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KBS 시청료 납부거부운동

2004.08.01 18:36

정치권력은 늘 언론을 강력히 통제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특히 정통성과 합법성이 결여된 정치권력일수록 언론을 장악하려는 강도는 더 크다.

[실록민주화운동] 66. KBS 시청료 납부거부운동

TV방송의 경우 정부가 100% 출자한 한국방송공사(KBS)가 동양방송(TBS)을 흡수토록 하고 문화방송(MBC) 주식 70%를 갖도록 했다. 라디오방송 역시 KBS가 TBS와 그 계열인 군산 서해방송, 광주 전일방송, 그리고 동아방송(DBS)을 흡수통합토록 했으며 기독교방송(CBS), 극동방송, 아세아방송에는 뉴스와 광고를 금지하고 노래와 복음방송만 허용했다. 사실상 정부의 독점방송 체제를 완비한 것이다.

그런 다음 언필칭 방송공영화를 위해서라며 방송위원회를 설립했으나 이 위원회 역시 5공정권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5공정권은 정부 출자 국영기업체처럼 방송위의 인사와 재정 권한을 철저히 행정부의 통제 하에 둔 것이다. 거기다 ‘민간방송 인수에 따른 자금난을 해소하고 전파매체를 통한 광고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80년 12월9일 정부는 KBS가 광고방송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상품광고비는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간접비용이므로 국민은 이중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시녀가 주인을 모시듯이 자연스럽게 ‘뚜뚜전’(뉴스 시그널이 끝남과 동시에 ‘전두환 대통령은…’이라는 말로 전두환의 동정을 첫 뉴스로 내보내는 것을 비꼰 표현으로, 당시 ‘땡전’이라고도 불림) 뉴스가 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전두환의 충실한 나팔수로 전락한 KBS는 제동장치가 망가진 자동차처럼 관제방송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거기다가 시청료와 광고수익은 통폐합 이후 85년 9월까지 8천7백27억원이 쌓일 만큼 천문학적인 규모로 불어났다.

KBS는 예·결산상의 수많은 의문점 이외에 서울신문(99%), 방송사업단(100%)의 지분을 소유하면서 덩치를 끊임없이 불려나갔다. KBS는 바야흐로 언론 통폐합의 궁극적 목적인 ‘전지전능한 언론제국의 건설’(85년 12월 국회의원 이철의 대정부 질의)의 꿈을 이루어가는 중이었다.

민간 주도의 상업방송이 아닌 공영방송 KBS의 정치적 굴절과 퇴폐저급한 방송내용에 대해 국민은 아무런 감시와 통제 수단을 갖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KBS 보지 않기와 시청료 내지 않기뿐이었다. 처음에는 분노한 개인들이 나서서 산발적으로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KBS 시청료는 (여당인) 민정당과 정부만 내라”면서 맨 먼저 조직적으로 KBS 시청료 거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84년 4월28일 전북 완주의 가톨릭농민회와 천주교회였다.

전문적인 지식인 집단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농민들로부터 이 운동은 출발한 것이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암담한 농촌 현실의 귀와 눈이 되어야 할 방송이 일천만 농민의 삶을 부정한 채 소수 몇 사람의 방송으로 전락한 데 분노를 느끼며 이제 우리 농민은 침묵을 깨부수고 우리의 권리를 우리 손으로 지킬 것”을 천명하며 시청료 체납에 대한 차압 협박 중지와 왜곡편향 보도의 즉각중단을 요구했다.

완주군 고산천주교회 신부 박병준의 주도로 농민들이 제기한 시청료 거부운동은 해를 넘기면서 서울의 민주화운동 중심부를 강타했다. 85년 8월2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시국대책위원회가 이를 기독교계는 물론 전국민이 참여하는 범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시국대책위는 ‘예수를 재판할 때 관제언론을 동원하여 거짓이 진실로 둔갑케 했던 일’에서 이 운동의 성서적 당위성을 찾고 왜곡편파 보도는 하느님의 진실을 거스르는 불법으로 규정했다.

1만여 기독교회와 14개 교구의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청년·여성 등 사회운동단체들은 86년 2월11일 ‘KBS시청료 거부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한 차원 더 넓은 연대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특히 주부들이 주로 시청료를 낸다는 사실에 착안해 여성단체연합이 이 운동에 앞장서기로 하고 3월8일 여성대회를 통해 KBS 시청료 납부거부를 실천방안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4월에는 인천·대전·수원 등 12개 지역협의회가 발족되고 총 18개의 지역본부가 결성됐다.

[실록민주화운동] 66. KBS 시청료 납부거부운동

이 운동에 참여한 전국의 35개 대학도 범국민운동본부에서 제작한 스티커를 받아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일제히 배포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학가는 반독재 정치투쟁에 1차적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청료 거부운동에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86년 9월29일 이 운동은 단순히 시청료와 광고비의 이중부담이라는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군사정권 찬양 일변도로 치달으며 국민을 계도대상으로 여기고 극심한 왜곡을 일삼는 파행보도를 시정하려는 언론자유 쟁취운동임을 천명하면서 ‘KBS시청료 거부 및 자유언론 쟁취 공동대책위원회’로 발전한다. 기독교와 가톨릭 등 종교 중심의 범국민운동본부에 모든 사회운동단체들이 가세하면서 한층 더 적극적인 시민 불복종운동의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이중에서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여성들의 정치적 결속이다. 범국민운동본부 고발센터에 보고된 내용 중 대부분은 시청료 징수원의 횡포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부녀자를 상대로 협박 공갈을 일삼고 빨갱이라 매도하며 폭행한다는 것이었다. 거부운동의 주체였던 여성들이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인식하고 조직화와 세력화의 의미를 확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자 정부·여당은 대책을 놓고 골몰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국방송공사법을 개정해 체납 시청료의 가산율을 10%에서 5%로 인하하는 유화책을 내놓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KBS에 시청료 강제징수권을 부여하는가 하면 86년 11월에는 대도시를 대상으로 시청료를 전기세·수도세 등과 함께 내도록 하는 ‘통합고지서’ 제도를 시행해 시청료 납부만 거부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려 했다. 강온 양면책으로 시청료 거부운동을 무력화시키려 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범국민운동본부의 스티커 나눠주기 가두 캠페인을 물리력으로 막았다. 문화공보부(현 문화관광부)는 각 신문사에 매일 하달하는 ‘보도지침’을 통해 시청료 거부운동에 대한 보도통제를 가했다.

그러나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갈수록 확산됐다. 당시 5공정권이 시청료 거부운동에 대해 “방송 개선을 요구하는 순수한 뜻이 아니라 국민적 저항운동이나 반독재투쟁을 부추기기 위한 것”으로 규정했듯이 이 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던 것이다. 그 결과 84년에 1천1백48억원이나 되던 시청료 징수액은 88년에는 7백85억원으로 뚝 떨어졌다.

이 운동은 애초부터 KBS와의 싸움이 아니라 그 관리자인 전두환 정권과의 투쟁이었다. 시민들이 손쉽게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소극적인 거부권 행사이며 불복종운동이었다. 당시 범국민운동본부의 집계에 따르면 TV 수상기 보유 가구의 52%가 이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목표인 방송의 공영성 확립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돼 시민들의 저항의식과 참여정신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됐다.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기본적 가치인 국민의 알 권리와 참여의식을 일깨워 준 이 운동이 생존에 허덕이는 농민들로부터 출발해 정치투쟁의 최전선인 야당에까지 이른 것은 90년대 이후 한국 시민운동의 방향을 시사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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