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

(7)바스쿠 다가마 세계일주 기념해 세운 벨렝탑, 대항해시대 힘의 상징

2018.04.06 21:15 입력 2018.04.06 21:25 수정

포르투갈 대항해시대의 빛 <2>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벨렝탑(Torre de Belem). 1515년 마누엘 1세가 바스쿠 다가마의 세계일주 위업을 기념해 만들었다. 등대는 아니지만 항로표지이자 의례적 관문, 방어용 탑 역할을 겸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벨렝탑(Torre de Belem). 1515년 마누엘 1세가 바스쿠 다가마의 세계일주 위업을 기념해 만들었다. 등대는 아니지만 항로표지이자 의례적 관문, 방어용 탑 역할을 겸했다.

대서양이 붉게 물들고 있다. 어느 바다든 일몰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야 없겠지만, 리스본 북쪽 신트라 해안 단애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장엄함 그 자체다. 150m 이상의 높은 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한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이곳에 자리한 등대가 항로를 밝힌다. 바이런이 자신의 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에서 ‘빛나는 에덴’이라 불렀던 호카곶, 그곳에 호카곶 등대(Farol de Cabo da Roca)가 서 있다.

■ 빛나는 에덴, 호카곶의 등대

호카곶은 서단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수도 리스본(Lisbon)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필수 코스다. 관광과 경관 면에서는 사그레스곶보다 지명도가 높지만, 대항해시대와 관련해서는 밀리는 감이 있다. 포르투갈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호카곶 등대(1772년)는 석회암과 화강암 벽돌을 쌓아올리고 그 위로 등탑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등대는 대서양의 세찬 비바람을 이겨가며 240여년을 버텨왔다.

호카곶 남쪽으로 두 시간 거리의 리스본으로 향했다. 리스본이 탄생한 것은 축복받은 지리적 조건 덕이다. 리스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페니키아인은 기원전 1200년경 지중해의 선단에 대서양 교역도시를 만들었다. 현존하는 리스본 대성당 회랑의 고고학 발굴에서 페니키아의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현재의 구도심 역사가 기원전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증명했다.

리스본에 있는 대항해기념탑. 엔히크 왕자의 서거 500주년을 맞이해 1960년 세웠다.

리스본에 있는 대항해기념탑. 엔히크 왕자의 서거 500주년을 맞이해 1960년 세웠다.

리스본을 찾는 사람이라면 보통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엔히크 왕자의 서거 500주년을 맞이해 1960년 건축한 대항해기념탑을 찾는다. 높이 52m에 달하는 배 모양의 기념 조각상은 15~16세기 대양을 건너던 용감한 선조를 기리기 위해 리스본시에서 헌정한 것이다. 왕자가 앞장서고 항해가, 과학자, 성직자가 그 뒤를 따른다. 항구 최고의 역사적 랜드마크로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중이다. 사그레스 성채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이 리스본에서 재현됐다.

리스본은 북쪽과 남쪽의 물건뿐 아니라, 해상의 관습과 전통이 뒤섞이는 곳이었다. 남해안의 라구스(Lagos)가 아프리카를 공략하는 전략적 위치였다면, 리스본은 신대륙으로 가는 최단거리의 출발지이자 플랑드르, 영국, 북해와 발트해 지역의 전진기지라는 입지를 충분히 살리면서 대서양 세계의 핵심 도시로 부상했다. 이국에서 거두어들인 제국의 노획물이 당도했으며, 향신료와 금, 진귀한 목재, 무기, 설탕, 담배는 물론이고, 포르투갈의 불명예스러운 역사로 기록된 서아프리카의 노예도 이곳에 가득했다.

■ 과거의 영광 훈장처럼 달고 있는 리스본

리스본에도 이러저러한 역사적 등대가 산재한다. 그러나 등대는 아니지만 항로표지 역할을 겸했던 중요한 건축물이 바닷가에 서 있다. 그 유명한 벨렝 탑(Torre de Belem)이다. 1515년 마누엘 1세는 바스쿠 다가마의 세계일주 위업을 기념해 이 탑을 만들게 했는데, 테주강(타호강)을 오가는 선박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때 세계를 풍미한 마누엘 양식의 대표작이다. 애초부터 성채를 방어하는 기능을 하는 리스본의 의례적 관문이었다. 항로표지이자 의례적 관문, 방어용 탑이자 상징적 건축물로 존재해온 것이다.

[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7)바스쿠 다가마 세계일주 기념해 세운 벨렝탑, 대항해시대 힘의 상징

리스본은 과거의 영예를 훈장처럼 달고 있는 항구도시다. 제국 해양의 영광은 곳곳에 남아 있다. ‘바스쿠 다가마’라는 이름은 리스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바스쿠 다가마는 지금 제로니무스 수도원 묘지에 조용히 누워 있다. 해양 유물이 넘치는 리스본 해양박물관은 전시가 아니라 창고를 보여주는 듯싶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국의 통치와 노예 매매 등을 둘러싼 반성의 글귀는 단 한 줄도 발견할 수 없다. 당시 신대륙의 은과 금이 유입돼 이베리아반도는 흥청망청했고 식민지 향로무역 덕에 곳곳에 많은 건물이 들어섰지만 그 이면엔 아픈 역사도 담겨 있다.

역사는 흐르고 또 흘렀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맞바람만큼이나 모진 역사의 바람이 이베리아반도로 휘몰아쳤다. 리스본 시내에서 노란 트램을 타고 천천히 언덕을 오른다. 트램은 역사의 무게가 가라앉은 오랜 돌 포장길을 기어오르며 좁은 골목으로 사라진다. 트램의 흔들리는 낡은 차체가 들려주는 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옛 도시의 감흥을 주기에 충분하다.

포르투의 이색 건물들.

포르투의 이색 건물들.

리스본은 오랜 역사를 지녔지만 어쩌면 ‘신흥 도시’다. 숱한 지진으로 많은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그 덕에 신축 건물이 다수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따뜻한 해양성 기후 속에 종려나무가 줄지어 선 언덕 아래로 노랗거나 분홍빛의 화사한 건물이 도심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리스본의 술집에서 포르투갈 특유의 대중 가곡 파두(fado)를 듣는다. 향수와 동경, 외로움과 처연함을 담은 파두는 해외 식민지로 나간 외로운 뱃사람이 선술집에서 들었을 법한 노래다. 사내는 말쑥한 정장을 입고 기타와 비올라의 감미로운 멜로디에 맞춰 파두를 부른다. 포르투갈 와인을 마실 때마다 파두가 뿜어내는 독특한 취향이 도도하게 높아져간다. 북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온 흑인 여성이 파두 공연장에서 손님들 시중을 들고 있다. 식민의 시대는 가거나 혹은 멈추거나 아직도 진행 중이다.

리스본역 앞에 앉아 포르투(Porto)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잠시 눈을 감고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렸다. 눈이 멀지 않고는 그런 무참한 식민 제국을 거느릴 수 없었다고 하는…. 리스본 시내에는 유색인이 눈에 많이 띈다. 과거 해양제국의 자취가 이 항구도시에 남았기 때문이리라. 그랬으니 나 같은 동방인도 거리낌 없이 이곳까지 찾아들어온 것이 아니겠는가.

■ 해양인의 고대적 기질을 간직한 포르투

포르투갈 탐사의 마지막 장소인 포르투로 향했다. 포르투는 ‘타일의 도시’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마카오를 통해 건너왔거나 이슬람 문명의 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한 청화백자를 포르투갈식 타일로 재탄생시켜 고전적 건축에 접목했다. 포르투역 앞의 역사기록화는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전쟁과 승리의 나날을 웅장한 타일화로 나타냈다. 성당을 타일로 꾸미는 것도 포르투다운 발상이다. 1996년 유네스코는 이 흥분을 자아낼 만큼 특이한 대서양 도시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이곳의 성당과 성벽, 15세기의 집이 모두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게 됐다.

대성당의 아랫길로 내려가면 포르투의 젖줄인 도루강에 닿는다. 굽이진 골목길을 계속해서 내려가야 하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이렇듯 많은 집이 빼곡하게 자리한 것 자체가 놀랍다. 산등성이에 밀집 대형으로 들어찬 고밀도의 골목과 주택은 이 도시의 역사와 전개 과정이 압축적으로 진행됐음을 암시한다. 집마다 역사의 무게를 지니고 있으며, 선원과 선장과 해군과 무역상인 그리고 짐 부리는 일꾼과 굴뚝청소부가 살고 있었을 것이다. 포르투 사람에게 도루강은 바다로 나아가는 고속도로였으며 대서양으로 내달리는 지름길이었기에 이 강은 그들의 영혼과 일상생활에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모든 골목은 강변으로 치닫는다. 강변에는 요새화된 성과 축대가 세워져 있어 이곳을 방어했다. 카페와 레스토랑, 호텔로 변모된 강변의 건축물 위로 우람한 철제 다리가 높다랗게 허공을 가로지르며 놓여 있고, 빛바랜 색감의 고풍스러운 전차가 쓰러질 듯 좁은 협궤에 몸을 싣고 비탈길을 내려간다.

포르투 역시 페니키아와 로마제국의 영역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포르투를 비롯한 대서양 연안 도시의 포르투갈인에게 해양을 탐험하고 개척하고자 하는 피가 흐르는 것은 어쩌면 오랜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등이 뒤섞이고, 지중해를 건너온 그들의 대항해적인 기질이 DNA로 이어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파동은 포르투에도 어김없이 밀어닥쳤다. 도루강변에 산재한 조선소에서는 당시의 첨단 기술로 선박이 만들어졌다. 1415년 엔히크 왕자가 북아프리카를 공략할 때는 라구스뿐만 아니라 포르투에서도 그의 함대가 출전했다. 즉 포르투는 라구스, 리스본과 더불어 포르투갈의 3대 항구로 중요시됐다.

■ 포르투 불빛도 16세기초 일제히 여명을

포르투 항구에 있는 미겔 등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 등대에는 건축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포르투 항구에 있는 미겔 등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 등대에는 건축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유서 깊은 포르투 항구에는 16세기 대항해시대의 미겔 등대(Sao Miguel-O-Anjo)가 남아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이며,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된 등대 중 하나다. 구도심에서 노란 전차를 타고 알레그레 공원에서 내리면 바로 등대가 보인다. 해안의 돌출된 곳에 화강암 축대를 정교하게 쌓고 등대를 세웠다. 도루강 하구는 대서양과 만나는 기수역이다. 어선 몇 척이 눈에 띌 뿐, 항구라기보다는 한적한 해변공원 같은 느낌이다.

오늘날 시각으로는 그저 자그마한 건축물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보면 등대 주변의 넓은 축대와 방파제를 커다란 화강암을 잘라서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많은 노동과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 유산을 평가할 때 각종 기계를 이용해 고층빌딩을 짓는 오늘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손노동에 의존하던 당대의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28년 비세우(Viseu)의 주교 미겔 다 실바가 등대 건설을 성당에 명했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프란체스코 다 크레모나(Francesco da Cremona)가 디자인하여 1538년 완성했다. 단아하면서도 고전적이고 품격 높은 건축물이다. 현재 등롱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멈추었고, 실제로 등대 기능은 오래전에 상실했다. 건축 당시의 명문이 각인된 글씨판만이 화강암에 깊게 새겨진 채 등탑에 여전히 붙어 있다. 미겔 등대는 1528년, 즉 포르투갈 대항해시대의 힘과 대서양으로의 분출을 상징하는 건축물일 것이다.

사그레스의 상비센테 등대는 1520년, 리스본의 벨렝 탑은 1515년, 포르투의 미겔 등대는 1528년 각각 세워졌다. 각기 전혀 다른 지역인 남서단의 사그레스, 중앙의 리스본, 북부의 포르투에 거짓말처럼 비슷한 시기에 등대가 들어섰다. 대항해시대가 꽃피던 때 포르투갈의 불빛도 16세기 초반 일제히 여명을 밝혔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필자 주강현

[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7)바스쿠 다가마 세계일주 기념해 세운 벨렝탑, 대항해시대 힘의 상징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생태학, 민속학, 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독도강치 멸종사> <환동해문명사> <적도의 침묵>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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