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폭행사진 왜 안싣나, 안타깝고 분해서 나섰다”

2008.06.12 09:43

‘촛불지킴이’ 인터넷 사진동호회 250명 시민기자단

무엇이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을 거리로 이끌었는가.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의 배후를 운운했지만, 배후는 바로 온 국민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 직장인에서 자영업자, 여성과 남성, 성별과 연령·직업을 불문한 사람들이 모여 소통을 거부하는 오만한 권력을 매섭게 추궁하고 있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씨가 “과거 시위가 각목과 방패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카메라와 카메라의 싸움”이라고 할만큼 촛불집회 현장에서 카메라는 힘이다. 시민기자단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이민우·유용준·허민우씨. | 박재찬기자

시사평론가 진중권씨가 “과거 시위가 각목과 방패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카메라와 카메라의 싸움”이라고 할만큼 촛불집회 현장에서 카메라는 힘이다. 시민기자단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이민우·유용준·허민우씨. | 박재찬기자

촛불집회가 길어지면서 시민들의 육체적 피로는 쌓여갔지만, 열매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민의 작은 힘이 하나로 뭉치면 잘못된 권력을 무릎 끓릴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실증하기는 어려웠던 교훈이 입증됐다. 과거 군사정권·권위주의 정부를 거치면서 ‘과격함’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뒤집어썼던 장외 집회는 시민들이 즐겁게 참여하는 ‘유쾌한 저항’의 자리로 탈바꿈했다.

‘대안언론’으로서 시민저널리즘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도 성과라고 할 만하다. 촛불집회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나선 아마추어 사진기자들, 인터넷을 통해 촛불집회 생중계를 한 네티즌. 촛불집회를 폭력시위로 왜곡하려 했던 조·중·동 등 주류 언론의 시도는 이들이 발빠르게 인터넷에 올리는 사진과 동영상들로 무너졌다. 그 중심엔 인터넷 사진동호회 ‘SLR클럽(www.slrclub.com)’의 회원 250명이 뭉쳐서 만든 ‘시민기자단’이 있었다. 고등학생부터 50대 후반의 직장인까지 구성원도 다양한 이들은 집회 내내 ‘촛불 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카메라를 들고 처음 거리로 나선 기자단은 촛불집회 현장사진을 실시간으로 커뮤니티 홈페이지에 올렸고, 언론이 놓친 폭력시위 장면들도 포착했다. 경찰의 방패에 맞아 피 흘리고 있는 앳된 소녀의 얼굴을 포착한 ‘애국 소녀’ 사진은 많은 네티즌의 공분을 사는 등 일파만파의 효과를 낳았다.

72시간 릴레이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6일 오후 덕수궁 인근에서 이들을 만났다. 시민기자단의 결성을 처음 제안했던 허민우씨(28·사업)와 이민우(31·회사원)·유용준(49·사업)씨 등이 250명의 기자단을 대표해 인터뷰에 응했다. ‘PRESS 시민 기자단’이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완장을 오른팔에 두르고 있었으며, ‘시민기자단’ 소속임을 알리는 신분증을 달고 있었다. 전날 새벽까지 촛불집회 현장을 지킨 탓인지 약간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시민기자단을 결성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종로구청 옆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야근을 마치고 새벽에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경찰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을 불법 폭행하는 모습을 봤어요. 쇠고기 수입의 찬반 여부를 떠나서, 경찰이 시민을 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면 폭력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지난달 26일 클럽 게시판에 시민기자단이 되자는 의견을 냈어요. 지난달 30일 예비 모임을 거쳐 31일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허민우씨)

“경찰 폭행사진 왜 안싣나, 안타깝고 분해서 나섰다”

“시민기자단에 참여하기 전부터 촛불집회에 나섰습니다. 제가 참여한 시위현장에서 경찰의 강제진압이 있었어요. 언론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신문에 실리는 사진은 없었어요. 그게 안타깝고 분했고, 그런 찰나에 시민기자단을 만들자는 글을 보고 참여했습니다.”(이민우씨)

“전두환 시절에도 시위에 많이 참여했고, 6·10 항쟁 때도 시청 앞 시위대열에 섰습니다. 다시는 그런 꼴을 안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피 흘려 얻은 민주주의 아닙니까. 우리 청년기에 겪었던 암울한 시기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유용준씨)

이들이 첫 활동을 시작한 지난달 31일은 경찰의 강경·폭행 진압이 절정에 달한 날이었다.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직선으로 물 대포를 쏴댔고, 방패와 곤봉을 휘둘렀다. 군홧발에 짓밟힌 여학생, 물대포에 맞아 실명위기에 처한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시민기자단은 이날 16시간 철야근무를 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취재 과정에서 물대포를 맞고, 방패에 찍히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허민우씨는 “경찰들은 시민들을 몰면서 방패로 찍고 휘둘렀고, 저도 발목을 찍혔다”면서 “전경들의 눈을 봤는데, 악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무서웠다”고 했다. 직원 50명을 거느린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유용준씨는 “건설업을 해서 물을 잘 안다. 물대포를 직선으로 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예전 경찰이 진압용으로 사용했던 최루탄이 차라리 물대포보다 덜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첫날부터 고생했지만, 촛불집회가 계속되면서 시민기자단의 영향은 점점 커져갔다.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던 경찰도 시민기자단 완장을 보고 주춤하는 일도 잦아졌다. 카메라를 무서워한 전경들이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시민들의 호응도 커졌다. 이민우씨는 “처음엔 모르는 분이 많았고, 뭐냐고 물으시는 분도 있었다. 지금은 ‘시민기자단이다’라고 하면 길을 터준다”고 했다. 유용준씨는 “사진을 찍으라고 포즈를 취해주는 분들도 계신다”고 말했다.

기자단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처음에 50명에서 시작했지만 곧 120명으로 늘었고, 72시간 릴레이 협상을 앞둔 지난 5일에는 250명이나 됐다. 사람을 더 받을 수 없어서, 모집을 중단했다고 한다. 모임은 커졌지만 별도의 운영진조차 없다. 정부가 배후세력 운운하는 마당에 괜한 오해를 사기 싫다는 게 이유다. 허민우씨는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까지 먹게 생겼는데, 배후세력 뒤집어쓰면 더 열 받는다. 더럽고 치사해서 조직을 안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유용준씨는 “하다 못해 조장이라도 만들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안 만들기도 했다”고 했다. 시민기자단은 허민우씨의 사무실을 간이상황실로 이용하고 있다. 상황실에서 인터넷으로 본 언론사 기사·방송을 통해 경찰과 시민들의 움직임을 포착해 알려주면, 시민기자단은 그에 따라 움직인다.

시민기자단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찍은 ‘애국소녀’ 사진.

시민기자단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찍은 ‘애국소녀’ 사진.

애로 사항도 있다. 직장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생업에 지장을 받고있다고 했다. 허민우씨는 “사무실을 상황실로 쓰다보니 업무가 마비된 적이 있다”면서 “손님이나 제휴사 측 전화를 못 받아서 패널티도 물고 금전적으로 손해를 많이 봤다”고 했다. 이민우씨는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가, 아침에 출근하니까,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면서 “회사 동료들이 같이 못 나가서 미안하다고 배려해 줘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유용준씨는 “크게 지장을 받지는 않는데, 직원들이 퇴근시간쯤이면 ‘안 가세요’라고 묻는다”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생업이야기를 하던 중 화제는 이 대통령의 형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촛불집회 폄훼 발언으로 옮겨졌다. 이 의원은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경제5단체 주최 ‘제18대 국회의원 당선 축하 리셉션’에서 “실직하고 일자리가 없어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과 서민, 어려운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촛불집회에) 참가한 것 같다”고 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민우씨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했고, 허민우씨는 “실직자도 아닌데,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유용준씨는 “내가 중소기업 경영자이지만, 전혀 어렵지 않다. 나보고 실업자라고 하면 곤란하지”라고 했다.

정부가 내놓은 자율규제 해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유씨는 “말장난”이라고 잘랐고, 허씨는 “보궐선거 끝나니 말이 바뀌어 있더라”고 말했다. 이씨는 “근본적인 해결이 하나도 안 됐는데 정부가 정신을 못 차렸다”면서 “국민이 바라는 것은 ‘협상무효’다. 그게 이뤄지기 전까지는 촛불집회는 안 끝난다고 본다”고 했다.

피곤해 보였지만, 시민기자단으로서 보람은 충만해 보였다. 보수언론의 여론조작을 무력화시키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이씨는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내고 형성했던 시대는 지났다. 올바르지 않은 정보로 여론을 만들려는 시도에 국민들은 예전같이 속지 않는다”고 했다. 허씨는 “무분별한 국가권력의 폭력에 대해서 예전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은 일반 시민이 뭉쳐 정부나 웬만한 언론사보다 더 큰 힘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유씨는 “지금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들통이 나게 돼 있다”고 말했다.

사진기자단은 촛불집회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토대로 길거리 사진전을 열 계획도 갖고 있다. 시민의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정부가 ‘촛불집회=폭력시위’로 여론을 호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세 사람 모두 입을 모았다. “촛불집회는 대단하다는 표현 외에 할 말이 없어요.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여론을 무시하고 맘대로 정책을 추진하지는 못할 겁니다. 너희가 잘못하면 국민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지요.”

<이용욱기자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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