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이제까지의 시를 넘어 새로운 시로…온몸으로 꿈꿨던 김수영

2016.12.13 21:38 입력 2016.12.13 21:42 수정
방민호 |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김수영의 ‘온몸시론’, 무엇을 말했나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담았던 시인 김수영.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담았던 시인 김수영.

혁명의 계절이다. 김수영(1921~1968) 일을 말하기 좋은 때다. 그를 가리켜 혁명의 시인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누구던가?

그에 관해 말할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동어반복, 이구동성, 대동소이에 빠지지 않도록. 너무 반복적으로 논의해 왔기에. 그를 신의 자리, 영웅의 자리에 올리려는 시도는 너무 많았고, 다른 면모, 다른 표정을 밝히려는 시도는 너무 적었기에.

김수영은 시론이 뛰어난 시인이다. 작은 산문에서조차 날카로운 시적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특별히 아끼게 된 문장 하나, “모든 사물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로부터 볼 때, 모든 사태는 행동이 되고, 내가 되고, 기쁨이 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ㅡ동기ㅡ로부터 본다.ㅡ이것이 나의 새봄의 담배갑에 적은 새 메모다.”(‘생활의 극복’ 중에서)

김수영 시인을 통해 소시민성을 그린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의 포스터.

김수영 시인을 통해 소시민성을 그린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의 포스터.

그는 또 누구나 사랑할 만한 성찰적 문장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모기와 개미’ 중에서)

어떤가. 우리는 과연 지식인이라 할 만한가. 우리는 도스토옙스키가 <까라마조프의 형제>에서 말한 보편적이고도 뜨거운 인류애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해 본 적이 있는가?

그는 시를 쓰면서 세상을 염려하고 그만큼 똑바로 보려 노력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그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애통해하고 그가 남긴 유묵들을 알뜰히 거두려 노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여, 침을 뱉어라’다.

참여문학의 경전처럼 떠받들어진 이 산문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구절을 여기 인용해 본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지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시여, 침을 뱉어라’, ‘창작과비평’, 1968년 가을호, 411쪽)

사실을 말하자면, 이 인용 부분에서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부터 “말을 바꾸어 하자면”까지의 두 문장 및 어구는 거의 늘 생략되며, 그다음부터가 애용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로써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생략된 부분과 애용되는 부분 사이의 관계는 주문장과 부차적 문장의 그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김수영의 명문을, 줄곧 주제 문장을 젖혀놓고 부차적 문장들만 가지고 ‘즐겨찾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럴까?

하나는, 우리가 즐겨 찾는 부분이 워낙 멋스럽고 한결 시적이기 때문이다. 시 쓰기를 머리로도 심장으로도 하지 말고 온몸으로 하라는 ‘명령’을 접할 때 세상에 대해 강렬한 의무감을 품은 지식인들, 청년들의 가슴은 떨린다, 격동된다.

다른 하나는, 안타깝게도 그의 짧지만 난해한 시론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 때문이다. 사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정밀하게 독해되지 못해 왔고, 독해 이전에 감성적, 감상적으로 수용되었고, 무비판적으로 전승되어 왔다. 이 길지 않은 텍스트에 대한 사랑은 너무 뜨거운 반면, 그에 대한 지적 접근은 너무 게을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하니, 마치 스크럼을 짜고 어깨를 곁고 나아가는 듯한 이미지에 압도된 나머지 지력을 작동시키기도 전에 이미 그것을 참여문학, 앙가주망의 교본으로 수용할 태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인용부분의, 흔히 생략되거나 간과되는 주제 문장 부분은 흔히 생각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 부분을 다시 읽어보자.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지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다음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의 다음이란 말인가. “여지까지의 시의” 다음이다. 이제까지 쓰던 것과 다른, 다음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지녀왔던 시에 대한 생각을 모조리 파산시켜야 한다, 곧 완전히, 송두리째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그 이전까지의 시의 어떤 그림자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시는 머리로도, 심장으로도 쓰는 것이 아니요,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성곤·방민호의 현대문학 명장면 20] (11)이제까지의 시를 넘어 새로운 시로…온몸으로 꿈꿨던 김수영

유작시가 된 ‘풀’이 김수영에 있어 바로 그러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시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에 나타나는 풀은 김수영의 이전의 시들에 나타나는 물상들, 사물들과 달리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풀이 아니요, 살아 움직이는 존재, 자기 생명을 스스로 자각하고 느끼는 구체적인 생명적 존재로서의 풀이다. ‘풀’이 김수영의 시들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심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한 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김수영에게 있어 그렇게 이제까지의 시에 대한, 세상에 대한 생각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순간이 있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김수영의 6·25 전쟁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잊어버린 그의 절체절명의 시간을 상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포로수용소 얘기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김수영은 6·25 때 피란을 가지 못했다. 월북했던 좌익 문학인 임화가 함락된 서울에 나타나 해방공간 때의 문학가동맹 간판을 종로2가 한청빌딩에 다시 내걸었다. ‘잔류’ 문학인들은 혹은 살기 위해 혹은 소식이라도 얻기 위해 그곳에 나갔고, 풋내기 시인에 불과했던 김수영도 그렇게 했다.

물론 좌익 사상가 임화에 대한 관심도 동기의 하나였으리라 추측된다. 김수영은 임화와 꼭 같이 종로가 고향이고, 연극에 심취했으며, 좌익 사상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에 따르면 김수영은 한청빌딩에 나가 교양강좌도 듣고 노래도 배웠고 문화공작대에 자원하라니 안성으로 가겠다고 신청도 했다. 그러나 뒤바뀌는 전세 속에서 김수영을 비롯한 문인들은 의용군으로 편성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북으로, 북으로 올라간 그들의 ‘고난의 행군’이 멈춘 곳이 바로 평안남도 개천, 그곳에서 그들은 무지한 소년병들에게 모진 대우를 받으며 훈련을 받고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군대와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길 수 없는 전투 대열에서 이탈하여 무기와 군복을 버리고 달아나던 김수영은, 그러나 북한 내무성 부대에 체포되고 만다. 이 대목을 시에서 김수영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 동지들에게’ 중에서)

방민호 |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방민호 |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이 ‘임사체험’이 김수영 시의 전개에서 지극히 중요한 국면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김수영 연구에서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인민군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서울에서 이쪽 편에 체포된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버렸다. 이후 김수영은 일종의 ‘부역자’로서 살벌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했다. 그가 4·19 혁명에 그토록 열광한 것, 5·16 쿠데타에 그렇게 벌벌 떨며 김이석의 집에 숨어든 것, 그리고 그가 번역이라는 직업을 빌려 해빙기 이후의 소비에트 사정에 관심을 쏟고, 마침내 ‘전향기’(1962)라는 시를 써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도 이 임사체험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6·25 전쟁 중에 겪은 사회주의는 그에게 죽음을 의미했다. 그 때문에 그는 비록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유토피아를 향한 동경을 품었을 수 있었음에도 끝내 ‘전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시를 정치적 참여의 차원에서 건져 올려야 했다.

그리하여 비록 그는 죽음 직전에 이어령과 논쟁하면서 자기의 책상 서랍 속에는 발표하지 못하는 불온시가 있노라고 강변하기는 했지만, 그 순간에 그의 시는 이미 변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시를 모조리 파산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시를 향해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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