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4주기

“노란리본, 왜 아직도 다냐고요?…잊어서는 안되니까요”

2018.04.13 15:42 입력 2018.04.13 21:15 수정

각자의 방법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들

카페에 ‘추모 벽’ 만든 사장님…진실 알리려 언론 전공하는 학생

노란리본 달고 4년째 택시 모는 기사 아저씨 “나에겐 마음의 빚”

세월호 참사 4주기를 앞두고 13일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 내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희생자 영정과 대형 세월호 모형 사이를 추모객이 걸어가고 있다. 합동분향소는 오는 16일 열리는 정부 합동 영결·추도식 후 철거될 예정이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세월호 참사 4주기를 앞두고 13일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 내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희생자 영정과 대형 세월호 모형 사이를 추모객이 걸어가고 있다. 합동분향소는 오는 16일 열리는 정부 합동 영결·추도식 후 철거될 예정이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10년째 개인택시를 몰고 있는 김종수씨(55)의 택시는 조금 특별하다. 택시 뒷유리 오른쪽 하단엔 노란리본 스티커가 붙어 있다. 택시 안 구석구석에도 세월호 배지와 노란리본이 달려 있다. 2014년 4월16일 김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다. 김씨는 “오전에 손님을 태우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고 했다”며 “곧 진행자가 ‘전원 구조됐다’고 하길래 채널을 돌렸다. 근데 오후가 되니 난리가 났더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그 이후로 세월호는 김씨에게 ‘마음의 빚’이 됐다. 김씨는 “내가 좀 더 관심을 갖고 채널을 안 돌렸으면, 그때 뭐라도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안 죽었을 텐데 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그해 여름 서울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노란리본을 가져다 처음 택시에 달았다. 김씨는 “함께 기억하고 싶어서 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가끔 ‘뭐하러 이런 거 붙이고 있느냐’ ‘재수 없게 택시 잘못 골랐다’고 말하는 손님도 있지만, 대부분은 함께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이 리본들 다 떼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는데 그런 날이 올까요. 세월호 진상규명이 다 끝나서 유가족들이 발 뻗고 자게 되는 날까지 노란리본을 뗄 생각이 없습니다.” 김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세월호가 인양됐을 때 금세 진실이 밝혀질 줄 알았는데, 1년이 지나도록 사정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세월호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박창섭씨(36)가 운영하는 카페 한쪽 벽면은 ‘세월호 추모의 벽’이라 불린다. 이 벽에는 카페를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포스트잇 메모지가 빼곡하다. 박씨는 “처음엔 세월호 관련 책을 갖다 놓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공간을 마련했는데, 벽에 메모를 남기는 사람들이 늘어서 아예 손님들이 자유롭게 글을 남길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약 일주일간 가게 문을 닫았다. 당시 박씨의 딸은 생후 100일이 갓 넘었다. 그는 “아이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딸을 키울 자신이 없었다”며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우리가 할 일이 없을까’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얼마 뒤 가게 안에 세월호 추모 공간을 만들었다. 박씨는 “그렇다고 생계를 포기할 수는 없었고, 당장은 세월호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6년 촛불집회에서 박씨는 커피 200잔 무료 나눔을 진행하기도 했다. 박씨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구나’ 하는 걸 체감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요즘 세월호 관련 기사들을 보면 답답함이 먼저 앞선다”고 말했다. 그는 “2기 특별조사위원회에 유가족들이 반대하는 인사가 포함됐다는 사실을 알고 어이가 없었다”며 “황전원 위원을 추천한 자유한국당은 반성도 없는 여전한 적폐”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의 의견을 우선시해서 하루빨리 특조위가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하면 좋겠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날 저도 수학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어요.” 대학생 최지원씨(21)는 마치 어제 일인 듯 막힘 없이 4년 전 ‘그날’을 설명했다. 최씨는 단원고 희생자 학생들과 나이가 같은 ‘세월호 세대’다. 그는 “수요일 오전 수학 수업 중이었는데 참사 소식이 들려왔다”며 “친구들이랑 ‘우리 수학여행 못 가면 어떡하냐’고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실제로 일주일 뒤 예정됐던 제주도 수학여행은 취소됐다. 하지만 곧 수학여행에 대한 아쉬움은 잊게 됐다. 최씨는 “반 친구들 대부분이 충격에 빠져 선생님들이 세월호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최씨는 “세월호 참사로 처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교과서에서만 배우던 국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간호사를 꿈꿨던 최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서울의 한 사립대 언론학과에 진학했다. 최씨는 “세월호 사건은 진로를 바꿀 만큼 나에겐 영향력이 큰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기레기’라는 말이 처음 나올 정도로 한국 언론은 최악이었고, 단원고 생존학생이 ‘기자의 꿈을 포기한다’는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반대로 좋은 기자가 돼서 다시는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최씨는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선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까지 많은 언론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모든 언론이 적극적으로 나서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나 정부의 조직적 방해와 관련한 진실을 밝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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