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과 <더 지니어스>, 공정한 경쟁이라는 허구의 세계

2021.06.04 16:23 입력 2021.06.04 23:21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패자에게도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 공정한 세상의 ‘조건’

8년 전 방영했던 tvN <더 지니어스> 시즌1 첫 화를 지금 보면 감회가 새롭다. 최근 정치권에서 연일 주가를 갱신 중인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요즘의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모습과 달리 우왕좌왕하다가 홍진호의 배신으로 1회전 데스매치에서 탈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tvN <더 지니어스> 시즌1에서 1회전 탈락하며 ‘비운의 지니어스’라 불렸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이후 <더 지니어스> 시즌4 ‘그랜드파이널’에 재도전해 승부사로서의 실력을 증명하며 9회까지 살아남았다.   해당 프로그램 화면 캡처·tvN 제공

tvN <더 지니어스> 시즌1에서 1회전 탈락하며 ‘비운의 지니어스’라 불렸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이후 <더 지니어스> 시즌4 ‘그랜드파이널’에 재도전해 승부사로서의 실력을 증명하며 9회까지 살아남았다. 해당 프로그램 화면 캡처·tvN 제공

<더 지니어스> 1회전 탈락이라는 과거의 사실을 들어 그의 정치적 역량과 두뇌 회전, 위기관리 능력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정작 그 1화에서 잘못된 전략 변경으로 이준석에게 피해를 준 건 시즌1 우승자인 홍진호였다. <더 지니어스>는 기본적으로 초반 회차에선 연합을 결성하고 결속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게임을, 후반으로 갈수록 개인 역량이 중요한 게임을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박근혜 키즈’로서 나름 촉망받던 정치 신예였다고는 하지만, 김구라를 비롯한 인지도 높은 방송인 출연자들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출연자들이 시즌1에 대해 어느 정도 학습한 시즌2부터는 시간 내에 어느 정도 나름의 전략을 수립하고 대처를 할 수도 있었지만, 첫 시즌 1화에서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거의 모든 출연자가 겜블러 출신 차민수의 입만 바라보고, 김경란과 성규의 속임수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런 정신없는 상황에선 누구나 쉽게 다수 연합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최종 우승자인 홍진호도 이때는 어리바리하게 끌려다녔다. 1회전 탈락이란 사실은 오히려 탈락자의 능력에 대해 많은 걸 말해주지 못한다. 이준석이 별다른 시도도 못해본 채 위기에 몰리고 결과적으로 탈락한 건 상당히 운이 없어서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더 지니어스>라는 조작 없는 게임의 세계는 이준석의 책 제목이자 스스로 강조하는 ‘공정한 경쟁’에 가까운 모델일까. 그는 공정한 경쟁에서의 변명의 여지없는 낙오자임을 인정해야 할까.

이준석이 말하는 공정한 경쟁이란 말하자면 모두가 다른 조건의 변수 없이 오직 능력만으로 평가받는 모델 같다. 가령 그는 저서 <공정한 경쟁>에서 목동 월촌중학교에서의 등수 경쟁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었다. 중학생에 불과한 아이들 700명이 등수를 두고 다투었다. (중략) 지금 생각하면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었다고 술회한다. 왜 공부가 공정한 경쟁일까. 그는 중학교에서의 경험을 “상계동에서 다녔던 초등학교와는 전혀 다른 정글의 법칙”이라면서 “차이점이 있다면 정글처럼 힘이 센 자가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라고 부연한다. 그는 타고난 힘에 좌우되는 실제 정글과 비교해 공부는 개인의 노력에 비례하기에 더 공정하다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같은 노력을 해도 암기력이 뛰어난 학생과 다른 재능이 있는 학생의 성적엔 차이가 있다. 타고난 힘에 좌우되는 정글이 공정한 경쟁의 장이 아니라면, 성적 경쟁도 그의 말만큼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일 수는 없다. 그에게 “회사 다니는 아버지가 많았고, 같은 학원에 다녔고, 똑같이 교육열이 대단”했던 학교에서의 환경은 동등한 경쟁의 출발점처럼 보였겠지만, 당장 바로 그 부모의 고용안정성과 고학력에 기반한 교육열 자체가 목동이라는 공간과 다른 지역 학생과의 명백한 학습 환경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가 월촌중학교에서 경험한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은 다른 지역과의 불공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위근우의 리플레이]이준석과 <더 지니어스>, 공정한 경쟁이라는 허구의 세계

과연 <더 지니어스>를 공정한 경쟁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은 사실 그래서 공정한 경쟁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느냐로 바꿔야 할 것이다. 이준석이 예시로 든 중학교에서의 경험이 그러하듯, 실제로 변수 없는 경쟁이란 없으며 단지 특정 조건을 변수로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만이 가능하다.

만약 문제풀이 능력 외의 다른 것이 개입하는 것을 변수로 본다면 <더 지니어스>는 불공정하다. 하지만 필승전략 구상을 포함해 다양한 이들의 마음을 읽고 협상하는 종합 능력 모두를 지니어스의 조건으로 본다면 <더 지니어스>는 공정한 경쟁이다.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만약 개인의 능력을 그가 지금껏 쌓아온 인맥과 자산까지로 확장한다면 외부와 차단된 <더 지니어스>의 룰은 당시 여당 내 유망주이던 이준석의 경쟁력을 제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변수를 통제해야 공정한 경쟁일까. 그리고 어떤 경쟁이어야 이준석의 1회전 탈락이 공정하거나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 사고실험은 사실 <더 지니어스>의 공정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더 지니어스>가 증명해주는 것은 아무리 공정한 경쟁의 룰을 공들여 설계할지라도 각 플레이어들은 각각 나름 합당한 이유로 불합리함과 불평등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tvN <더 지니어스> 시즌1에서 1회전 탈락하며 ‘비운의 지니어스’라 불렸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이후 <더 지니어스> 시즌4 ‘그랜드파이널’에 재도전해 승부사로서의 실력을 증명하며 9회까지 살아남았다.   해당 프로그램 화면 캡처·tvN 제공

tvN <더 지니어스> 시즌1에서 1회전 탈락하며 ‘비운의 지니어스’라 불렸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이후 <더 지니어스> 시즌4 ‘그랜드파이널’에 재도전해 승부사로서의 실력을 증명하며 9회까지 살아남았다. 해당 프로그램 화면 캡처·tvN 제공

그래서 이준석의 <더 지니어스> 1회전 탈락의 공정성 유무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준석에겐 충분히 억울함이 있지만, <더 지니어스> 역시 나름대로 최대한 공정한 룰을 고민한 프로그램이다. 만약 이준석이 당대표가 되면 도입하겠다는 공직 후보자 기초 자격시험을 <더 지니어스>에서 시도했다고 더 공정한 게임이 되었을까. 진짜 불공정한 건, 이준석이 1회전에서 탈락했다고 그의 모든 정치적 역량이 의문시되고 오직 <더 지니어스>에서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국민의힘 경선에서 홍진호에게 다시 패하는 것이다. 이것이 직관적으로 부조리하다면, 그가 입시 경쟁에서 승리해 하버드에서 수학했다는 것만으로 정치인으로서 그토록 유리한 입장에서 출발해 많은 관심과 기회를 제공받은 것도 부조리하다. 경쟁의 승패는 그 자체만으로는 온전히 공정할 수 없다.

[위근우의 리플레이]이준석과 <더 지니어스>, 공정한 경쟁이라는 허구의 세계

이준석은 <공정한 경쟁>에서 공정의 기준으로 미국의 자유주의를 예로 들며 “미국은 이런 정글의 법칙, 약육강식의 원리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미국 자유주의 도덕철학의 대가인 존 롤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공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정한 기회균등은 자유주의적 평등을 의미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본 구조에 자연적 자유의 체계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는 어떤 요구들을 부과해야 한다. 과도한 재산과 부의 집중, 특히 정치적 지배로 이어지기 쉬운 집중을 막기 위해 자유시장 체계는 경제 세력들의 장기 동향을 조정하는 정치적·법적 제도의 틀 안에 놓여야 한다.” 어쩌다 보니 이준석이 청년 세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처럼 이야기되고 있지만, 사실 현재 청년 세대가 겪는 불평등의 핵심은 부모의 자산과 고용안정성, 학력이 거의 그대로 대물림되어 계층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규제 없는 자유 경쟁에서 승자 계급은 첫 승리로 다음 승리를 매우 쉽게 얻을 수 있다. 이준석도 고학력 금융권 고위직 부모를 둔 계급 불평등의 수혜자다. 이게 공정한가?

공정한 경쟁이란 그래서 현실에선 형용모순에 가깝다. 그나마 경쟁의 승패에 수많은 운과 외부 조건이 개입했음을 인정하고 그걸 교정할 다양한 기회를 만드는 것이 조금이라도 공정함에 다가가는 방법이다. 이준석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었다. 1~3시즌 우승자들을 비롯한 기존 출연자들이 함께한 <더 지니어스> 시즌4 ‘그랜드파이널’에 참가한 그는 지난번 탈락 때와는 전혀 다른 활약을 보여주었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지난 시즌에서 다수 연합에 밀려 탈락했던 그는, 시즌4 1화부터 다수파에 붙는 척하다가 내부 합의를 깨고 자신의 원래 파트너였던 김경훈과의 연합으로 단독 우승을 노렸다. 비록 한 수 위의 플레이어였던 이상민이 김경훈을 포섭해 이 전략은 실패하고, 그의 배신의 희생자였던 유정현의 지목으로 데스매치를 하게 됐지만 승리해 살아남았다. 1회전의 중요 신스틸러가 되고 승부사로서의 실력을 증명한 건 덤이다. 이후 그는 9회까지 살아남았다. 이것은 그가 잘한 덕도 있지만, 첫 시즌 1회전 탈락이 비록 정당한 승부에서의 패배라 해도 그것만으로 그를 평가하지 않고 재도전의 기회를 준 덕이기도 하다. 비유하자면, 그는 <더 지니어스> 시즌4 출연자 구성에 있어 패자부활전 할당제의 수혜자인 셈이다. 첫 시즌 1회전 탈락과 시즌4에서의 9회전 탈락 중 무엇이 더 공정 혹은 불공정 하느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1회전 탈락자에게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 그것이 공정한 세상이다. 정치인 이준석이 공정을 말할 때마다 자신의 <더 지니어스> 1회전 탈락을 떠올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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