 희망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나는 숨죽여 소설을 씁니다. 너는 괜찮아? 짧은 인사를 남기기로 합니다. 거기 있음을 아는 것이 나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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