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 판결에 노동자는 없었다

2015.07.05 22:32 입력 2015.07.06 15:01 수정
강진구 노동전문기자(공인노무사)

대법원 노동 판례 첫 전수조사… 25년간의 ‘노동 잔혹사’

▲ 쟁의행위 85%에 “불법” 판결
정리해고 71%엔 “정당하다”
90년대 고용유연화 정책 이후
사법부 ‘친사용자 성향’ 가속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감시카메라가 신경이 쓰여 죽겠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는 법도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2014년 7월18일)

“헌법에 보장된 노조활동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정부는 기업 편에 서서 편파적인 관리감독을 하고 있다.”(2014년 9월1일)

포스코 사내하청업체 이지테크의 유일한 금속노조 조합원이자 분회장인 양우권씨가 지난 5월 목숨을 끊은 후 공개된 일기장 내용이다. 이지테크는 박근혜 대통령 동생인 박지만씨가 회장으로 있는 그룹의 계열사다. 양 분회장은 노조를 결성한 뒤 감봉-대기발령-정직(2차례)-해고(2차례)에 시달리다 지난해 5월 복직 결정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이 기다리는 현장에 가지 못하고 감시카메라가 달린 책상 앞에서 1년 가까이 ‘섬’처럼 지내다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노동3권을 누리지 못한 양씨의 죽음에 대해 노동계는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은 기업과 사용자 보호에 급급한 노동부·사법부가 함께 만든 사회적 타살’이라 주장하고 있다. 특히 대법원의 사용자 편향 판결이 줄이어 사법 정의에 대한 기대가 약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저항과 선택도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1990년부터 올 2월까지 25년간 정리해고·쟁의행위와 관련된 대법원 판례를 수집해 ‘노동자의 벗’ 12·14기 노무사들과 함께 지난 3~6월 4개월간 전수 분석을 진행했다. 대법원의 정리해고·쟁의행위 판례를 전수 분석한 것은 처음이다.

대법원에서 25년간 쟁의행위 노동사건을 판결한 408건 중 파업 정당성을 인정한 것은 59건(14.5%)이고 349건(85.5%)은 불법 판정이 내려졌다. 반면 경영상 위기로 인한 138개 정리해고 사건 중 ‘해고 무효’는 41건(29.7%), ‘해고 정당’ 판정은 97건(71.3%)으로 집계됐다.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한 정리해고 사건 20건 중 15건(75%)은 ‘사용자에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정부가 고용유연화 정책을 펴면서 노동조합의 교섭을 약화시키는 데 중점을 뒀고 법원이 적극적으로 정부 정책에 맞춰 판례 법리를 변경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대법원의 친사용자 판례 성향은 전원합의체 판결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법무법인 시민의 김선수 변호사가 노동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20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기존 판례 입장이 변경된 경우는 3건, 다수의견이나 전원일치 의견이 노동자에게 유리한 경우는 2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15건은 모두 노동자에게 불리한 판례였다. 노동자에게 불리한 대표적 판례 변경으로는 ‘(노동자) 동의를 거치지 않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효력 인정’(1992년), ‘쟁의행위 기간 중 무노동 무임금 적용’(1995년) 등이다. 김 변호사는 “대법원이 노동자의 단체행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노동자 보호 기준은 완화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변경해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발레오전장 기업노조가 조직형태 변경을 통해 금속노조를 탈퇴한 사건을 두고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재판을 진행키로 하고 공개변론을 연 데 대해 노동계가 ‘기대’보다는 ‘우려’를 나타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불법파견이나 정리해고 무효 소송으로 보내고도 대법원이 1·2심 결과를 뒤집으면서 빚더미만 떠안게 된 KTX 여승무원이나 콜텍 해고 노동자 사례는 다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법원에 가면 패가망신한다’는 고정관념을 뿌리 내리게 하고 있다.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소속 허윤진 노무사는 “불법적인 포괄임금계약은 소송으로 가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근로감독관들이 ‘우리는 결정을 못하겠으니 법원으로 가라’고 얘기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포기한다”고 말했다.

노동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누구를 위한 노동법인지 모르겠다’는 자조가 나오고 있다. 노동부가 ‘노동자 동의 없이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을 허용하는’ 방침을 밝힌 지난달 27일 안산시 비정규직노동자센터에서 노동3권 강의를 듣던 노동자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한 30대 주부 노동자는 “회사에서 얼마 전에 일방적으로 상벌 규정을 만들었는데 직원들에게 아무런 동의 절차가 없었다”며 “노조 만들면 찍힐 게 뻔한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대로 서울 강남에서 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는 ㄱ노무사(33)는 “지난해 1월 서울고법이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에서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을 부인하면서 구조조정을 준비 중인 기업들이 상당히 긴장했는데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하면서 ‘그럼 그렇지’하며 다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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