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별·편견 거부한 여학생…글쓰기가 전부인 ‘위대한 작가’로 거듭나다

2019.04.16 21:17 입력 2019.04.16 21:18 수정
장영은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딸은 대학에 갈 필요없다는 아버지의 반대때문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글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됐다.

버지니아 울프는 딸은 대학에 갈 필요없다는 아버지의 반대때문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글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됐다.

“1928년 11월28일 수요일. 아버지 생신. 살아 계셨으면 96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오늘로 아버지는 96세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96세가 될 수 있었지만, 고맙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랬더라면 그의 인생이 내 인생을 완전히 끝장내 버렸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고, 책도 없었을 터,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 여자라서 금지된 것들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는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였고 영국인명사전의 초대 편집장을 역임한 레슬리 스티븐. 1882년 영국 런던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버지니아 울프가 어떤 사건으로 아버지에게 억하심정을 품게 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녀의 일기 속에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닮은 둘째 딸을 자랑스러워했다. 책을 좋아하는 딸에게 읽고 싶은 만큼 다 읽되, 마음에 드는 책은 반드시 두 번 읽어보라는 독서 지침까지 자상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헨리 제임스, 테니슨, 토머스 하디, 조지 메러디스, 윌리엄 홀먼 헌트 등이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 식사를 마치면 문학과 예술 작품, 정치 현안 전반을 놓고 밤늦게까지 토론하기 일쑤였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은 멋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처럼 케임브리지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그 꿈은 좌절되어야만 했다.

영국 명문가 태어나 책읽기 탐닉
‘여자’ 이유로 대학 진학 좌절 겪어
아버지까지 입학 반대 상처 받아

아버지는 딸에게 학교는 남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못을 박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1900년 전후의 영국 현실을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형제들은 모두 사립기숙학교를 거쳐 케임브리지대에 진학하지 않았던가? 왜 자신과 언니만이 학교 교육에서 소외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어야 했을까? 1948년이 되어서야 케임브리지대는 여학생 입학을 받아들인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러 차례 학교에 가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아버지는 딸의 뜻을 잘못 짚어낸다. 딸들을 위해 두 명의 가정교사를 초빙하고, 수학은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어머니는 라틴어와 프랑스어, 역사를 맡았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케임브리지 출신의 남편감을 소개시켜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케임브리지 진학은 좌절되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896년 킹스칼리지에서 그리스어와 역사 과목을 청강하는 한편 형제들의 케임브리지 친구들과 토론 모임을 가진다. 이즈음 아버지는 암 판정을 받았고, 투병 끝에 1904년 사망했다. 아버지를 잃은 버지니아 울프는 정신 착란을 겪을 만큼 큰 슬픔에 빠진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버지니아 울프는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 출판사 기획자, 작가로 활약

버지니아 울프는 1904년부터 가디언과 타임스에 서평을 쓰기 시작했고, 1905년에는 노동자 대상의 야간 수업을 맡아 교사 생활도 했다. 1907년이 되자 소설을 써 보기로 결심한다. 글쓰기를 시작한 이상 버지니아 울프는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우선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만나보기로 결심한다. 경제학자 존 케인스와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 등과 버지니아 울프는 블룸즈버리 클럽을 결성했고, 1930년대까지 이 모임은 지속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독서 목록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아버지의 서재를 졸업한 버지니아 울프는 대영도서관으로 출근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자신의 작품과 사상을 블룸즈버리 회원들과 토론하며 다음 독서 일정과 집필 계획을 수립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글쓰기가 가장 좋은 일이라고 여기고” 진심 어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레너드 울프와 1912년 결혼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희망찬 미래를 꿈꿨다. “우리는 아주 많은 일을 하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멋진 동반자였다.

‘문학적 동지’ 남편과 출판사 운영
엘리엇 등과 교류, 작가 역량 키워
‘등대로’ 등 내면서 해방감 만끽

문학적 동지였던 남편 레너드와 출판사를 운영해보기로 결심한 버지니아 울프는 1917년 3월 인쇄기를 설치하고 조판을 직접 맡았다. 출판인 버지니아 울프 역시 열정적이었다. “우리 인쇄기에 대해서 들은 적 있니? 우리는 너무나 흥분해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단다.” 애서가 버지니아 울프 부부가 차린 호가스 출판사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나는 1m 높이의 원고 탑을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신중하게 읽었다. 왜냐하면 그것들 중 많은 것은 출판의 가부를 결정해야 할 경계선상에 있었고, 또다시 출판 여부를 고려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책 읽기를 즐거워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안목을 갖춘 독자임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글쓰기는 조금 달랐다. 자신이 쓴 글 앞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무엇인가 미진함을 자주 느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함량 미달의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들.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들.

출판사 규모가 점점 커지자 버지니아 울프는 전업 작가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출판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제임스 조이스, 프로이트, T S 엘리엇 등과 교류했다. 그사이 작가적 역량도 일취월장했다. 1925년에 <댈러웨이 부인>, 1927년에는 <등대로>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드디어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획득한다. “내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자 일종의 해방감도 느꼈다. “매일같이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등대로>를 쓰고 난 다음에, 나는 그들을 내 마음속에 묻어버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나는 이제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버지니아 울프를 가로막았다.

■ 마지막까지 치열했던 삶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점령한 독일은 1940년 9월 영국 런던에 매일같이 공중폭격을 가한다. “모든 유태인이 집단수용소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남편 레너드는 유태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도 서서히 황폐해진다. 게다가 런던이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일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런던이 무참히 파괴된 모습을 본다는 것, 이것은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전쟁은 어떤 운명보다도 처참했다. “런던에서 내 가슴을 뒤집어놓는 것은, 지난번 공격 때 잿더미가 되어버린 노인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음번 공격을 각오하고서 집의 뒤채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그래도 버지니아 울프는 생각하고, 읽고, 쓰면서 종전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버지니아 울프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오늘도 틀렸다.” 두통이 심해지고, 글을 못 쓰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941년 3월28일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 레너드에게 편지를 남기고 먼 길을 떠난다. “이제 나는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어요. 읽기도 힘들어요.”

글을 쓰다 미쳐버린 여자가 맞은 비극적 최후로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가 글을 쓰면 미치거나 불행해지거나 혹은 처참하게 죽게 된다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관점에 나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방 안에서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훔쳐갔다. 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쓸 때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한 작가의 삶이 전쟁으로 중단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한 줄의 글도 읽고 쓸 수 없게 되자 생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한다.

2차 세계대전, 글쓰기 힘들어져
‘읽고 쓰는 일’ 멈추고 삶도 마감

실제로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가 된 이래로 매일 열 시간 이상 읽고 쓰는 규칙적인 삶을 실천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글쓰기에 모든 것을 건 작가였다. “천국, 그곳은 피곤해지지 않고 영원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 아닐까”라고 상상했던 버지니아 울프. 그녀는 자신이 지상에서 맡았던 글쓰기라는 과제를 성실하게 마친 후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천국에서 책을 읽고 있으리라 믿는다. 글 쓰는 여자는 온전히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글을 쓰면서. 그야말로 버지니아 울프는 위대한 작가였다.

■ 필자 장영은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3)차별·편견 거부한 여학생…글쓰기가 전부인 ‘위대한 작가’로 거듭나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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