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사태’와 교수사회

2019.10.01 20:52 입력 2019.10.01 20:56 수정

얼마 전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님을 어느 교수 모임에서 뵈었다. ‘김용균재단’ 설립을 홍보하기 위해 오셨다. 그 어머니의 그 얼굴과 목소리에 서리고 새겨진 기운이나 감정을 뭐라 칭해야 할지? 슬픔, 눈물 같은 흔한 단어들은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세월호’를 통해 좀 배우긴 했지만 이런 참척에는 여전히 다른 통사가 필요하다.

[정동칼럼]‘조국사태’와 교수사회

그 어머니가 “용균이 같은 일이 없게 하려면 교수님들이 중요하다”는 그런, 저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는 말씀을 했다. 짧은 행사가 끝나고는 너무 공손하게 허리 숙여 교수들에게 인사하셨다. 낳고 키운 자식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모르지만, 가슴에 치받는 무언가를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조국사태’는 한국 대학과 교수사회의 참담한 모순과 기괴한 실상을 또다시 드러냈다. 한국 민주주의는 대학 문 앞에서 멈춘다. 특권적 교육 차별, 대학의 반민주성, 대학 내부의 불평등은 정규직 교수들의 무책임·무능과 긴한 관계를 갖고 있다. 특권층 자녀들이 대학 실험실과 연구실에 드나들며 ‘제1저자’ 논문을 발표한 사실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대학이 계급재생산에 어떤 역할을 하며 교수들의 계급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일이다. 그들만의 ‘공정’ 촛불을 든 ‘스카이’ 학생들을 과연 누가 가르치는가? 그 특권과 서열의식은 어디서 왔겠는가? ‘주요 대학’들은 고교서열화의 실질적 배후조종자다.

따라서 고교서열화와 대학 ‘캐슬’을 동시에 허무는 전략이 요청된다. 그렇지 않고는 한국 민주주의란 늘 반편이다. 혹자들은 서울대(학부)나 ‘스카이’가 없어지면 그걸 대신하는 또 다른 명문과 서열이 등장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일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강고하게 정계·재계·언론계·학계 등 이 좁은 나라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 역사와 특권의 연줄망이 얼마나 깊고 촘촘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하는 소리다. 게다가 우리는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스카이캐슬’의 지배에서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무려 25년간 총장 자리를 지키며 군림해왔는데 알고 보니 허위 학력자라는 의혹이 불거진 동양대 총장의 경우는 어떤가? 상당수의 사립대학 총장 자리는 임기가 없다. 검증도 책임도 없다. 짬짜미로 구성된 이사회와 신에 준하는 권능을 지닌 교주(校主)가 자의로 뽑거나 ‘꽂는다’. 그래서 전체 대학 구성원이 참여하는 총장 선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중 직선제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쯤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총장 직선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학은 전국에 20여개밖에 되지 않는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총장 직선제를 많이 없애서 대학 민주주의에 치명타를 가했었다. 2015년 고현철 부산대 교수는 총장 직선제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다. 그는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다”라는 말을 남겼다.

보통의 사립대 교수들은 ‘찍힐까’ 겁이 나서 정규직조차 정치행동을 거의 못한다.(이번 ‘조국 반대’ 교수들이 이름은 밝히되 소속 학교까지 밝히지는 못한 코미디도 이런 견지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이불 속이나 술집에서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은 침묵하며 거세된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일베를 많이 하라’고 청년들에게 권해온 류석춘 연세대 교수의 막말과 성희롱성 발언은 어떻게 또 가능했을까? 대부분 정규직 교수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표절, 성희롱, 연구비 횡령 등 비위는 왜 중단되지 않을까? 교수라는 존재의 권력과 권리가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일종의 신분사회며, 그 하부는 노예화된 비정규직에 의해 지탱된다. 위는 ‘고인 물’이요, 아래는 불안정과 소외가 넘쳐나는 폐허다.

한편 진보 정규직 교수들은 이번 사태에서 ‘검찰개혁 조국지지’ 서명운동을 발의·주도했다. 5000여명의 교수·연구자가 동조했다. 그러나 우리 교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국수호’ 대열의 앞장이 아니라, 깊은 자기반성과 그에 걸맞은 실천이다. 586세대 교수들은 대학에서의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고, 후배들과 젊은 세대로부터 불신당하고 있다. ‘지금 검찰개혁이 중요하다’는 행동을 이끌던 교수들이 ‘다음’엔 노동개혁이나 교육개혁을 위해 이번처럼 열정적으로 직장이나 거리에서 싸울까? 고대해본다. 물론 노동개혁이나 교육개혁이 ‘다음’은 아니다.

수많은 검찰개혁 촛불로써 시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개혁의 잠재력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민의 위대한 힘이 ‘조국수호’가 아니라 ‘조국사태’를 통해 드러난 철옹의 불평등과 계급 ‘캐슬’을 깨는 데 몰아닥치기 희망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과 자기 아이의 평범한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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