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자체를 피한다” 미투 대응 ‘펜스 룰’, 또 다른 차별

2018.03.08 17:00 입력 2018.03.08 22:13 수정

세계여성의날인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8 세계여성의날 조기퇴근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이 성별 임금 격차에 항의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위 사진).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미투 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상징하는 하얀 장미를 건네고 있다(가운데). 서울 동국대 본관 앞에서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학교의 구조조정 방침에 반대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연합뉴스

세계여성의날인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8 세계여성의날 조기퇴근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이 성별 임금 격차에 항의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위 사진).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미투 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상징하는 하얀 장미를 건네고 있다(가운데). 서울 동국대 본관 앞에서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학교의 구조조정 방침에 반대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연합뉴스

우리 사회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확산되면서 남성 직장인들 사이에서 여성들과의 교류와 접촉을 피하는 이른바 ‘펜스 룰(Pence rule)’이 직장 내 성폭력 예방 조치로 거론되고 있다. 직장 생활 등에서 성폭력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아예 여성 직장 동료들과의 만남 자체를 피하자는 것이다.

성폭력 가해를 조심하려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라는 평가도 있지만, 성폭력을 유발하는 남성 중심적인 위계 질서의 본질은 외면한 채 여성에 대한 차별만 강화시키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의 한 은행 지점에서 근무하는 이모씨(39)는 8일 “최근 남자 직원들 사이에 ‘미투 조심하자’며 여직원과의 접촉 자체를 피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미투 운동 이후 이 은행에서는 남녀 직원이 함께하는 회식 대부분이 취소됐다. 남성 상사들은 여성 부하 직원과 대면하는 대신 전화나 메신저를 이용해 업무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서울 소재 대기업에 다니는 ㄱ씨(30)는 “남성 임원들이 파견직 여직원에게 ‘미투 때문에 함께 술은 못하겠다’고 말한다”며 “회식 때 자주 가던 노래방도 금기문화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펜스 룰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펜스 룰이란 구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아내 외의 여자와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웠다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발언에서 유래한 용어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여직원에게) 지시나 전달은 문자나 e메일로 한다” “웬만하면 여자를 채용하지 않는다” 등 펜스 룰의 구체적인 실행 방식이 게시되고 있다.

많은 여성들은 이 같은 펜스 룰이 성차별적인 조직문화를 심화시킬 뿐이라고 반박한다. 여성 직장인 박모씨(33)는 “10m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부장님이 전과 달리 전화나 카카오톡으로 업무 지시를 하는 걸 보면 헛웃음만 나온다”고 말했다. 최모씨(27)는 “임원급으로 올라갈수록 남성이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과의 업무상 교류가 차단된다면 여성 직원들은 불이익이 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펜스 룰이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전가시키는 논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성폭력 예방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윤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성폭력의 원인은 여성이 남성의 성욕을 유발하기 때문이며, 성폭력 피해 고발은 예민한 여성들의 과도한 반응인 경우가 많다’는 남성 중심적인 생각이 펜스 룰의 논리”라고 설명했다. 이어 “펜스 룰은 성폭력을 막는 조치가 아니라 남성들이 성폭력 가해자로서 고발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방어기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펜스 룰을 미투 운동에 대한 반대행동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근 “지킨 자만이 살아男는다”는 부제를 단 ‘펜스 룰’이라는 만화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연애 상대인 여성과 매번 ‘스킨십 합의 계약서’를 작성해야 향후 남성이 허위로 성폭력 고발을 당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펜스 룰은 남성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미투의 물결 속에서 이제 막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을 따돌리고 조롱하는 운동”이라면서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위계적인 조직문화를 상호 소통적으로 만들려는 미투 운동에 대한 반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