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성소수자들, 혐오 지우고 자긍심 담은 새 수어를 짓다

2021.04.24 06:00 입력 2021.04.25 09:14 수정

※ 여기를 누르면, 한국농인LGBT설립준비위원회의 수어통역으로 기사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연결되지 않는 분들은 경향신문 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수어에 담긴 성소수자 혐오 지우고 존중·인정을 담은 ‘새 언어’를 짓다

우지양 한국농인LGBT 설립준비위원회 활동가가 남녀 이분법을 깨는 의미를 담은 새로운 ‘성별’ 수어를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우지양 한국농인LGBT 설립준비위원회 활동가가 남녀 이분법을 깨는 의미를 담은 새로운 ‘성별’ 수어를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그 집은 늘 소란스럽다. 새로운 언어는 수시로 태어난다. 어떤 언어는 잊히거나 폐기된다. 그 생사의 경계에서 누군가 자신을 표현하는 정확한 언어를 얻으려고 싸웠다. 언어는 소란 속에서 조금씩 변해왔다.

낙태를 임신중지로 바꿔 부르기까지 66년이 걸렸다. 그사이 살색이 살구색이 됐다. 여류작가는 작가가, 결손가족은 한부모가족이, 장애우는 장애인이 됐다. 그렇게 언어에 묻은 여러 차별을 걷어내는 손길이 계속됐다. 지금도 누군가는 언어의 집에서 투쟁한다.

여기, 다시 ‘언어싸움’을 선언한 존재들이 있다. 농인이자 성소수자다. 한국 사회에서 ‘이중소수자’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국수화언어(한국수어)를 사용하면서 자주 언어에 담긴 혐오와 차별을 마주했다. 한국수어에서 동성애자는 특정 성행위를 묘사한다. 이 수어로 자신을 표현하려면 스스로 혐오를 실어날라야 했다. 자기혐오의 수어는 이야기를 멈추게 하고, 존재를 감추게 했다. 성소수자 관련 용어 대부분은 수어가 아예 없었다. 이들은 언어의 부재를 곧 ‘존재의 부재’로 느꼈다.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가 없는 수어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지금의 언어로 자신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언어로 더는 스스로를 욕되게 할 수 없었다. 정확한 언어로 자신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농인성소수자 당사자들이 포함된 한국농인LGBT 설립준비위원회는 지난 1년 동안 성소수자 관련 수어를 고치거나 새로 만들었다. 기존 수어의 혐오를 지워냈다. 여러 정체성을 인정·존중하는 의미를 담았다. 다음달부터 책자와 영상으로 배포한다. 그에 앞서 경향신문에 새 수어와 대안 수어 37개를 공개했다.

“기존 수어, 성소수자를 성행위로 묘사…나를 말하기 불편”

우지양 한국농인LGBT 상임활동가가 새로 만든 레즈비언 수어를 표현하고 있다. 소지를 편 주먹을 손등이 앞을 향하게 내보인 뒤, 정면으로 직선 이동한다. 손의 높이와 위치는 가슴 중앙께다. 손 외의 신호로는 자긍심을 표현한다. 입은 굳게 다물고, 눈은 정면을 바라본다. 어깨를 위로 올리면서 가슴은 곧게 편다. 소지를 엄지로 바꾸면 게이를 뜻한다. 강윤중 기자

우지양 한국농인LGBT 상임활동가가 새로 만든 레즈비언 수어를 표현하고 있다. 소지를 편 주먹을 손등이 앞을 향하게 내보인 뒤, 정면으로 직선 이동한다. 손의 높이와 위치는 가슴 중앙께다. 손 외의 신호로는 자긍심을 표현한다. 입은 굳게 다물고, 눈은 정면을 바라본다. 어깨를 위로 올리면서 가슴은 곧게 편다. 소지를 엄지로 바꾸면 게이를 뜻한다. 강윤중 기자

지양·보석·태환·레고
1년여 연구…37개 용어 정리

우지양씨는 ‘셀프카메라’(자가촬영사진)와 여행을 즐긴다. 농인이며, 한국수어로 소통한다. 일본인 애인이 있다. 대학을 다니다 그만뒀다. 언젠가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 그는 동성애자다.

지양씨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자유롭다. 슬픈 일과 기쁜 일을 표현할 때도 얽매일 게 없다. 성적지향·성정체성을 밝힐 때는 불편함을 느낀다. 자신을 설명하려면 혐오가 담긴 수어를 써야 했다. 한국수어는 동성애자를 특정 성행위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 수어를 접할 때면 ‘나를 드러내선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반’(일반과 대비해 한국 동성애자들이 자신을 부르는 용어)을 활용한 다른 표현이 있긴 했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만 써 한계가 있었다.

“청인 중심의 성소수자 커뮤니티(모임)도, 혐오가 심한 농사회도 어울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청인들과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서 (수어) 통역을 지원받으려 해도 통역 안에 이미 혐오가 들어 있어서 불편할 때가 많았고요. 이를 해결하려면 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긍정하며 모이길 바랐어요.”

2019년 12월부터 농인성소수자 모임을 시작했다. 농인성소수자 인권단체인 한국농인LGBT 설립준비위원회(이하 한국농인LGBT)를 꾸렸다. 이듬해 5월 서울인권영화제와 연대해 본격적인 성소수자 대안 수어 개발에 들어갔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인권영화로 연대·소통하는 인권단체다. 두 단체는 다음세대재단에 사업 지원을 신청하면서 사업명에 ‘자긍심 넘치는 우아한 농인성소수자 되기 - 한국 농인성소수자 인권 운동 첫걸음’이라고 적었다. 1년여의 연구를 거쳐 모두 37개 용어를 고치거나 새로 만들었다.

대안 수어 개발을 마친 한국농인LGBT의 상임활동가 지양·보석·태환씨와 레고를 지난 15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태환씨는 한국수어를 쓰는 농인이다. 보석씨는 코다(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이다. 레고는 수어를 배우는 청인이다.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수어 통역으로 이뤄졌다.

■37개 수어, 이렇게 바꿨다

한국농인LGBT의 레고와 태환, 보석, 지양씨(왼쪽부터)에게 사진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물었다. 잠시 머리를 맞댄 이들 네 사람은 합심해 “너, 나, 같이, 여기 있다”를 수어로 표현했다. 모두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뜻을 담았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한국농인LGBT의 레고와 태환, 보석, 지양씨(왼쪽부터)에게 사진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물었다. 잠시 머리를 맞댄 이들 네 사람은 합심해 “너, 나, 같이, 여기 있다”를 수어로 표현했다. 모두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뜻을 담았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혐오 수어’ 게이·레즈비언
성적지향 본뜻 ‘이끌림’ 살려
비수지로는 ‘자긍심’ 표현

양성·무성애자·퀘스처너리 등
한국수어에 없는 용어 만들고
HIV·에이즈도 수정해 등재

‘성소수자 혐오 수어’로 못 박아 고친 용어는 두 가지다.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과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게이. 국립국어원의 한국수어사전에 등록된 레즈비언의 수형(수어의 형태)은 이렇다. “두 주먹의 소지를 펴서 끝이 위로 향하게 맞대고 상하로 두 번 비빈 다음, 두 주먹의 엄지와 소지를 펴서 끝이 위로 향하게 맞대고 세워 양옆으로 두 번 약간 돌리며 벌린다.” 한국수어에서 여성은 ‘소지를 편 주먹’으로 표현한다. 현재 레즈비언 수어는 두 여성이 서로 비비는 형태로, 성행위를 암시한다. 게이는 항문성교를 하는 형태다. 특정 성행위를 성적지향이 동성애인 남성들의 핵심 표현으로 삼았다. 동성애자를 ‘동성연애자’로 불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새로 만든 수어는 ‘이끌림’이라는 성적지향의 본래 뜻을 살렸다. 레즈비언은 “여성인 내가 다른 여성에게 이끌린다”, 게이는 “남성인 내가 다른 남성에게 이끌린다”는 의미를 담았다. 레즈비언 수어는 이렇게 한다. 주먹을 쥐고 소지를 편 상태로 손등이 앞을 향하게 한 뒤, 정면으로 손을 직선 이동한다. 손의 시작 높이는 가슴께, 위치는 명치 앞이다. ‘비수지’(몸짓과 표정 등 수어를 구성하는 손 외의 신호)로는 자긍심을 표현한다. 입은 굳게 다물고, 눈은 정면을 바라보며, 어깨를 위로 움직이면서 가슴을 곧게 펴는 형태다. 소지를 엄지로 바꾸면 게이를 뜻하는 수어가 된다.

성적지향을 표현하는 대부분의 용어는 한국수어에 없었다. 이번에 양성애자, 범성애자, 무성애자, 퀘스처너리(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 등을 탐구 중이거나 확립하지 않은 사람) 같은 용어를 뜻하는 수어를 새로 만들었다. 인터섹스는 상징 깃발의 모양을 활용했다. 논바이너리는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고 퍼져 나간 형태를 취했다. 이성애자는 농인성소수자들이 많이 쓰는 미국 수어를 그대로 가져오기로 했다.

대안 수어를 만들 용어를 추리는 것도, 각 용어의 표현을 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수어연구자인 보석씨를 중심으로 토론하며 하나하나 만들어나갔다. 기존 언어에 묻은 혐오를 지워나갔다. 용어의 본래 뜻에 부합하는지, 자칫 또 다른 차별이 들어가는지 꾸준히 점검했다. 자신과 다른 정체성의 소수자들을 공부했다. 언어를 고민하는 시간이 성소수자 당사자의 존재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2~3개라도 제대로 만들자고 했는데 공부하다 보니 점점 늘었어요. 우리가 수어 통역 활동을 하면서 필요한 것을 최소로 추린 게 이 정도예요. 정체성 관련 단어는 특히 고민이 많았습니다. 우리 모임에는 레즈비언과 게이, 논바이너리 등이 있어요. 그 외의 정체성 수어를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만들어도 될까 고심했습니다. 조심스러웠죠. 결론은 ‘최소한의 단어를 만들어두면 다른 사람들이 올 것이다,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의 언어는 또 바뀔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레고)

성별과 성적지향을 논의할 때 곧잘 등장하는 개념어들도 기존 수어에는 없었다. 수어는 한국어 단어에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대응 수어가 없어도 수어로 표현할 수 있지만, 대체로 혐오와 차별이 담기게 되는 것이 문제라고 한국농인LGBT 활동가들은 전했다.

“정체성 관련 단어 특히 고민”
기존 언어에 묻은 혐오 지우고
성소수자 존재 바로 세우게 해

보석씨는 “농사회에서 ‘성별’이라는 수어가 있다. 하지만 이분법적으로 여성 아니면 남성에 해당하는 수어만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남성과 여성만 표현하는 ‘성별’ 관련 기존 수어는 다양한 성별 정체성을 배제한다. 한국농인LGBT는 여러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표현을 고민했다. 남녀 이분법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들을 포괄하면서 ‘모두 있는 그대로 온전하다’는 의미를 담는 수어를 만들었다.

젠더, 섹슈얼리티, 성적지향, 성정체성, 성별정체성 같은 용어의 대안 수어도 개발했다. 기존 수어에서 성적 행위로만 표현되는 ‘섹슈얼리티’는 본뜻에 가깝게 맞췄다. 욕망·제도·관습 등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이르는 어휘라는 데 착안했다. “ ‘성’이란 수어는 농사회에서 정확히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이라는 단어는 성관계만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에 국한해 사용되지 않도록, 하나로 정할 수 없는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목록’의 개념으로 수어를 만들었습니다.”(보석)

성소수자 전반을 지칭하는 수어도 정리했다. 성소수자, LGBT·LGBTQ+·LGBTQI+, 퀴어, 6색 무지개 등이다. 일부는 있던 수어를 변형했다. 기존 수어는 숫자 7을 이용해 무지개를 표현한다. 이를 ‘6색 무지개’로 바꿔보자. 숫자 7 대신 6을 표현하고, 정체성을 상징하는 단어라는 것을 고려해 손의 위치를 가슴 앞쪽에 두기로 했다. ‘6색 무지개’를 원형으로 그리면 ‘퀴어’가 된다. “사람 눈에 보이는 무지개는 반원 형태이지만 원래 무지개는 둥근 형태잖아요. 눈에 안 보이는 성소수자 모두를 포함한다는 뜻으로 원형의 무지개를 ‘퀴어’ 수어로 했습니다.”(보석)

커밍아웃은 벽장을 열어젖히고 나오는 형태와 이보다 간결하게 문을 여는 형태로 두 가지를 만들었다. 아우팅(성소수자임을 타인이 강제로 밝히는 행위)도 공개된 장소에서 하는 것과 은밀히 이뤄지는 아우팅을 구분해 두 가지로 개발했다.

HIV(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와 에이즈(AIDS·후천면역결핍증)는 원래 있던 수어이지만, 조금 바꿔 대안 수어에 등재하기로 했다. 국립국어원 한국수어사전의 에이즈 수형은 이렇다. “손가락을 벌려 약간 구부린 오른손의 손등을 이마에 두 번 댄다.” 이때 얼굴은 잔뜩 찡그리고 ‘에이즈’라고 입술 모양을 짓는다. 단어 의미에 보태 공포와 혐오의 정서를 함께 전달하는 것이라고 활동가들은 설명했다. 에이즈 수어는 때때로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됐다.

“대안 수어 만들며 긍정적 변화…점차 바뀌는 세상에 뿌듯”

한국농인LGBT가 개발한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 수어다. 엄지와 소지를 편 주먹을 손등이 앞을 향하게 보였다가, 손목을 바깥으로 뒤집으며 앞으로 쳐내면 ‘젠더’가 된다. 이번에 만든 ‘성별’ 수어를 뒤집는 형태다. 성별(sex) 용어를 비판하며 젠더(gender)가 나온 데 착안했다. 높이는 관자놀이 옆이다. 손 외의 신호로는 저항을 표현한다. 기존 수어의 ‘정체성’ 표현과 합쳐 완성한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한국농인LGBT가 개발한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 수어다. 엄지와 소지를 편 주먹을 손등이 앞을 향하게 보였다가, 손목을 바깥으로 뒤집으며 앞으로 쳐내면 ‘젠더’가 된다. 이번에 만든 ‘성별’ 수어를 뒤집는 형태다. 성별(sex) 용어를 비판하며 젠더(gender)가 나온 데 착안했다. 높이는 관자놀이 옆이다. 손 외의 신호로는 저항을 표현한다. 기존 수어의 ‘정체성’ 표현과 합쳐 완성한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대안 수어에선 에이즈를 HIV와 명확히 구분했다. HIV는 알파벳 지문자의 ‘H, I, V’를 사용한다. 에이즈는 기존 수형을 쓰되, 찡그린 표정을 일상적 표정으로 바꿨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농사회에 HIV와 에이즈 관련 지식이 너무 적어 이를 확실히 구분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동성연애자=남성 동성애자=항문성교=에이즈’라는 차별과 혐오의 등식을 깨려고 한 것이다.

질병관리청에서 펴낸 <2021년 HIV/AIDS 관리지침>도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를 명확히 구분한다. HIV 감염인은 HIV에 감염돼 체내에 이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에이즈 환자는 HIV 감염인 중에서 ‘CD4+ T세포’ 수치가 일정 기준에 못 미치거나 에이즈 관련 증상이 나타난 사람이다. 지침에 따르면 2019년 신규 HIV 감염인은 1222명이다. 내국인 감염경로를 따져보면 이성 간 성접촉이 379명(46.1%), 동성 간 성접촉이 442명(53.7%)이다. 지침에 담긴 ‘HIV 감염인 진료를 위한 의료기관 길라잡이’에는 “HIV 감염인이 조기에 진단돼 치료받을 경우 비감염인들과 같은 여명(餘命)을 가질 수 있고, 타인 전파 위험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고착화된 사회적 낙인과 차별로 여전히 사회적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적혀 있다.

남녀 성별이분법이 담긴 결혼, 이혼 같은 수어는 옛날 수어로 되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결혼은 현재 한국수어에서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표현된다. 과거에는 ‘잔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결혼을 표현했다고 한다. 활동가들은 성별이분법이 담기지 않은 과거 수어를 되살렸다. 레즈비언 관련 용어인 부치와 팸, 게이 관련 용어인 바텀과 톱 등 성소수자 모임에서 많이 쓰는 몇 가지 단어를 더했다.

■이중의 벽에 언어싸움을 걸다

[커버스토리]농인성소수자들, 혐오 지우고 자긍심 담은 새 수어를 짓다

청사회·성소수자 ‘이중의 벽’에
거부당할 것이라는 공포 느껴
그래도 적극적 ‘언어싸움’ 나서

농인성소수자는 농사회에서 ‘이중의 벽’에 부딪힌다. 이미 청인 중심의 사회에서 벽을 느끼는 상황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농사회에서도 거부당할 거라는 공포를 느끼는 이들이 많다.

태환씨는 스무 살을 앞두고 어머니에게 커밍아웃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지 말라”는 걱정 섞인 당부가 돌아왔다. “농사회는 좁아요. 커밍아웃하면 소문이 단기간에 퍼져나갈 수 있는 환경입니다. 부모님이 농인이고, 이미 농사회에 연결고리가 매우 많은 상황에서 자칫 제 정체성 때문에 부모님이 ‘2차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보석씨 역시 비슷했다. “이미 사회에서 농인 가족을 ‘불량’인 것처럼 봐요. 제가 성소수자라고 하면 ‘너희가 불량이라 그렇게 된 거야’라고 할 수도 있는 거죠. 저는 ‘게이, 코다, 수어연구자’라는 정체성 때문에 소극적으로 되거나 앞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되는 거예요. 청사회와 농사회 양쪽으로 벽이 느껴질 때는 너무 괴롭습니다. ‘나 때문에 부모님도 거부당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 때면 무섭고요.”

마냥 움츠러들진 않았다. 존재를 감추는 대신 사회에 ‘언어싸움’을 걸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언어는 투명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회적 의미가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나를 부르는 단어가 애초에 혐오인데 어떻게 나를 설명할 수 있겠어요. 나를 부르는 단어부터 바꿔야지요. 많은 소수자 운동이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봐요.”(레고)

이들은 대안 수어 개발이 단지 새로운 표현을 만드는 데 그쳐선 안 된다고 했다. 정당한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은 성소수자 혐오문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농인성소수자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길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 만든 수어 중에는 성소수자들이 비수지 신호로 ‘자긍심’을 표현하도록 한 단어가 적지 않다.

대안 수어를 만드는 동안 이들 스스로 긍정적 변화를 경험했다. “성소수자 혐오 수어를 사용할 때는 존재감이 너무 없어져버렸어요. 밑바닥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았어요. ‘빨리 없애야 하는 사람’으로 보니, 스스로도 사라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가면서 바뀌었어요. 나 그대로 자랑스럽고, ‘내가 성소수자인 게 뭐가 어때서?’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지양)

보석씨는 농인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고 대안 수어를 개발하면서, 수어통역가들에게 ‘그 성소수자 관련 수어는 혐오표현’이라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아직 바뀌지 않은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분이 ‘이게 아니면 뭘 써야 하지’ 하고 신경을 쓴다”며 “이전 수어를 쓰면서는 농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것 같았는데, 수어통역사들이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존중받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변화는 시작됐다. 주변에 미리 선보인 새 수어들이 조금씩 퍼져 나간다. “성소수자 관련 한국수어의 문제를 지적하면, ‘지금까지 사용된 언어의 역사를 무시하냐’는 대답이 돌아온 적도 있어요. 그런 때면 오히려 ‘정말 언어가 바뀌어야 하는구나’ 하고 절감하죠. 최근 이번에 제대로 바꿨다고 주변에 알렸는데 ‘성관계만 묘사하는 기존 수어가 문제고, 이렇게 정체성을 담는 단어가 돼야 하는 거구나’ 하고 조금씩 알아주는 것 같았어요. 언제 다 만들어지는지 물어오기도 하고요. 그런 반응을 접하면서 좋았어요.”(태환)

■다시 시작점에 서서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를 합친 ‘LGBT’는 로마자를 나타낸 지문자를 쓴다. 왼쪽부터 L·G·B·T다. 퀴어와 그 밖의 성정체성을 담은 ‘LGBTQ+’, 인터섹스 등을 더한 ‘LGBTQI+’로 확장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이 지문자로 표현하기로 했다. 강윤중 기자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를 합친 ‘LGBT’는 로마자를 나타낸 지문자를 쓴다. 왼쪽부터 L·G·B·T다. 퀴어와 그 밖의 성정체성을 담은 ‘LGBTQ+’, 인터섹스 등을 더한 ‘LGBTQI+’로 확장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이 지문자로 표현하기로 했다. 강윤중 기자

함께 싸울 때 서로 힘낼 수 있어
다음달 대안 수어 책·영상 공개
1년에 한번 성소수자대회 준비도

수어 희화화한 ‘덕분에 챌린지’
언어로서 존중하지 않은 행태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생명력을 얻는다. 새로 태어난 성소수자 관련 수어들은 이제 막 출발점에 섰다.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수어를 전하는 게 한국농인LGBT 활동가들의 목표다.

다음달 대안 수어를 담은 책과 영상을 공개한다. 책은 각 지방자치단체의 수어통역센터와 여러 농인 모임 등에 배포할 계획이다. 당장 기존 수어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다른 방식의 표현도 있구나’하고 인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대안 수어를 공식 발표하고 배포하면 다른 수어통역사들도 유심히 살펴보고 사용하실 거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농인성소수자들이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길 기대해요.”(보석)

한국농인LGBT가 참여하는 수어통역활동에서도 새 수어를 최대한 알리려 한다. 행사 시작 전 ‘오늘 한국수어 통역에서 성별정체성은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안내하려 한다. 지난 10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1년을 맞아 연 행사에서도 대안 수어를 사용해 수어통역을 했다.

농인성소수자들 간 만남의 장을 마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그간 드러낼 수 없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북돋아주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이런 모임에서 대안 수어로 자신들을 표현하는 경험이 새 수어들이 흩어지지 않고 언어로 성장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1년에 한 번씩 가칭 ‘한국농인성소수자대회’를 열 계획이다. “코로나19 상황을 지켜보고, 올해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에 첫 대회를 열려고 해요. 한 명이 모이든, 10명이 모이든 반드시 할 겁니다.”(레고)

2016년 8월 시행된 ‘한국수화언어법’ 제1조는 “한국수화언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라고 규정했다. 한국어와 한국수어의 동등한 공존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이들은 수어를 언어로 존중하지 않는 현실도 함께 바꾸려고 한다.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나온 ‘덕분에’ ‘덕분이라며’ 챌린지가 상징적이다. ‘덕분에’ 챌린지는 의료진을 응원하는 캠페인으로 많이 번졌다. 엄지를 세운 오른 주먹을 왼손바닥에 받친 정지된 이미지가 한국수어의 ‘존경’을 뜻하는 것으로 퍼져나갔다. 실제 수어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수어사전에는 손 모양 설명에 이어 “두 손을 동시에 위로 올린다”고 동작이 달려있다. ‘덕분이라며’ 챌린지는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가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안에 반대하며 이를 뒤집어 사용한 것이다.

당시 ‘덕분이라며’ 챌린지를 두고 수어를 폄하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국농인LGBT 활동가들은 ‘덕분에’ 챌린지도 적절치 않았다고 본다.

보석씨는 “수어를 희화화한 ‘덕분이라며’ 챌린지는 말할 것도 없고, 손 이미지만 잘라서 쓴 뒤에 ‘덕분에’라고 퍼뜨린 것도 수어를 고유한 언어로 존중하지 않는 행태였다”고 했다. 이들은 이런 일들을 보며 수어 혐오표현을 없애는 일과 ‘모국어’로서 수어 ‘제자리 찾기’가 같이 이뤄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너와 나, 공존을 꿈꾸다

누군가 차별·혐오에 저항할 때
언제나 문 열린 인권단체가 목표
청사회·농사회 구분 없는 세상을

성소수자들은 최근 아픈 시간을 보냈다. ‘가장 원치 않던 방식’의 가시화가 잦았다. 지난 2~3월에는 극작가 이은용, 인권활동가·음악교사·정치인 김기홍, 군인 변희수씨 등 트랜스젠더 3명이 숨졌다. 4·7 재·보궐 선거 과정에서 정치인들의 혐오발언은 여전했다. 그럴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속에서 힘을 얻고 서로를 일으켜 세웠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면 ‘또 이런 괴로운 일이 생겼구나’ 하고 그저 슬퍼하면서 끝났을 거예요. 인권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 슬픔을 도화선으로 삼아 ‘자, 우리 함께 싸우자’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너 활동하는 거 보면서 내가 힘이 나’라고 말해주기도 했고요. ‘내 활동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있구나’ 싶어서 저 또한 힘을 받았습니다.”(보석)

한국농인LGBT의 목표는 농인성소수자뿐 아니라, 농인과 수어통역사가 농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려 마음먹었을 때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인권단체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할 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교류하는 장을 꿈꾼다. 농인 당사자 중심의 단체인 동시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만나 이야기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세상은 ‘청사회와 농사회의 구분이 없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혐오를 담지 않은 새로운 수어를 사용해 꼭 하고 싶었던 한마디씩을 물었다.

태환씨는 성별이분법을 떠난 ‘애인’ 수어를 사용해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애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레고는 “나는 ‘부치’입니다”, 보석씨는 “나는 ‘게이’입니다. 앞으로 내가 정말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지양씨는 원형의 6색 무지개를 표상화한 ‘퀴어’를 넣어, 이렇게 전했다.

“너만 ‘퀴어’인 게 아니야. 우리가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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