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치킨 오페라

2010.06.30 17:43 입력 2010.11.10 12:47 수정
문학수 선임기자

유쾌한 상상력… 웃음 뒷맛은 허탈

이 연극을 얘기하기 전에, 팀 버튼의 영화 <화성 침공>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겠다. 어느날 화성인들이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를 찾아온다.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은 뛰어난 문명을 가진 화성인들이 폭력적일 리가 없다면서 환영식 준비에 분주하다. 화성과 동맹을 맺어 새로운 우주 시대를 개척할 꿈에 부풀기도 한다. 하지만 착각이다. 머리만 커다랗고 팔다리가 가느다란 화성인들은 환영식장에 도착하자마자 광선총을 난사하면서 지구인들을 학살한다. 의회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그들의 공격을 피하느라 허둥댄다. 그러다 마침내 SF 코미디의 하이라이트.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치매 할머니가 즐겨 듣는 옛날 팝송 한 곡이 화성인들의 뇌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머리가 터지면서 초록색 뇌수가 줄줄 흘러나온다. 무협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음공(音攻)인 셈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손자가 그 노래를 대형 스피커로 틀어대면서 침략자들을 겨우 물리치고 지구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는 이야기.

[객석에서]스페이스 치킨 오페라

대학로 게릴라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창작극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사진)의 상상력도 그런 식이다. 상식의 궤도에서 벗어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SF 코미디가 무대로 왔다. 그 웃음의 행간에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이 결국 재앙을 불러오고 만다는 비판적 메시지를 슬쩍 깔아놨다.

때는 2109년. 그동안 지구는 몇 차례 심각한 변고를 치렀다. 3차대전을 겪으며 방사능이 대기권을 덮었고 ‘데스 플루’ ‘아마겟돈 독감’ 같은 무서운 질병이 지구를 한 바퀴 휩쓸고 갔다. 그 시점에서 지구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는 닭. 가장 머리 나쁜 동물로 여겨졌던 닭들의 유전자에 변종이 발생하면서, 마침내 인간의 아이큐를 넘어선다.

그중에서도 ‘황금닭’은 닭들의 영웅이다. 지구를 감시해온 외계인 ‘쭈그렁’은 닭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는 걸 막기 위해 황금닭의 위치를 추적한다. 쭈그렁의 지시를 받은 지구인 ‘도련’은 우주왕복선에 닭튀김 가게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를 개업해 황금닭을 유인할 계획을 짠다.

인간과 닭들이 지구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겨루는 한판 전쟁. 줄거리를 압축하자면 대략 그렇다. 이 연극의 설정과 캐릭터는 일본의 어린이 만화에서 빌려온 듯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실제로 극의 등장인물 중에는 일본인 요리평론가와 신문기자도 있다.

어쨌든 색다른 연극이다. 앞서 언급한 팀 버튼이 어릴 때부터 만화 그리기가 취미였다는 사실에서 <화성 침공> 같은 영화의 상상력을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연극의 대본을 쓴 김진우(소설가 겸 작곡가)도 만화책을 적잖이 섭렵한 작가일 거라고 짐작해볼 수 있겠다. 미술작가 최정화가 잡동사니 소품으로 꾸며놓은 키치적 무대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벗어난 상상력과 특이한 무대만으로 한 편의 연극을 이뤄낼 순 없는 것. 문제는 이 연극이 연출가 박근형의 손에서 빚어졌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 연극계의 일급 연출가로 손꼽히는 박근형의 연극 치고는 웃음의 뒷맛이 영 허탈하고 극적 구성도 성기다. 그래서 극단 ‘골목길’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밀도 있는 연극적 에너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물론 객석 대다수를 차지한 젊은 관객들은 공연 내내 곳곳에서 웃음을 터뜨리지만 ‘박근형의 작품’에 대한 기대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한 채 미완의 연극으로 남았다. 공연은 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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