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청산” 백인 토지 몰수 짐바브웨, 20년 만에 보상 나선 까닭

2020.10.03 18:08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제75회 유엔총회에서 에머슨 담부조 음낭가과 짐바브웨 대통령(화면)이 화상으로 연설하고 있다. 뉴욕|AFP연합뉴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제75회 유엔총회에서 에머슨 담부조 음낭가과 짐바브웨 대통령(화면)이 화상으로 연설하고 있다. 뉴욕|AFP연합뉴스

뺏고 뺏기는 땅의 역사.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선 한 세기 넘게 ‘토지 소유권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짐바브웨는 19세기 말 영국 식민 통치 아래 농지 대부분을 백인들에 내줬다. 로버트 무가베는 ‘식민 청산’을 이유로 20년 전 백인 농장주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했다. 백인 농장주들과 서방 국가들은 ‘재산권 침해’라며 보상을 요구해왔고, 최근 짐바브웨 정부가 백인 농장주들에 대한 보상안을 내놨다. 다시 땅을 빼앗길까 우려한 흑인 농부들은 본래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묻고 있다.

■짐바브웨 토지 논쟁의 뿌리

“우리에게 착취, 백인 지배의 본질은 땅에 대한 지배입니다. 그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짐바브웨 독립운동가 허버트 치테포, 1973년)

영국은 19세기 말 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식민지 정치가 세실 로즈가 만든 영국 남부아프리카회사(BSA)에 사실상 통치를 맡겼다. BSA는 중앙아프리카 땅 남부에 마음대로 선을 긋고 ‘로즈’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로 명명했다. (후에 북로디지아는 잠비아, 남로디지아는 짐바브웨가 됐다.) 영국은 20세기 들어서도 ‘식민자치령’ 등 형태만 달리해 이 땅을 계속 지배했다. ‘짐바브웨’란 이름의 독립 국가가 등장한 건 1980년이다.

1920년대 초 짐바브웨 과일 농장을 방문한 백인 농부들. 영국 남부아프리카 회사(British South Africa Company)가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로의 이주를 광고하기 위해 찍은 사진으로 알려졌다. 위키피디아

1920년대 초 짐바브웨 과일 농장을 방문한 백인 농부들. 영국 남부아프리카 회사(British South Africa Company)가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로의 이주를 광고하기 위해 찍은 사진으로 알려졌다. 위키피디아

후에 악명높은 독재자가 됐지만, 당시 ‘독립 영웅’으로 평가받으며 집권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은 토지 독립을 중요하게 여겼다. 독립 직후 흑인 소유 농지는 전체 농지의 5%에 불과했다. 당시 백인들에게도 유연한 입장이었던 무가베 대통령은 영국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백인 농장주들로부터 토지를 유상 환수했다. ‘흑백 통합’ 정책이 통해 농업이 발전하면서 1980년대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의 곡물창고’로 불릴 만큼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무가베 전 대통령은 점점 철권통치자로 변모했고, 1997년 토니 블레어 영국 정부는 짐바브웨 토지 보상을 위한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자 무가베 정권은 2000년 토지 유상 환수를 중단했다. 대신 당시 백인 농장주 4500여명으로부터 4000곳 이상의 농장을 강제로 몰수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 땅은 30만 흑인 가정에게 나눠줬다. 이 무렵 퇴역 군인들이 백인 농장들을 습격해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이에 영국과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짐바브웨에 대한 자금 및 원조 지원을 중단해버렸다. 이후 ‘토지 보상’은 짐바브웨 정부와 서방 간 갈등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짐바브웨 백인 농민들과 서방 국가들은 짐바브웨 정부에 끊임없이 토지 보상을 요구해왔다. 무가베 전 대통령은 이런 요구에 귀를 닫았으나, 2018년 집권한 에머슨 담부조 음낭가과 대통령은 달랐다. 음낭가과 대통령은 취임 후 농업생산성을 회복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해 국가 경제를 재건하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토지 보상 숙제부터 풀어야 했다. 백인 농민들도 짐바브웨 국민인 데다,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를 재건하려면 짐바브웨 정부가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고 영국 BBC 등은 분석했다.

■토지 보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음낭가과 대통령은 지난 7월29일 20년 전 토지를 몰수당한 백인 농장주들에게 35억달러(약 4조1000억원)를 보상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그는 백인 토지 보상안을 발표하면서 “짐바브웨 토지 방침을 둘러싸고 역사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 시작하는 조치”라면서 “토지에 대한 기존 정책을 번복하지 않고 재확인하는 동시에 헌법에 기반해 법치와 재산권을 긍정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보상은 토지 자체보다는 그 위에 지어진 농장이나 관개시스템에 대한 보상이다. 다만 일부 백인 농장주들에겐 토지를 반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20세기 이후 짐바브웨 땅에서 태어나 농장을 일군 백인 농장주들 입장에선 아무런 보상 없이 재산을 빼앗긴 셈이다. 보상을 받기까지 20년 시간이 걸렸다. 백인 농장주 모임인 짐바브웨 상업농협회의 앤드루 파스코 회장은 정부의 몰수된 토지 보상안에 대해 “토지 갈등 20년 만에 해결책을 본 것은 기적에 가깝다”라며 반겼다. 하지만 흑인 농부들은 다시 땅을 빼앗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정부는 보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토지를 받은 흑인들이 대체 토지를 받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재정착 흑인 농민인 에밀리아 나두리는 지난달 9일 뉴짐바브웨닷컴에 “우리가 싸워서 찾아온 땅이다. 백인을 위해 다시 쫓겨날까 두렵다”고 말했다. ‘백인 농장주 내쫓기’에 동참했던 퇴역 군인들은 지난달 10일 AFP 통신에 “정부가 독립 운동 중에 발생한 손실보다 백인 정착민의 불만을 우선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길을 걷고 있다. 하라레|AP연합뉴스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길을 걷고 있다. 하라레|AP연합뉴스

짐바브웨는 오랫동안 경제난을 겪고 있다. 당장 백인 농장주 보상금액도 없어 30년 장기 국채를 발행해 보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보상액의 절반은 1년 안에 지급하고 나머지는 5년내에 주기로 했다. 무가베 정권의 토지개혁이 농업 생산량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국가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형 농업’을 하는 백인 농장주들과 달리 영세한 흑인 농민들이 토지 생산성을 높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짐바브웨 경제가 어려워진 건 미국 등 서방의 오랜 제재, 혹독한 가뭄 등으로 농업 인프라 등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활동하는 사회·정치 평론가인 타피 마카는 지난달 20일 알자지라에 보낸 기고에서 “짐바브웨는 왜 잔혹하게 땅을 훔친 서방의 백인 농부들에게 보상해야 할까. 왜 미국은 영국이 원래 땅을 빼앗긴 흑인 짐바브웨인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기고 끝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영국이 보상하지 않는다면 이 토지 보상은 백인 우월주의로 얻은 이득임에 변함이 없다. 전 세계가 ‘흑인 생명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빼앗은 토지에 대한 대가는 짐바브웨가 아닌 영국에 책임이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