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허상’의 가면벗고…

2003.06.20 17:59

-김채원씨 ‘환’완결편 ‘가을의…’선보여-

10년만에 ‘허상’의 가면벗고…

작가가 10년이 넘도록 천착해온 ‘환’의 사전적 의미는 ‘변하다, 미혹하다, 홀리게 하다, 허깨비’인데 김채원 소설에서 이것은 “삶과 존재의 실체 없음, 불확실성, 비고정성, 무정형성 등을 의미”(문학평론가 김수이씨)한다. 삶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신의 타자가 된다. 작가는 “나와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한다”(작가의 말)고 말한다. 이런 자기소외 때문에 삶은 몽롱하고 흔들리고 부서진 것이 되며, 때로는 그것마저 실제감을 잃어버린 환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타인과의 관계맺기 역시 불모와 불가능, 변질로 끝나기 십상이다. 자아의 정체성이든, 타자와의 관계든 거기에는 ‘환’이 깃들여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환 자체가 생생함이나 견고함과 더불어 삶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나아가 능동적인 에너지임을 믿는다.

신작 ‘가을의 환’은 10년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은 채 전화로만 상대방을 알아온 중년의 여자소설가와 스무살 연하의 남자 이야기다. 화자인 소설가 ‘나’는 ‘너’와 너무 다르다. ‘나’는 굳건한 일상의 틀을 지키면서 글쓰기로 숨통을 틔우지만 ‘너’는 매일밤 카페를 드나들고 여자친구를 바꾸는 것으로 삶이 부여하는 의무를 지탱해 나간다. 그러나 자신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고 그 이미지의 압박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두 사람을 묶어준다.

‘나’와 ‘너’는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한번도 만나지 않는다. 형상이 유발하는 선입관과 현혹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10년만에 만나기로 결정한 두 사람은 각자 가면을 쓴 채 나타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현실의 가면을 벗기 위해 진짜 가면을 쓴 두 사람은 어느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뒤엉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육체를 통한 전존재의 카니발을 펼친다.

‘우리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다. 문득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 너는 내 몸에 황금 폭포수를 쏟아붓고 있었다. 황금 폭포수는 내 머리에 이마에 가슴에 다리에 그리고 내 입 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대를 의식하지 않은 나-나라고 규정짓던 것이 아닌 온전한 나-속에 잠겨 있을 수 있었다’. 여기서 황금 폭포수란 다름 아닌 오줌이다. 그 순간 ‘너’의 등 뒤에는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나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젖은 옷을 확인해야 할 만큼 유별났던 정사의 실제성을 의심한다. 그러나 마약을 먹은 채 시멘트벤치에서 애벌레처럼 뒹굴던 ‘너’의 존재가 나비로 전환됐듯이 ‘나’도 너로 인해 비로소 꿈을 꾸는 경험을 한다.

사계절의 ‘환’은 내용적 연관이 없을 뿐더러 계절과도 상관없다. “환의 다양성을 응집한 수사학적 기표이자 삶의 모호함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욕망”(김수이씨)일 뿐이다. ‘겨울의 환’은 자아에 눈뜨기 시작한 중년여자를 통해 여성의 운명과 정체성을 그렸으며 ‘봄의 환’은 서로를 모르는 남녀가 존재의 본질을 찾아헤매되 바로 옆의 타인과 감응하지 못하는 단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름의 환’은 상반된 삶을 살아온 육촌자매의 수다와 고백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

/한윤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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