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현장을 가다

300㎞ 떨어진 곳서도 ‘피폭 일상화’… 생태계 축적·피해 규모 알 길 없어

2011.04.18 21:47
키예프 | 이지선 기자

(下) 체르노빌이 주는 교훈

나디야 표도르브나 오기예비치(44·여)는 우크라이나 북서쪽 드로즈딘에 사는 농부다. 작은 집 한 채를 갖고 있고 소를 키우며 텃밭을 일군다. 지난 3월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나디야의 집 앞에 쌓여 있는 지푸라기 더미에 방사성물질 계측기를 갖다 대자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건초 더미에서는 방사성물질인 세슘137이 기준치의 6배가 넘게 검출됐다.

하지만 나디야는 단지 시끄럽게 울리는 계측기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키우는 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놀랄 일도 아니고 답이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디야는 “다른 방법으로는 식량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처럼 채소를 키우고, 버섯과 딸기를 따서 먹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고 말했다.

그린피스가 지난 3월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뒤 사람들의 주거 및 출입이 통제된 지역을 기준으로 인근 농가와 시장에서 야생 딸기, 버섯, 그리고 뿌리식물인 감자, 당근 등을 수집해 방사성물질을 검사한 결과 유아는 물론 성인 섭취 기준치보다 높은 세슘137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우유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준치의 6.5배가 넘는 방사성물질이 검출되기도 했다. 드로즈딘은 체르노빌로부터 300여㎞ 떨어진 곳이다.


방독마스크를 쓴 한 남성이 1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올해부터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에게 지급되던 연금과 의료혜택이 축소되는 데 항의하고 있다.  키예프 | AFP연합뉴스

방독마스크를 쓴 한 남성이 1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올해부터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에게 지급되던 연금과 의료혜택이 축소되는 데 항의하고 있다. 키예프 | AFP연합뉴스

연구를 진행한 그린피스팀을 지난 9일 키예프 시내에서 만났다. 연구팀의 이리나 라분스카 역시 키예프 출신으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임신 중이었다. 19일 체르노빌 사고 25주년 국제 콘퍼런스에서 연구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생화학박사인 그는 “이들은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고 생계를 꾸려갈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살고 있지만 건강을 위협하는 환경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신선한 채소나 곡식 등 깨끗한 음식을 외부에서 공급하거나 구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배정된 식품구입 지원예산은 월평균 1인당 약 2.1그리브나(약 300원)에 불과하다.

라분스카는 특히 아이들의 건강을 걱정했다. 유아의 노출량을 기준으로 17배가 넘는 방사성물질이 검출된 곳도 있어서다. 나디야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 내 삶은 크게 달라졌다”며 “3명의 아이들이 모두 심한 두통을 앓고 있고 순환계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사고 발생 25년이 지난 지금도 각 지역의 토양에 흡수된 방사성물질이 먹이사슬을 따라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주민 건강을 악화시키고 있다. 지난 11일 우크라이나 중앙원자력센터에서 만난 잔나 바실레브나 어린이병동 의사는 “오염 추정지역에서 생산된 채소나 육류 등을 먹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특히 어린이와 여성들이 방사성물질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바실레브나가 공개한 어린이병동 자체 조사자료에 따르면 방사성물질에 노출된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또는 성장하면서 호흡기 관련 질환을 가장 많이 경험(약 20%)한다. 이 밖에 눈 관련 질환(약 14%), 갑상샘 관련 질환(약 12%), 위장 기능과 관련한 장애(약 9%) 등을 경험한다.

[체르노빌 현장을 가다]300㎞ 떨어진 곳서도 ‘피폭 일상화’… 생태계 축적·피해 규모 알 길 없어

사고 영향이 얼마나 커질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불확실성’은 더 큰 문제다. 그린피스 에너지분과 소속의 물리학자 하인즈 슈미탈은 “아무리 적은 양의 방사성물질이라도 일단 유출됐다면 생태계에 얼마나 축적되고 어떤 형태의 문제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무리 적은 양의 세슘이라도 호수로 흘러들어가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며 “체르노빌 사고 당시 유럽 국가들이 낚시를 금지했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말했다.

체르노빌 사례에 비쳐볼 때 후쿠시마의 상황 역시 완전히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방사성 오염수를 바다에 배출한 일본의 행위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앞바다에서 잡은 까나리에서 기준치의 25배에 달하는 방사성 세슘이 검출되는 등 이미 해양생태계로 방사성물질이 침입하고 있다.

슈미탈은 “일본의 행위는 폐기물의 해양 투기를 금지한 런던협약을 명백하게 위반한 행위”라고 말했다. “원전에서 오염수를 빼낼 때는 댐 형태의 구조물이나 유조선 등에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정화 처리하는 게 기본이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일본이 국제사회의 도움을 거부하는 등 초기대응이 미흡했고 관련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슈미탈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60만명에 가까운 원전 작업자들이 투입됐고 옛소련의 경제가 어려워질 만큼 많은 자금을 쏟아붓는 등 신속하고 계획적인 대응을 했다”며 “반면 일본은 제대로 짜여지지 않은 대응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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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한 사후처리에도 불구하고 체르노빌 원전은 사고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안정적이지 못하다. 사고 발생 7개월 뒤 석관으로 4호기를 덮었지만 여전히 내부에 상당한 양의 핵연료가 남아 있는 데다 노후화로 인한 균열이 진행되면서 비가 내리는 경우 방사성물질이 비를 타고 흘러내려가 인근 지역을 오염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인 셈이다. 후쿠시마의 경우도 원전 자체가 폭발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갈 확률은 적지만 방사성물질이 생태계로 유입되고, 원전의 상황이 안정화되지 못하는 등 ‘항구적인 위기’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원전을 고집하는 것일까. 중앙원자력병원 병동에서 만난 니콜라이 킬로비치(73)는 본인이 체르노빌 원전에서 일하다가 여러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원자력발전을 찬성했다. 종합진단을 받기 위해 일 년에 3주 정도 병원에 입원하고,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 “아픈 데가 하도 많으니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는 킬로비치가 원전에 찬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대로만 돌아간다면 원자력발전처럼 저렴하면서도 깨끗한 에너지가 어디 있습니까? 환경오염을 이야기하는데 당신들은 얼마나 에너지를 아껴 쓰고 있나요.”

그러나 이리스 청 그린피스 국제 기후·에너지 활동가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원전 개발이 집중되는 반면 이미 원자력을 경험한 유럽과 미국이 왜 재생가능한 에너지에 초점을 두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원자력의 긍정적·부정적 효과를 모두 겪은 유럽이나 미국은 안전성은 물론이고 경제성의 측면에서도 원자력발전보다는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하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틀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은 “원전을 짓고 운영해서 초기 투자 비용을 회수하기까지 보통 30년이 걸리는 반면 초기에 건설할 때 투입되는 노동자 말고는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과학기술 분야에 투자를 증대시키면 연구 인력 등 숙련된 직업군을 양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라늄 채취 비용과 핵폐기물 처리 비용, 냉각수 등으로 인한 환경적 기회비용 등을 고려하면 원전의 경제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청은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서 최근 러시아가 인도네시아에 바다 위를 ‘떠다니는(floating)’ 핵발전소를 건설할 것을 제안한 사례를 소개했다. 핵발전소의 용도는 인도네시아의 오일과 가스를 추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청은 “각국의 원자력 업체들은 원전을 건설하면 현지인들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고 광고를 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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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데위 그린피스 인터내셔널 활동가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체르노빌 사고 처리 비용만 수백억유로가 든다고 추정되고 있다”며 “안전성과 경제성 측면에서 모두 원자력발전보다는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린피스는 지난해 발간한 ‘에너지 혁명’ 보고서에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전기 수송망을 보완한다는 전제하에 세계 에너지 소비의 95%를 풍력·태양력·조력 등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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