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해와 달로 쫓고 쫓기는 오누이…‘근친혼 스캔들’이 숨어 있다

2018.04.05 21:29 입력 2018.04.05 21:37 수정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그늘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신화에는 그늘이 있다. 해가 뜨면 그늘이 생기듯. 달은 해의 그늘이다. 해는 빛을 뿜고 달은 빛을 받아들인다. 달은 차고 해는 뜨겁다. 해와 달은 거인 창세신의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다. 과학적 이해 이전에 인류는 해와 달을 불가피한 짝으로 상상했다. 해와 달의 관계가 그러하듯 밝게만 보이는 이야기에도 어딘가 그늘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양지와 음지를 함께 봐야 신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는 옛이야기가 있다. 어릴 적 많이 듣던 옛날이야기, 아이들이 그림책으로 많이 보고 읽는 민담이다. 영문학자 정인섭이 1911년에 채록하여 1952년 런던에서 출판한 <Folk Tales from Korea(한국의 민담)>에 실어놓은 이야기를 번역하면 이렇다.

호랑이가 이웃 부잣집에 품일을 갔다 오던 늙은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의 옷과 머릿수건으로 변장하고 오누이가 있는 집으로 찾아가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오누이는 문구멍으로 내다보고 호랑이인 줄 알고 뒷문으로 도망쳐 나무 위로 피한다. 오누이를 쫓아 호랑이가 나무로 올라오자 오누이는 하늘에 빈다. 하늘에서 내려준 쇠줄을 타고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지만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타고 하늘에 오르다가 줄이 끊어져 수숫대가 있는 곳에 떨어져 죽는다. 하느님은 오빠는 해, 동생은 달이 되게 하였지만 동생이 밤이 무섭다고 하여 역할을 바꾸어 오빠는 달, 여동생은 해가 된다. 여동생은 낮에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 강력한 빛을 뿜어낸다.(‘해와 달’)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사나운 호랑이의 형상은 빠져 있지만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다.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무섭기는 하지만 호랑이는 결국 하느님의 엄벌을 받는다. 별로 그늘이 보이지 않는 ‘아동용’ 옛날이야기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라도 민속학자 손진태가 1930년에 일본어로 출판한 자료는 좀 다르다.

옛날 하느님은 오빠를 태양으로, 누이는 달로 만들었다. 어느 날 달은 사람들에게 쳐다보이는 게 부끄럽다면서 태양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오빠는 양보하지 않았다. 심하게 다투다 오빠가 담뱃대로 누이의 눈을 찌른다. 오빠는 눈이 찔린 누이가 불쌍해서 자리를 양보한다. 결국 누이가 해가 되고 오빠가 달이 된다. 그때 찔린 눈의 상처가 태양의 흑점이라고도 한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오누이의 역할 바꾸기가 사이좋게 이뤄졌지만 이 이야기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담뱃대로 누이의 눈을 찌르는 오빠의 폭력이 드러난다. 누이가 불쌍했으면 처음부터 폭력을 행사하지 말았어야 한다. 대체 오빠는 왜 그랬을까? 손진태가 <한국민족설화의 연구>(1947)에서 인용한 또 다른 자료에 보면 호랑이는 “이번에는 ‘옷 벗어 주면 안 잡아먹지’ 하므로 치마를 주었다. 이어서 저고리, 바지, 속적삼, 속옷까지 다 주고 나신(裸身)이 되었으므로 가랑잎사귀를 따서 음부를 가리고 갔다. 범은 繼續(계속)하여 나왔다. 팔과 다리를 要求(요구)하고 最後(최후)에는 몸뚱이까지를 要求(요구)”한다.

호랑이도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그늘에는 폭력이 감춰져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누이는 처음에는 밤이 무섭다며 해로 바꿔달라고 한다. 달이 되고 보니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이 부끄럽다고도 한다. 모두 하느님의 결정을 부정하는 태도다. 왜 누이는 신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부끄럽다고 했을까? 왜 무서움과 부끄러움은 여성의 것이어야 할까? 또 다른 그늘이 아닐 수 없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만나면서 내내 지울 수 없었던 이런 그늘을 풀 실마리를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1-날것과 익힌 것>을 읽다가 발견했다. 베링해협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의 일월기원신화가 그것이다.

옛날에 한 남자와 그의 아내가 바닷가 외딴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둘 있었는데 하나는 여자고 다른 하나는 남자였다.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소년은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줄기차게 동생을 쫓아다녔으므로 동생은 하늘로 피신해 달이 되었다. 그 뒤로 소년은 해의 형상으로 소녀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때때로 소년은 여동생과 합류해 그녀를 껴안는 데 성공했고 그렇게 월식을 일으켰다. 아이들이 떠난 후 아버지는 사람들을 향한 암울하고 미운 마음을 가졌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으로 나와 질병과 죽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질병으로 죽은 희생자들을 자신의 먹이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탐식은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러자 그는 건강한 사람들마저 잡아먹기 시작했다.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된 이야기인데 해와 달이 되는 과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 이야기에는 없는 아버지가 출현하여 자식을 잃은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질병과 죽음의 신이 되고, 식인귀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버지의 고통을 초래한 원인이 심상찮다. 오누이의 사랑, 특히 오빠의 욕망이 원인으로 던져져 있다. 이누이트인들은 해와 달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식과 월식의 원인을 오빠의 끊임없는 누이 쫓기, 곧 근친상간의 결과로 상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레비-스트로스는 ‘일월식과 근친상간이 등가관계라는 원칙을 제시하는 신화’라고 해석했다.

1887년 박물학자 루시엔 터너가 캐나다 퀘벡의 포트 치모(현재 쿠주아크)에 거주하는 이누이트로부터 들은 신화에는 이 문제가 더 선명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한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방문을 받은 여자가 정체를 밝히기 위해 젖꼭지에 그을음을 칠한다. 견훤 출생담에 등장하는 야래자(夜來者)와 비슷하다. 광주 북촌 부잣집 딸을 찾아온 사내의 정체는 큰 지렁이였지만 이 경우는 전혀 다르다. 다음 날 여자는 오빠의 입술이 까만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이는 놀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른다. 이유를 모르는 부모는 화가 나서 오누이를 꾸짖는다. 그날 밤 누이는 집을 떠났고 오빠는 동생을 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도망치는 누이가 해고, 뒤쫓는 오빠가 달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오누이 사이에 신이 개입하면 근친상간 모티프가 희미해진다. 만주족의 일월기원신화가 그렇다. 옛날 해도 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세상에 오누이가 살았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들은 어둠의 사람들을 위해 빛을 찾기로 결심한다. 둘은 갖은 고난을 헤치며 서천으로 달려가 마침내 부처님을 만난다.

부처는 오누이에게 등불 하나와 날아다니는 신발(飛鞋) 한 켤레를 주었다. 누이동생이 신발을 신고 날아다니자 오빠는 아무리 달려도 누이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가 부처에게 전해지자 부처는 오빠에게 거울 하나를 준다. 오빠가 거울을 비추자 누이동생의 모습이 나타나 쫓아갈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거울 속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도 비쳤다. 누이동생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려 달아나자 오빠가 뒤에서 쫓았는데 쫓고 쫓기면서 둘은 점점 하늘로 올라갔다. 마침내 누이동생의 손에 있던 등불은 태양이 되고, 오빠의 손에 있던 거울은 달이 되었다고 한다.

만주족 신화에는 부처님이 창조신으로 등장한다. 거울과 등불을 주어 오누이를 달과 해로 만든 존재가 부처 아닌가! 날아다니는 신을 신은 누이는 등불을 들고 도망치고, 거울을 든 오빠는 누이의 뒤를 쫓지만 왜 도망치고 쫓는지 분명하지 않다. 부끄러움의 정서도 근친상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타인의 나신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근친상간과 동일시되는 일월식도 없다. 부처님과 오누이의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는 인식이 신화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양상이 루마니아 구전 서사시 <해와 달의 유래>에는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도 해와 달은 오누이다. 태양인 오빠는 누이 일레아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누이 같은 여자를 찾아 천지간을 돌아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오빠가 청혼하자 누이는 그럴 수 없다고 거부한다. 하느님도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며 현명한 판단을 내리라고 권한다. 그러나 오빠는 “일레아나와 함께라면 영원한 지옥을 선택하겠노라”고 선언한다. 태양은 하강하여 누이와의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한다.

하지만 오누이의 결혼을 허락할 하느님이 어디 있겠는가! 둘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거행하려는 순간 거대한 손이 누이를 번쩍 들어 바다로 던져버린다. 바다에 던져진 누이는 잉어로 변신한다. 근친혼을 부정하는 하느님의 제재를 받은 것이다. 그래도 태양은 기어이 누이를 쫓아 바다에 몸을 담근다. 그 순간, “성스러운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이/ 물결 사이로 손을 넣어/ 손으로 잉어를 잡아/ 하늘로 내던졌네/ 보름달로 변하도록/ 하느님은/ 엄숙한 목소리로 이르셨지./ 너 일레아나야/ 너 빛나는 태양아/ 두 눈으로 보아라/ 너희들이 항상 떨어져 있는 것을/ 밤에는 한없는 그리움으로/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영원히 서로를 뒤쫓아야 하는 것을/ 끝없이 하늘을 돌며/ 이 세상을 비추면서”.

하느님은 잉어로 변신한 누이를 다시 보름달로 만든다. 그리고 끊임없이 서로의 뒤를 쫓을 뿐 만날 수 없는 해와 달의 질서를 만든다. 여기에도 일월식은 없다.

이누이트 신화에서 루마니아 서사시까지 읽고 보니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형상화되어 있는 오빠의 폭력과 누이의 부끄러움의 원인(遠因)이 보인다. 눈을 찔러 태양의 흑점을 낳는 이야기에는 오빠의 성적 폭력이 은폐되어 있고,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 사람들이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도록 빛을 쏘는 이야기에는 근친상간 금지 위반에 대한 죄의식이 감춰져 있었다. 일월식과 같은 자연의 괴변을 성적 폭력이나 터부의 위반 사태와 동일시하는 원시적 사유가 오랜 전승과정에서 잊히고 변형되었던 셈이다.

글을 쓰고 보니 아이들이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하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의 스캔들을 보도한 꼴이 되었다. 그렇다고 아이들한테 그늘을 강요할 필요는 없겠다. 아이들은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밝은 빛을 보고 행복해하면 된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면 고통스러워도 그늘을 봐야 한다. 진실은 그늘에 있으니까.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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