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리본의 궤적

2018.01.22 21:20 입력 2018.01.22 21:21 수정
박민규 | 소설가

[박민규 칼럼]노란 리본의 궤적

급격한 커브를 그리며 배는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기운 채로, 마치 리본을 묶는 듯한 궤적을 그리고는 서서히 침몰했다. 과적이 원인이란 얘기도, 침수와 외력이 있었다는 말도 나왔으나 4주기가 다가오는 지금까지 정확한 침몰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실은 무엇 하나 밝혀진 것이 없지만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제 좀처럼 이슈가 되지 않는다. 의문과 의문으로 점철된 이 사건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의문점은, 어쩌면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막연히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믿고 있는 상당수의 여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조선은 왜 망했는가, 우리는 왜 식민지 지배를 받아야 했으며, 또 강대국들의 대리전을 치러야 했나, 그리고 왜, 분단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왜, 군부독재의 치하에서 그토록 오래 신음했어야 했나….

[박민규 칼럼]노란 리본의 궤적

그 원인과 이유가 국민적 이슈가 되었던 시기를 나는 경험한 적이 없다. 잠시 잠깐 결과에 대한 비판, 결과에 대한 분노, 결과에 대한 처벌의 순간은 있어 왔으나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비판하지만 실은, 과정을 중시할 수 없는 이유 역시 애초부터 원인을 망각하거나 따지지 않는 역사적 습관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 습관은 민족적 수치심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나라를 빼앗기고 스스로 독립을 일궈내지 못한 자괴감이 뿌리일 수도 있고, 부역이란 원죄를 가리기 위한 수단과 획책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정권의 존재 이유가 실은 명분 없는 쿠데타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모두가 공범이거나 못난 놈들이란 얘기가 될 테지만… 무엇보다 나는 우리의 현대사가 원인과 이유를 따지면 곤란해지는 특정 세력의 손아귀에 의해 지속적으로 주물러져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오랜 세월 구석구석 참 열심히도 주물러왔다. 그사이 너도 많이 늙었구나. 그래, 손목은 무사하니? 이제 그만. 오빠 어깨 다 풀렸다.

채 2년도 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급격한 커브를 그리며 크게 한 바퀴를 돌았고, 마치 세월호와 같은 궤적을 그리고는 새롭게 항해 중이다. 왜 급변침을 해야만 했던가, 이유는 너무나 명백했다. 기울어져 가는 배를 일으켜세운 것은 조타실의 지시나 기관실의 동력이 아니라 국민이었다. 역사에선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세월호의 노란 리본을 보면서 이제 나는 ‘국가’라는, 오천년을 이어왔건 말건 지금 현재 오천만명이 타고 있는 현실의 배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강대국이나 부국, 선진국과 같은 거창한 이름의 배가 아니라 원인과 이유가 분명한, 비로소 국가의 존재 이유를 떳떳이 묻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궤도의 대한민국이다.

오랜 관성은 여전히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있다. 원인과 이유를 밝히면 곤란해지는 그들은 여전히 원인과 이유를 따지지 말라고 아우성이다. 이름을 바꾸고 헤쳐 모여 헤쳐 모여를 하며 그들은 스스로의 원인을 지우고 또 지워왔다.

보라돌이가 뚜비 되고 나나랑 놀던 뽀가 뚜비 손잡고 나타나면 까르르르 시청률이 유지되던 시대도 이제 저물어간다.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 결과만 기억하는 시스템을 그래서 여태껏 물고 붙잡고 있겠지만 그만, 우리는 크게 한 바퀴를 돌았고 여전히 그들은 급변침의 진짜 원인을 모르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배가 침몰하는데 가만히 있으라 외치던 선내 방송을 기억하고 있다. 배가 침몰했는데도 전원 구조를 했다고 버티던 언론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원인을 감추기 위해 똘똘 뭉쳐 날뛰던 정치인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유를 따지면 몰려와 겁박을 주던 관변 단체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들을 관리하고 개밥을 주던 조직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새삼 이게 나라냐, 놀라 외쳤지만 실은 오래전에도 우리는 이런 나라였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그들이 나라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는 사실이다. 지난 9년간 나라 걱정을 안 하던 이들이 현 정권이 출범하고 8개월 사이 이토록 나라 걱정을 집중적으로 해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답은 한 가지다. 저들은 아직도, 또 여전히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미리 말해두거니와 문재인 정권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그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 있다. 원인과 이유가 분명한, 비로소 국가의 존재 이유를 떳떳이 묻고 답할 수 있는 새로운 궤도의 대한민국에서 이제 그간 외면해 온 과거사의 원인과 이유를 하나하나 밝혀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과 이유를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관성에 따른 결과론적인 적폐청산이 아닌, 진정 새로운 궤도의 적폐청산이다. 더 많이 들추고 끝까지 들춰야 한다.

나는 현 정권이 의연히 그 길을 갔으면 한다.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그것이 현 정권의 탄생 원인이고, 두 번째는 국가의 존재이유에서 진정한 ‘미래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았던 이들이 뼈저리게 느꼈던 참사의 교훈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뿐이며, 그래서 누구보다 이제 스스로 그 이유를 알아야겠기 때문이다. 노란 리본을 닮은 궤적의,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이유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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