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지금 혁명에 참여하는 방법

2016.04.25 21:26 입력 2016.04.25 21:29 수정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빌어먹을, 또.’ 옥시(옥시레킷벤키저)가 사람이 죽어나간 게 자사의 가습기 소독제 때문이 아니라 봄철 황사 때문이라는 의견서를 검찰에 제출했다는 기사를 읽다가 훅 한숨이 나왔다. “김앤장의 자문을 받아”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지금 혁명에 참여하는 방법

몇해 전 일이 떠올랐다. 낯모르는 고등학교 후배 몇이 불쑥 찾아왔다. 유유상종이라, 차례로 자기 소개를 하는데, 다들 주류 사회에서 행세하는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친구가 죄라도 지은 듯, 명함을 건네며 유난히 겸연쩍어했다. 김앤장 변호사였다. 어디서고 대접받는 게 습관이 되었을 텐데, 다른 생각 하는 선배 앞이라고 그러는 게 밉지 않아서 “밥벌이가 거기서 거기지 뭘 그래” 하고 말았다. 오버였다. 거기서 거기가 아닌 밥벌이, 끔찍한 밥벌이가 있다.

세상이 어떤가를 아는 가장 정확한 방법 중 하나는 가장 머리 좋은 청년들이 어떤 밥벌이에 몰리는가를 보는 것이다. 1980년대는 그런 청년들이 변혁운동에 투신했다. 변혁운동은 밥벌이가 아니다. 그러나 밥벌이를 작파하고 다른 가치에 투신하는 게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 청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기분이 켕기긴 하지만, 어쨌거나 80년대는 변혁의 세상이었다는 뜻이다. 근래 머리 좋은 청년들은 어떤 밥벌이에 몰리는가. 가장 머리 좋은 청년들은 이미 충분히 양극화한 세상에서 1%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1%의 악행을 덮는 이런저런 밥벌이를 선호한다. 김앤장 같은 대형로펌을 비롯, 유수의 투자(투기), 유수의 금융, 유수의 컨설팅 따위 이름이 붙은 밥벌이들이다. 근래 세상은 변혁이 불가능한 세상, 1%가 완전히 틀어쥔 세상이라는 뜻이다.

선거 즈음 야당의 외부 영입인사 면면도 세상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게다. 예전엔 ‘재야파’라 불리는, 밥벌이를 작파하고 운동에 투신해 이력을 쌓은 사람들이 일순위였다. 대중이 그런 사람들을 신뢰했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야당다운 야당’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래는 밥벌이에 성공한 사람들, 기업에서 이력을 쌓은 사람들이 일순위다. 대중도 그런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능력있는 야당’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야, 상하 구분없는 온전한 자본의 세상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지난 총선 결과도 마냥 상찬되긴 어렵다. 자본의 세상에 녹아나는 사람들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자본에 기생하는 정당들 사이에서 표를 이동했을 뿐이니 말이다. 자본의 세상에 이견을 표시하는 대안정당들은 오히려 쪼그라들었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지금 혁명에 참여하는 방법

누가 부인할까. 밥벌이가 어려운 세상이다. 그런데 밥벌이가 어려운 세상이 주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굶어 죽을 걱정인가.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밥벌이의 비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비 능력의 비교가 자아내는 고통이다. 밥벌이가 어려운 세상이 주는 가장 큰 문제는 밥벌이 자체가 아니라, 밥벌이 외엔 생각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밥벌이 외엔 생각할 줄 모르니, 1%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물론, 앞서 열거한 밥벌이들도 사회적으로는 욕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자식이나 인척이 그런 밥벌이를 한다는 걸 심각하게 불편해하는 일은 거의 없다.)

부러움은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부러움보다 강력한 복종은 없다. 1%를 부러워하는 나는 1%가 정해주는 질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1%가 내 밥을 앗아가는 일은 갈수록 더 용이해지며, 내 밥벌이는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나와 1% 사이에서, 1%의 기득권을 수호하며 기생하는 9%(여야 정치인, 보수 진보 지식인, 보수 진보 언론, 관료 등)의 밥벌이만 안정을 구가한다. 남보다 더 ‘노오력’한다고 해서 혼자 예외가 되거나 벗어날 순 없다. 내가 복종하는 체제에서 내가 해방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9%에 대한 취향의 이동, 내 면전에 땅콩을 던지며 욕하거나 운전하는 나를 때리는 1%에게 ‘매너를 갖추어 달라’ 항의하는 것 정도다. 이 체제를 깨뜨리는 것 말곤 벗어날 방법이 없다.

다들 밥벌이를 작파하고 혁명에 투신해야 할까. 모든 사람이 전업적 혁명가로 살 순 없는 노릇이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혁명에 참여하면 된다. 지금 당장 혁명에 참여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불복종, 복종의 철회다. 복종이 부러움에서 나오니, 자기 최면이나 마인드 컨트롤로 부러움을 조작하자는 게 아니다. 부러움의 원인을 없애야 한다. 인생에서 밥벌이 외엔 생각하지 않는 것, 남의 밥벌이와 비교로 내 가치를 평가하는 것 말이다. 밥벌이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인생에는 밥벌이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걸 기억하는 것이다. 대단한 이념도 특별한 실천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로 나는 혁명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이 체제는 금이 갈 수 있다. 흔히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이 체제는 노골적인 폭력이나 고문, 살해, 투옥이 아니라, 수많은 내면적 복종으로 유지되는 투명한 유리성이다. 내가 내 인생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금이 가고 깨뜨려진다. 그런데 그 간단한 일이 그리 어렵다.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간단해 보여도 혁명은 혁명이라는 것, 우리 인생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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