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 아들 장호권씨의 기구한 인생

2008.01.23 15:27

그의 이름은 장호권(59)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장준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이 호칭은 그에게 명예나 영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갑자(甲子)를 짊어졌고 앞으로도 지고 가야 할 ‘부담스러운 책무’였다. 아버지 때문에 장씨는 27년간 해외도피 생활을 해야 했고 장씨를 포함한 5남매는 국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2003년에야 국내로 돌아온 장씨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상계 복간에 매진해왔다.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호원씨는 아버지를 3인칭 ‘장선생’으로 불렀다. 보증금 700만원에 월세 40만원 짜리 집 벽에 걸린 부친의 사진 밑 빛바랜 쇼파에 앉아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털어놨다. /김세구 선임기자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호원씨는 아버지를 3인칭 ‘장선생’으로 불렀다. 보증금 700만원에 월세 40만원 짜리 집 벽에 걸린 부친의 사진 밑 빛바랜 쇼파에 앉아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털어놨다. /김세구 선임기자

한동안 소식이 뜸하던 중 올해초 장씨가 사기죄로 기소되어 법원으로부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는 언론보도에 대해 “경위가 어찌됐든 장선생을 뵐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버지를 장선생이라 불렀다. 자상한 아버지라기보다는 인생을 가르쳐준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장준하의 그늘 아래 있었다.

독립투사의 아들이 어쩌다 ‘사기꾼’으로 전락하게 된 것일까. 장씨를 만나기 위해 그가 사는 서울 일원동의 아파트를 찾았다. 서울 SH공사(구 도시개발공사)가 지은 시영아파트였다. 집안이 허름하다고 물으니 “보증금 700만원, 월세 40만원에 살고 있다”며 쑥스러워했다. 집안이 왠지 눈에 익었다. 생각해보니 지난해 8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이곳을 찾아 장선생의 부인인 김희숙 여사(82)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가 됐다. 마침 외출하려는 김여사는 기자에게 조용히 인사를 했다. 장씨는 “어머니가 시간만 나면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고 말했다.

근황을 묻자 장씨는 “3년째 한국사회에 적응 중”이라고 입을 뗐다. 27년 만에 돌아온 한국사회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투쟁을 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고인이 됐고, 유신체제에 항거하던 인물들은 이미 역사의 주무대에서 퇴장했다.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했으나 실망스러운 소식만 들렸고 사상계를 복간하겠다는 뜻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사기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정신적 구심점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비영리 공익잡지인 사상계를 복간하겠다고 마음 먹었죠. 그런데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말리더라고요. 지금 같은 상황에 사상계 같은 잡지가 팔리겠냐고요. 몇몇 사람들이 장선생의 유지를 이어받겠다며 접근했지만 돈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떨어져 나갔죠.”

2005년 잡지 사상계를 창간하기 전단계로 ‘인터넷 사상계’를 만들었고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싱가포르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지인 최모씨가 도움을 주겠다고 찾아왔다. 최씨의 재정적 도움으로 사상계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떠났고 그가 투자했던 돈은 고스란히 채무가 됐다.

“돈을 갚지 못하니까 그 친구의 표정이 금세 바뀌더라고요. 그러던 중 최씨가 ‘자신의 친구 딸을 교사로 임용시켜주면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제안을 했어요. 모 사립학교재단 인사를 소개시켜줬지요. 최씨와 학교재단 인사간에 수천만원이 오갔더군요. 하지만 그 여학생은 교사 임용이 안됐고 최씨는 저를 사기죄로 고소했어요. 검찰에서는 알선수재에 해당된다고 얘기하더군요. 사상계로 생긴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 보려고 했던건데….” 장씨는 장선생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항소할 계획이다.

장씨의 인생은 그의 아버지만큼 파란만장했다. 1975년 8월17일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뒤 장남인 장씨는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유신정권은 그런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76년 4월19일, 백기완 선생이 운영하는 백범사상연구소에 들러 아버지의 죽음을 밝혀달라는 성명서를 작성했다. 그를 24시간 감시하던 보안사 직원들은 장씨에게 “쓸데 없는 짓 하고 다니지 말라”며 경고를 했다. 하지만 장씨는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날 밤 11시쯤 얼굴을 알 수 없는 4명의 남자들에게 끌려갔다. “너무 까불고 다닌다”는 말과 함께 고무장갑을 낀 주먹이 날아왔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장씨는 기어서 병원에 갔다. 턱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8시간의 대수술 끝에 간신히 살아났다. 현재 장씨의 턱은 백금으로 이어져 있다.

“3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졌고 말을 하기 위해 6개월 동안 재활운동을 했어요. 턱을 때린 것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죠. 장선생도 죽였는데 저같은 거야 어떻게 못하겠습니까. ‘잘못하면 죽겠구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무조건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씨는 결혼한지 2년된 아내와 함께 말레이시아로 야반도주했다. 말레이시아를 택한 이유는 당시엔 입국비자가 필요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장씨는 그곳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다. 그렇게 6년을 살았다.

1980년, 서울에 봄이 왔다. 장준하 선생의 평생 라이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총탄에 쓰러졌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박정희와 무관한 정부이니 신변에 위험은 없겠구나”라고 생각한 장씨는 8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건 장씨의 오산이었다.

장씨는 안기부에 체포돼 끌려갔다. 장씨가 알고 지내던 저항인사 및 운동권 학생들의 은신처를 모두 불라며 고문이 계속됐다.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잔꾀를 썼어요. 전북 군산에 친한 후배가 숨어 있는데 당시 저의 상황을 편지로 미리 알려줬지요. 그리고 군산에 가면 수배중인 학생을 잡을 수 있다고 안기부에 귀띔을 해줬지요. 현장을 급습했을 때는 이미 학생들은 자리를 뜬 상태였고요.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감시가 느슨해지더군요. 그 틈을 타서 다시 도주했지요.”

이번엔 싱가포르로 도주했다. 두 딸과 아내 모두 한국에 남겨두고서. 가족들에게는 정부 감시의 눈길이 끊이지 않았고 여권조차 나오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92년, 10년 만에 싱가포르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장씨에겐 4명의 동생이 있다. 그들의 인생 또한 장씨와 다를 바 없었다. 둘째 남동생은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를 하다가 쫓겨났고, 정부의 감시 때문에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았다. 셋째 여동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20여년을 불법체류하며 살다 지난해 영주권을 받았다. 넷째 여동생은 제주도로 시집을 갔고 막내 남동생은 미국에서 목회자로 살고 있다.

“장선생이 죽고 나서 31년 동안 5남매가 한자리에 모여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은 모여야죠.”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앞서 평소 알고 지내던 한나라당 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박근혜 전 대표가 화해를 하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장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점인데 직접 만나면 박근혜씨에게 면죄부를 주는 모양이 되잖아요. 인간 장호권이 아니라 장준하의 아들로서 만나는 것인데요. 그동안 제가 이어왔던 장선생의 유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어요.”

이후 수차례 더 연락이 왔다. 장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진정으로 사과하고 과거사에 대해서 조사하겠다는 약속이 오갔다. 결국 장씨는 박전대표의 방문을 허락했다. 대신 자신은 집을 비우고 어머니를 만나는 조건이었다. 박전대표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그 약속을 번복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시대적 화합을 위해서라도 박근혜씨의 용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박근혜씨가 왔다 간 뒤 여론을 보니 5대 5 정도로 찬반이 엇갈리더군요. 옛날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상황입니다. 박씨의 입장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개인 박근혜씨가 장선생이 추구했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헌신한다고 해도 저는 박근혜씨와 건설적인 경쟁자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그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과거사정리 작업의 중단이 아쉽다고 말했다. 장씨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덮자고 얘기하는데 그건 안될 말”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불행한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군부독재하의 과거사를 명명백백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상은 밝히되 처벌은 하지 말자는 게 저의 생각이에요. 제가 존경하는 우장춘 박사의 경우도 부친이 친일을 했지만 조국을 위해 헌신을 했잖아요. 친일파 후손이나 독재정권의 수하라고 손가락질할 게 아니라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줬으면 합니다. 그 시작은 과거사를 밝히는 것이고요.”

“지금 시대에 사상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냐. 집착이 심한 것 아니냐”고 섭섭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장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장준하라는 업보를 벗으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시대가 변했지만 여전히 국민들은 혼돈 속에서 살고 있어요. 60~70년대 사상계가 시대의 등불이 됐듯이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봐요. 사상계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으면 미련없이 손을 뗄 겁니다. 그리고 장준하의 아들이 아닌 인간 장호권으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장씨는 사상계를 중용의 도를 지키는 잡지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보·보수의 갈등과 가치관의 대립 속에서 희망을 찾고, 4대 강국 사이에 낀 한민족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싶어했다.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진보·보수의 인물을 섭외해 그들의 글이 사회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시대는 ‘화끈한’ 것을 원한다. 그가 만들 사상계가 정말 시대의 등불이 될까, 아니면 회색의 중도 민족주의 잡지가 될까. 사상계 복간이라는 임무의 앞날이 그리 밝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장준하라는 ‘무거운 짐’을 평생 내려놓지 못할 거 같다.

◇장준하와 사상계?

1915년에 태어난 장준하의 인생은 그야말로 ‘투사의 길’이었다. 24살때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6000리를 걸어 충칭 임시정부에 도달해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53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창간해 독재에 항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장준하는 75년 등산길에서 의문의 사고사를 당했다.

사상계는 독재와 정치부패를 비판하며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60년대 정기구독자가 1만6000명에 이르렀다. 당시 지식인과 대학생의 필독서였다. 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폐간처분을 받았다.

〈글 김준일·사진 김세구선임기자 ant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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