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의 시대 넘어 전환의 시대, 새 발상이 필요하다

‘뉴노멀’이라는 말이 회자된 지 오래다. 원래는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상황을 뜻하는 경제 용어였다. 이제 뉴노멀은 팬데믹 위기가 만드는 변화를 칭하는 말로 확장됐다. 위기라는 낱말에는 위협과 기회라는 두 가지 뜻이 숨어 있다.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역량을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 해결의 주체는 명확한가, 얼마나 기민하게 문제를 진단하고 대응하는가, 얼마나 인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가.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코로나19 대응은 한국이 갖고 있는 역량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보여주는 거울 같다. 정부는 질병관리청과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사스와 메르스 대응에서 빛을 발한 광범위한 검사→추적→치료 및 격리라는 3T 메커니즘을 수행하자는 방향성을 잡았다. 의료계의 장비업체들은 곧바로 빠른 진단검사를 수행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했다. ‘우수한 인재들의 프로젝트 몰입을 통한 문제 해결과 생산공정의 최적화’라는 한국 제조업의 문제 해결 방식과 유사하게 의료 인력의 헌신적인 투입을 통해 방역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스크 제작에 어려움을 겪자 제조 대기업 엔지니어들은 마스크 생산업체에 찾아가 공정을 재설계하고 최적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 K방역이 한계에 봉착했다.

제조업이 추격의 한계에 부딪히고 고도화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백신 도입 문제도 유사한 딜레마를 드러낸다. 내연기관 자동차 시장 경쟁이 전기차로 재편되듯, 전염병 상황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는 게임 체인저는 백신이다. 물론 백신을 도입했을 때 양산 공정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구축하는 것은 한국이 잘할 수 있는 일이다. 백신 도입에서 정부는 전통적인 방식의 백신 개발업체와 주로 계약을 협의하고, mRNA라는 새로운 백신 개발 방식을 채택한 업체와의 협의에는 더뎠다. K방역이 잘 작동될 때 백신 투자에 안일했고, 미지의 다른 방식으로 개발된 백신을 고려하는 데 의사결정의 병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드러난 한국의 장단점
‘추격’의 문제였던 방역에 성공
미지의 상황인 백신에서 한계
정치·부동산·사회 문제도 유사
새로운 주체에 새로운 방식 기대

새로운 의제를 만들고 정책들을 조합해 입법과 행정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정치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정부·여당이 제기한 쟁점들이 그렇다. 검찰개혁 의제는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세력과 세력 간의 익숙한 정쟁이 되어 버렸다. 국민 주거의 질을 높이는 부동산 정책은 투기꾼과의 싸움에서 시작해 임대주택 거주자와 주택 보유자·보유 희망자의 싸움으로 전환돼 버렸다. 달라진 것은 여당이 의회 내부의 비토를 고려하지 않고 다수결로 입법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론조사 지지율에 따라 정책 방향이 선회될 수 있다는 것이 일종의 견제장치일 텐데, 뉴노멀 시대에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갈등 조정과 함께 풀어내는 데 한계가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린 뉴딜 같은 장기적 어젠다 대응은 구체화 단계에서 속도가 잘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역사적 기여가 있었다. 우수한 인재들을 ‘갈아 넣어가며’ 물량을 최대한 납기에 맞춰 뽑아내기 위해 자동화 기술과 공정관리 기술을 도입한 산업화로부터 유래해 온 추격형 전략은 자원과 발전된 과학기술이 없고 오직 높은 교육열과 헌신만 믿을 수 있는 개발도상국 한국의 나름의 생존 양식이었다. K방역은 수출과 교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에서 전염병의 초창기 대유행을 막기 위한 일리 있는 대응 방식이었다. 빠르게 ‘적폐’를 설정하고 여론의 지지를 받아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것도 민주화 과정에서 군부독재를 타도한 성공적인 전술 중 하나였다.

다만 지금은 그 이상의 것, 혹은 다른 것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을 따름이다. 유사한 것을 빠르고 싸게 만들던 산업화 방식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없고, 백신 없이 방역을 지금까지 하던 대로 성공할 수 없고, 민주화 게임의 방식으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들 그 동력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기존의 선진국을 추격하던 시기 만들어진 방식들의 시효가 끝나간다. 달리 말해 새로운 방식에 익숙한 새로운 주체들이 필요하고, 새로운 주체들에게 적합한 위치를 더 많이 부여해야 한다.

새로운 방식, 새로운 주체를 호출하면 기존 방식의 파탄을 딛고 넘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새로움이란 것도 기존의 우리 것에서 발생한 새로움인지라 다른 나라의 방식과 같지 않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향한 추격과 적폐 청산의 방식은 파탄났다기보다는 내재적으로 갈무리되어야 한다. 기성세대가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과의 유산 속에서 자라난 다음 세대를 조금만 더 신뢰하고 역할 분담에서 상생을 도모한다면, 그러한 갈무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기의 시대는 그러한 종류의 전환이 필요하고, 강제되는 시대다. 새해에는 추격의 시대에 태어나 이미 선진국 시민으로 살고 있는 새로운 주체들이 전환하는 시대 속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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