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질환·실직 이유까지 묻는 주거취약계층 임대주택 신청서

2019.08.05 17:56 입력 2019.08.05 21:42 수정

과거 직업·결혼·병역 등 시시콜콜 요구 ‘차별 논란’

“신청자 발가벗겨진 기분”

국토부 “수정 계획 없다”

박모씨(54)는 10년 동안 길거리와 고시원을 전전하다 지난해 주거취약계층 임대주택에 들어갔다. 임대주택 입주 신청서를 쓰다가 과거 직업, 결혼 유무, 병역, 알코올 의존증 여부 등을 묻는 난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과거 직업은 직종, 근무기간, 실직 원인을 모두 적어야 한다. 박씨는 일용직을 전전한 탓에 직업란을 상세하게 채울 수 없었다. 가족은 없다고 적었다. 원래 술은 마시지 않았다.

박씨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안 쓰면 접수가 안된다고 하니 그냥 쓰는 수밖에 없었다”며 “실직 이유나 음주 여부가 집 구하는 데 꼭 필요한 질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2007년부터 주거취약계층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주택을 제공하는 사업을 진행한다. 이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신청을 하려면 병역·결혼 여부·알코올 의존증 여부·질환 보유 여부·과거 직업·가족관계 등을 자세히 적어야 한다. 홈리스행동과 LH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사업을 통해 공급된 임대주택은 LH공사 1638호, SH공사 110호 등 총 1748호에 달한다.

관련 단체 활동가들은 이런 질문 항목이 홈리스에 대한 차별과 편견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한다. 정은영 성북주거복지센터 활동가는 “내가 과거 무슨 일을 했는지,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지는 임대주택에 입주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며 “영구임대주택에서는 알코올 의존증이 있다고 신청을 안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신청자 입장에서는 벌거벗겨지는 기분이다. 집 제공하는 사업에 있어서 군대가 왜 궁금하며, 술이 왜 궁금하냐”며 “홈리스에게 집을 줬을 때 홈리스들이 집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임대료를 떼먹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바탕으로 나온 질문들”이라고 했다.

단체들은 신청서의 과도한 개인정보 요구 항목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사업과 비슷한 영구임대주택 입주 신청서에는 이 같은 질문 항목이 없다. 영구임대주택의 2순위 공급 대상자는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의 50% 이하로 자산요건을 충족한 사람 등’으로 주거취약계층의 소득 조건과 같다.

이 신청서와 함께 인권침해 논란이 일었던 ‘자활계획서’는 지난달 23일자로 폐지됐다. 자활계획서는 경제·직업, 가족·생활, 건강장애에 대한 현재의 생활현황과 앞으로의 자립계획을 써내야 했다.

이 활동가는 “20년간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사람에게 앞으로 가족생활 어떻게 할 건지 쓰라고 한다”며 “‘좋은 집에 들어가 생활이 안정되면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같은 소설을 써서 내야 했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신청서 질문 항목에 대한 구체적인 수정 계획은 없다고 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신청서 내용은 2007년 시범사업 때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당시에는 입주자가 지역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알코올 의존증 여부 등을 물어봤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고 했다. 이어 “여러 단체와 기관의 의견을 받아보고 있다”며 “아직 확정된 개정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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