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만큼 짜증나는 ‘전력 대책’

2013.08.12 21:45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그렇다. 살아 있다. 헉헉거리며 오늘도 살아 있다. 에어컨 버튼 한 번 누르기가 고민스러운 2013년 한여름에 난 살아 있다. 지금은 좀 잠잠하지만, ‘살아 있네!’라는 부산톤의 명료한 단어는 버라이어티에서 곧잘 들을 수 있는 유행어였다. 유행어는 늘 역설적이다. ‘부자되세요!’라는 끔찍한 인사말을 만들어낸 유행어는 외환위기 이후 빈부격차가 벌어지며 점점 희망 없는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을 웅변했다. 비슷한 의미로 ‘살아 있네!’ 역시 뭔가 애달프고 간절하다. 그런데 정말 이 더운 한반도에서 내가 잘 살아 있는 걸까? 계속 잘 살아 있을까?

미국은 마셜군도의 작은 섬 비키니에서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23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했다. 1954년 3월1일 미국은 비키니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고, 때마침 그 근처에서 조업하던 일본의 원양참치 어선 제5후쿠류마루호는 낙진에 의해 피폭된다. 일본의 도호영화사는 같은 해 11월 <수폭대괴수영화 고지라>를 개봉한다. 바닷속에 잠들어 있는 고지라는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괴물이 되어 깨어난다. 그리고 육지로 올라와 도시를 파괴한다. 쿠아아아앙!

[별별시선]무더위만큼 짜증나는 ‘전력 대책’

<아키라>는 일본의 만화잡지 ‘영매거진’에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연재된 오토모 가쓰히로의 만화다.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실험을 하던 중 소년 28호, 즉 ‘아키라’가 도쿄 대붕괴를 일으킨다. 이후 아키라는 지하에 봉인되지만 폭주족 패거리 데쓰오에 의해 부활하고 결국 네오도쿄도 대붕괴를 맞이한다.

영화 <고지라>나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아키라> 모두 일본의 피폭경험에 냉정시대의 군비경쟁 등에 의한 공포감에 의해 태어났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배경을 갖고 태어난 만화가 있는데, 1980년대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보유에 대한 공포를 근거로 핵전쟁 후 인류가 멸망한 뒤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 ‘핵충’을 그린 신기활 작가의 <핵충이 나타났다>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원자력 괴수나 도시 대붕괴와 같은 종말의 공포는 ‘실수로 버튼 누르기’ 같은 오래된 구식 영화에서나 나오는 고전적 상상력으로 실존하는 공포와는 결이 달랐다. 원자력이 34%의 전기수요를 담당하고 있어도, 그들의 홍보처럼 ‘값싸고,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적은 에너지원’이니까 원자력 발전소도 깨끗하고 안전하게 잘 관리되고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2024년까지 전기발전비중을 48%로 높이겠다는 계획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후쿠시마에서 원전이 정지됐어도, 막연히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원전은 녹색성장의 원동력답게, 멀리 아랍에미리트연합에도 수출되는 자랑스러운 메이드 인 코리아니까 멀쩡하리라고 생각했다. 방사능이 바다로 줄줄 새는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당연히 도심 하나가 전부 폭발할 가능성 역시 마찬가지다. 다들 발전된 기술은 안전을 가져온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뻔뻔함도 함께 커졌다. 일본의 도쿄전력은 매일 300t씩 고농도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가는데도 감추기에 급급했다. 우리나라의 한국수력원자력은 뇌물을 받고 시험성적을 위조해 불량부품을 납품받았다. 그 자랑스러운 원전 수출도 하나씩 로비와 같은 불법들이 드러나고 있다. 후쿠시마 앞바다, 좀 더 정확하게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고농도 방사능 오염수는 막을 길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는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8월에 강제단전을 이야기하며 국민들을 협박하기에 급급하다. 원전 마피아라 불리는 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안도 없어 보이고, 제대로 된 보도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정도 사태라면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고지라가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고, 불량부품으로 원전이 폭파해 도심 대붕괴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고지라>나 <아키라>가 영화나 만화의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된 2013년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후쿠시마 발전소의 고농도 오염수 누출이나, 한수원의 뇌물사태와 불량부품으로 인한 원전가동중단사건에 대해 원전 괴수의 탄생이나 도시 대붕괴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대구, 명태, 고등어 같은 생선을 먹을 때마다 진지하게 내부피폭을 고민하는 일은 정말 짜증난다. 올 초 아열대 한반도의 여름을 이겨내기 위해 할부로 구입한 에어컨을 가동할 때마다, 전기 누진세를 고민해야 하는 것도 불쾌지수 상승에 기여한다. 하물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방학숙제에 전기사용량이 기록되는 것도, 또 그 이유가 ‘북극곰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 역시 웃기면서 짜증난다. 기업이 아닌 일반 가구가 OECD 국가들의 평균사용량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전기를 사용하면서도, 절전 절전 지겹게 들어야 하는, 도대체 누가 이렇게 내 삶을 이리 짜증나고 불편하게 만들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짜증과 불편의 정확한 원인들을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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