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 청와대 이전보다 가치 있죠”

2022.03.26 09:00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인터뷰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 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3월 22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 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3월 22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지하철 탑승 시위를 왜 하필 출근 시간대에 하느냐고 묻습니다.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해봤기 때문입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62)를 비롯한 장애인들이 지난 3월 24일 ‘출근길 지하철 타기’ 시위를 재개했다. 이날 오전 8시 20분 3호선 경복궁역을 출발해 4호선 혜화역으로 이동했다. 장애인 10명가량이 차량 한대를 가득 채웠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도 함께했다. 이들은 장애인 권리 보장을 위한 예산과 정책 반영을 촉구했다. 지하철이 연착되자 몇몇 비장애인들이 불만을 나타내며 항의했다. 큰 소란은 없었다.

박 대표 등은 지난해 12월 3일 ‘세계 장애인의 날’을 계기로 이런 방식의 시위를 시작했다. 대선 전인 3월 초까지 모두 22번 했다. 지난 3월 14일과 22일에는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에 예산과 정책 요구안을 전달하며 답변을 요구했다. 이에 인수위는 23일 “당연히 중점 과제로 다루고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장연은 그러나 “원론적인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검토하겠다’는 말은 21년째 듣고 있다”며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이어갔다.

장애인들은 시설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차별 없이 살기를 원한다. 기본적으로 교육이 필요하다. 비장애인처럼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신체활동 등을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활동지원사도 필수다. 탈(脫)시설을 통해 비장애인과 어울려 인간답게 살려면 이동수단, 교육, 활동지원서비스 등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탈시설 권리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9조(한국 2008년 비준)와 이 협약의 시행령 격인 일반논평 5호에서도 규정하고 있다. 장애인권 단체들은 “예산 없이는 권리도 없다”며 예산 보장을 통해 이런 정책들을 제도화하라고 요구한다.

박 대표는 3월 22일과 24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청와대를 용산으로 이전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생 때인 1983년 행글라이더를 타다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절망감에 5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직업훈련을 받으면서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노들장애인야학(1993년 설립)에서 1994년부터 교사로 일했다. 1997~2021년의 24년 동안 교장을 맡았다. 이동권 등 각종 장애인의 권리 실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뛰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와 장애인들이 3월 24일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에서 하차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와 장애인들이 3월 24일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에서 하차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출근 시간대 시위는 처음인가.

“2001년 1월 오이도역에서, 2002년 발산역에서 장애인이 리프트를 타다가 떨어져 사망했다. 이후 천천히 지하철에 탑승하는 ‘연착 투쟁’을 했다. 2017년 신길역 리프트에서 장애인이 사망했을 때는 지하철 안에서 관까지 들었다. 다만 모두 비교적 한산한 낮 시간대에 했다. 출근길 시위는 이번이 처음이다. 비장애인들에게 맞아 죽을까봐 두려워 감히 생각도 못 했다.”

-출근길을 선택한 이유는.

“이동권 문제만 놓고 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봤다. 일각에서 청와대나 국회, 정부부처에 가서 항의하라고 말한다. 수없이 갔다. 집회를 하다 벌금도 많이 맞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청와대 안에서도 기습 시위를 했다. 2007년 노 전 대통령이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서명할 때 초대를 받았는데 ‘장애인 교육지원법 제정하라’ 등의 문구를 적은 현수막을 펼쳤다. 도로에서 버스도 막아봤다.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비장애인들이 욕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 욕을 100번 한다면 1번만이라도 윤석열 당선인에게 ‘장애인 권리 예산을 보장하라’고 말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장애인 시위에 시민들이 이렇게 대놓고 욕을 많이 한 적이 없었다. 잊힌 채 죽고 싶지 않다. 뒤에서 하는 욕은 더 심각하다. 저주, 편견, 시혜, 동정의 시선 등이다.”

지난 3월 17일 서울교통공사 홍보실 직원이 작성한 문건 하나가 공개돼 논란이 됐다. ‘사회적 약자와의 여론전 맞서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사례로’라는 제목의 PPT 문건에는 전장연의 약점을 계속 찾아 여론전에 이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겼다. 공사 측은 “직원이 내부 인트라넷 자유게시판에 올린 문건으로, 개인 의견일 뿐”이라고 밝혔다.

-서울교통공사 문건을 보고 어땠나.

“놀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치기하려 했다. 우리 사회의 슬픈 모습이 아닌가 싶다.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공사의 태도도 비겁하다고 본다.”

-이동권이 중요한 이유는.

“이동권은 다른 권리와 연결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가령 교육을 받으려면 이동을 해야 한다. 물리적인 이동 수단이 끊겨 있는데 삶의 질, 철학, 가치를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나. 교통을 넘어 삶의 문제이다. 비장애인이 코로나19로 인해 격리된 채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이동권이 보장 안 되면 장애인의 이런 격리 상태는 죽을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지난 2월 10일 보도자료를 내고 326개 모든 지하철 역사에 승강기(엘리베이터) 설치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올 2월 기준 93.6%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나머지 21개 역사는 단계적으로 공사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2024년까지 설치 완료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서울시에서 엘리베이터를 100% 설치하겠다고 한다.

“2001년 오이도역 사망 사고 이후 서울시에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버스 도입, 특별교통수단(장애인 콜택시) 도입을 요구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2002년 발산역 사망 사고 이후에는 단식을 했다. 39일 동안이다. 그제야 서울시는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키지 않았다. 2015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은 2022년까지 100% 설치를 약속했지만 미뤘다. 그사이 장애인들은 또 리프트에서 떨어져 죽거나 다쳤다. 엘리베이터 설치율이 90%를 넘기까지 무려 21년이 걸렸다.”

-저상버스 의무 도입과 이동지원센터 의무 설치 등을 핵심으로 하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했다.

“의미 있는 변화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시외·고속버스는 저상버스 의무 대상에서 제외했다. 안전벨트 관련 기술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기술 개발에 5년이 걸린다고 한다. 20년 동안 뭘 했나. 광역이동지원센터 설치 의무화도 긍정적이긴 하다. 이동지원센터는 특별교통수단의 차량과 인력 등을 관리하고 장애인과 교통수단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특별교통수단을 타고는 다른 시·군으로 갈 수가 없다. 배차 간격이 1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시외버스는 장애인들이 아예 타지도 못한다.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는 불가능하다. 지방자치단체끼리 연결하는 광역이동지원센터가 필요한 이유다. 현재 국가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고 지자체 예산으로 해결한다. 어느 지자체가 장애인 이동권에 예산을 우선 배정하려 들겠나. 전국을 연결하려면 중앙정부가 나서야 한다. 개정안은 국비 지원을 두고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의무가 아니라 임의 조항이다. 안 하면 그만인 셈이다. 기획재정부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3월 22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개최한 ‘장애인 권리 예산 및 정책’ 반영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3월 22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개최한 ‘장애인 권리 예산 및 정책’ 반영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장애인 권리 예산은 무엇인가.

“교통약자법 개정에 따른 장애인 이동권 예산을 포함한다. 이동지원센터 설치·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중앙정부가 서울 50%, 지방 70%를 지급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 탈시설, 평생교육시설, 활동지원 예산 등의 내용도 담았다. 이 요구안은 지난해부터 기재부와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등에 제출했다. 대선 기간 후보였던 윤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원장에게도 전달했다.”

-탈시설 예산은 얼마나 요구하나.

“올해 장애인 거주시설 예산은 6224억원이다. 반면 탈시설 예산은 24억원에 그친다. 2023년에는 탈시설 예산을 788억원까지 책정해야 한다고 본다. 정부는 2021년 ‘탈시설 장애인 로드맵’을 발표했다. 올해부터 3년 동안 시범사업을 하고, 2025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한다고 했다. 2041년에 마무리한다고 한다. 탈시설 대책 마련 초기에 안정적인 예산을 구축하려는 게 우리의 목표다.”

-탈시설이 필요한 이유는.

“장애인 거주시설은 집단적으로 수용한다. 혹독한 배제와 격리의 공간이다. 동토(凍土)다. 이들이 일상으로 나와 비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려면 예산이 필요하다. 그 비용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장애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해 시설에 가둬두는 것이다.”

-교육 분야 요구사항은.

“장애인평생교육시설의 운영비를 국비(서울 50%·지방 70%)로 지원해야 한다. 지금은 지자체가 일부 지원한다. 지자체별로 천차만별이다.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장애인들은 성인이 돼 야학이라는 공간에서 배움과 권리, 자립을 알게 된다. 평생교육이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삶의 여백을 써내려간다. 지역 간 편차를 최소화해 안정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활동지원 시간 확대도 주장하는데.

“활동지원은 생존권과 직결된 사안이다. 활동지원사들이 장애인의 일상 활동과 이동 등을 돕는다. 2007년 제도 시행 이후 정부는 ‘24시간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하루 최대 16.16시간이다. 이 시간만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장애인들도 2021년 7월 기준으로 5명(활동지원을 받고 있는 전체 장애인 숫자의 0.006%)에 불과하다. 최중증장애인 등 24시간 활동지원이 필요한 장애인들도 많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지난 1월 펴낸 ‘2021 장애통계연보’를 보면 2017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장애인 복지예산 비율은 0.6%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02%)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최하위권이다. 박 대표는 “장애인 몸과 마음을 낱낱이 해부해 지원 규모를 책정하는 방식의 정책 설계는 그만했으면 한다”며 “OECD 평균 수준의 예산을 보장하고 각종 제도를 다시 설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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