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관짝소년단, 차별주의자들에게 승리의 경험을 줄 때 벌어지는 일

2020.08.15 06:00
칼럼니스트 위근우

대중의 기분이 ‘기준선’ 된 사회는 또다른 어린 차별주의자들을 낳는다

그래픽 | 김덕기 기자

그래픽 | 김덕기 기자

선을 넘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니, 정확히 선이란 무엇일까. “제 의견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선을 넘었”다는 방송인 샘 오취리의 사과문을 보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해마다 재치 넘치는 패러디 코스튬 플레이로 유명한 의정부고등학교 졸업사진 촬영 중 올해는 소위 ‘관짝소년단’이라는 인터넷 ‘밈(meme)’으로 유명한 가나 상조회사 직원들을 패러디한 남학생들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원본을 흉내 내기 위해 얼굴을 검게 칠하며 시작됐다. 당연하지만, 그들의 분장이 흑인의 외모를 희화화하는 과거 미국의 ‘블랙페이스’와 다를 바 없지 않냐는 비판이 나왔고, 이후 그 스스로 흑인 당사자인 샘 오취리는 본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2020년에 이런 것을 보면 안타깝고 슬프다. 흑인들 입장에선 매우 불쾌한 행동”이라 언급했다.

이후 벌어진 일은 알려진 바와 같다. 특별히 악의를 품지 않은 패러디에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은 과하다는 지적, 다른 문화를 조롱하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이 한국 교육을 무시했다는 지적, 그도 방송에서 눈 찢는 행위를 하며 동양인 비하를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샘 오취리에게 차별적으로(나는 ‘무차별적’이라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썼다) 쏟아졌다. 결과적으로 샘 오취리는 위에서 인용했듯, 본인 발언에 대해 사과했고, 이후 공주고등학교 남학생들도 얼굴을 검게 칠한 ‘관짝소년단’ 패러디를 하며 심지어 이 중 한 남학생은 샘 오취리를 태그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벌어진 일을 요약하면 차별주의자들의 1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선은 누가 어떻게 넘은 것인가.

의정부고 학생들을 옹호한 이들의 주장처럼, 또한 그들 본인의 주장처럼 그들은 그저 흑인이 나오는 영상을 패러디하는 과정에서 분장했을 뿐 흑인을 비하하거나 차별할 의도는 없었을지 모른다. 2주 전 동일한 지면에서 나는 야구해설가 안경현의 “여권이 없어 광주에 못 간다”는 지역차별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악의 없는 차별은 오직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차별적 전제와 구조를 인식하고 교정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아직’ 덜 나쁠 수 있는 것이다.” 차별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벌어진 차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단지 이후 그것이 차별임을 깨달았을 때, 이에 대해 사과하고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다짐과 교정 과정에 대해 그 진정성을 조금 보증해주는 작은 증거가 될 뿐이다. 알고도 반성하지 않는다면 악의적 차별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했어야 하는 건 그들에게 악의가 없었으니 차별이 아니라고 면죄부를 발부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흑인에게 상처가 되는 차별적 행동이 맞다는 것을 다시 한번 해당 학생들과 이를 지켜보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강하게 주지시키고 다만 악의가 없었으니 뼈아프게 반성하고 앞으로 더 나은 시민이 될 기회 정도는 주는 것이어야 했다. 그들이 실수할 수 있는 미성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 해도 그러하다. 우리는 미성년이 절도나 폭행, 교내 따돌림 등 윤리적 잘못을 저지를 때 성인의 잘못보단 관용적으로 접근하지만, 해당 행위들이 잘못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히 인지시킨다. 그런데 왜 인종차별 문제에 있어서만 의도가 없었으니 차별이 아니고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미성년의 악의 없는 실수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아닌, 관용을 빌미 삼은 인종차별의 정당화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샘 오취리가 아닌, 그에게 직접 악플을 달던 악의적 차별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이 선을 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단 이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어느 정도 심리적 강제력을 발휘할 만큼의 가상의 선조차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진실에 가깝다. 이번 의정부고 사건이 화제가 된 이후, 이를 전하는 언론의 보도는 처참한 수준이다. 대다수의 매체들이 샘 오취리의 비판과 이에 대한 몇몇 네티즌들의 반박을 동등한 수준의 ‘VS’ 구도로 전했다. 매체의 균형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전할 가치가 있고 없는지 고민하지 않고 모두 다 소개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수많은 의견들의 근거를 검증하고 허튼소리들을 쳐내며 유의미한 의제를 발굴해내는 노력 안에서 비로소 언론은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의 파도 위에서 난파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차별에 대한 실질적 옹호를 의견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굳이 동등한 무게로 전달하는 언론 및 유사언론들은 이 이슈를 혼돈 속에 밀어넣은 주범들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었다면 의도로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으며 차별은 잘못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요청했어야 한다. 스포츠조선이 ‘단독’ 타이틀까지 붙이며 전하고 이후 수많은 매체가 따라 쓴 샘 오취리의 동양인 비하 포즈 문제에 있어서도, 이를 흔한 ‘내로남불’의 프레임으로 전하기보단 그때 샘 오취리도 우리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차별에 웃고 떠들 수 있는지에 대해 ‘관짝소년단’ 이슈와 연결해 반성적으로 돌아볼 수 있어야 했다. 특히 샘 오취리의 동양인 비하 혐의와 별개로, 그날 방송에서 진행된 얼굴 망가뜨리기 대결이라는 것이 중증 뇌성마비 환자에 대한 희화화가 될 수 있으며 당사자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지적한 언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암울할 정도다. 무엇이 차별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선, 차별은 나쁘다는 윤리적 선은 대체 어디 있는가. 애초에 존재하긴 하는가.

불의에 대한 규범적 방어선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할 때, 결국 기준선 역할을 하는 것은 대중의 주관적 기분이다. 샘 오취리가 선을 넘었다면 그에 대해 아니꼬워하는 대중의 기분을 맞춰주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경우엔 무책임한 언론에 의해 대중이란 대표성을 획득한 차별주의자들의 기분이 기준이 됐다. 전방위적 압박에 의한 샘 오취리의 사과는 결국 차별주의자들에게 승리의 경험을 안겨주었다.

위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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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제는 의기양양하게 차별을 전시하는 공주고의 어린 차별주의자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런 차별주의자들의 개선행렬을 보고도 반성하기는커녕 또다시 의정부고 학생들의 의도를 근거 삼아 “의도를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을 매장시킬 수도 있는 글을 두고 우리는 비판이 아닌 비난이라 부르고 의견이 아닌 억지라고 부른다.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비난 역시 인종차별만큼이나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스포츠동아 ‘샘 오취리 사태, 억울한 역풍? 경솔함에 대한 대가 치른 것’ 같은 기사가 부끄러움 없이 올라온다.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다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사회적 합의의 기준선을 만들어내고 강제력을 부여하는 것이 조금은 가망이 있어 보인다. 우리에게 넘지 않아야 할 선이 있다면, 차별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주지 않을 만큼 강력한 방어선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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