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배우고 어떻게 써먹는지’ 알려주지 않는…‘수학 소양’과 담 쌓은 한국 수학교육

2022.09.01 22:01 입력 2022.09.01 22:03 수정

(2) 평가에 특화된 한국 학생

[이상한 나라의 수포자] ‘왜 배우고 어떻게 써먹는지’ 알려주지 않는…‘수학 소양’과 담 쌓은 한국 수학교육

실생활 맥락서 추론하는 PISA 유형, 한국 교과서엔 없어
문제 풀이 훈련된 한국 학생 성취도 높지만 ‘해석’엔 어려움
불필요한 선행학습하는 대신 이해력 초점 맞춘 교육 필요

“대학 가서 수학 강의 들으려면 고등학교에서 미적분 배워둬야 한다고요? 근데 고교에서 배운 미적분은 대학 가면 극한의 개념부터 다르게 정의하니 쓸모가 없어요.”

박영훈 수학 칼럼니스트는 1일 기자와 통화하며 ‘수학을 왜 배우고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한국의 수학교육 문제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학교사 출신인 그가 교육현장 안팎에서 줄곧 바라본 한국의 수학 교육과정은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미국 고등학생들은 계산기를 써서 나온 미적분 그래프를 보면서 왜 이 지점에서 이런 형태가 나오는지 해석해요. 그동안 한국 학생들은 일일이 손으로 그래프 그리면서 EBS 문제나 풀고 있죠.” 그는 연산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주판알을 튕기게 했던 과거 한국의 수학교육을 거론하며 여전히 ‘수학 소양’과는 담을 쌓은 상태라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주관하는 국제 학업성취도평가연구(PISA)는 ‘수학 소양’ 또는 ‘수학적 이해력’을 ‘다양한 실생활 맥락에서 수학적으로 추론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학을 형식화하고 이용하고 해석하는 개인의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PISA는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세 가지 영역(읽기, 수학, 과학) 중 하나를 정해 10년 주기로 평가틀을 수정 보완한다. 올해는 PISA가 수학 영역의 평가틀을 보완해 새롭게 소개하는 해다. 막연히 수학 소양이라고 하면 감을 잡기 어렵지만 PISA가 예제로 제시하고 있는 문항들을 보면 수학적 추론능력이 실생활과 어떤 식으로 연계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PISA 2022 수학 평가틀’ 홈페이지에 제시된 예제 6번(사진)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가장 빠른 경로를 어떻게 찾는지’ 묻는다. 문항 속의 예지와 병철, 창수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최단 경로를 찾으려는 모습은 내비게이션 애플리케이션(앱)이 제시하는 몇 개의 경로 중 어느 것을 택할지 고민하는 실생활과 맞닿아 있다. 인터넷 상거래 사이트에서 구매자들의 평점과 후기를 보면서 새 이어폰 구매를 고민하는 과정을 그린 5번 문항이나 저축 기간과 액수, 이율 등을 고려해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7번 문항 등 대부분 일상과 수학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올해 제시된 PISA 2022 수학 평가틀은 기술과 환경의 변화 등을 고려해 스마트폰 스프레드시트 앱 활용방법 등 다양한 문항들을 포함한다. 사실 이전 평가에서도 ‘수학 소양’은 실생활과의 연계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했다. 한국의 학생들은 교과서에 없고, 실제 수학시간에 배우는 방식과 상당히 다른 ‘수학 소양’ 평가에서도 대체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올해 5~6월 실시돼 아직 결과 집계가 되지 않은 PISA 2022를 제외하고, 가장 최신인 PISA 2018 수학 영역 결과를 보면 한국은 526점으로 평가에 참가한 79개 지역 중 7위에 올랐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비롯해 국내 학생들이 주로 보는 각종 시험은 PISA 평가 문항과는 유형이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국제 순위에서 보듯 높은 학업성취도를 달성했다고 인정받는다. 그간의 입시 위주 교육이 ‘수포자’를 낳는 부작용은 있지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한다.

과연 그럴까. 고등학교 1학년 때 PISA 2018을 치러본 경험이 있다는 대학생 이민우씨(20)는 “PISA 문제가 학교나 학원에서 푸는 문제보다 훨씬 쉽게 느껴졌다”며 “일종의 치트키(편법)를 써서 난이도를 낮춘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고교까지 사교육을 통해 선행학습을 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치트키’를 쓰게 된 평범한 한국 학생을 대표한다. 박영훈 칼럼니스트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 현상을 분석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한국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평가’에 대처하는 능력을 특화시켜 왔기 때문에 출제 방향이 다른 PISA에서도 높은 성취도를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학교육 수준을 계속 어렵게 유지하기만 한다 해서 ‘수학 소양’이 저절로, 쉽게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해 12월 펴낸 ‘OECD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 연구: PISA 2018 상위국 성취 특성 및 교육맥락변인과의 관계 분석’ 보고서를 보면, 연구진은 수학 영역 결과를 성취도가 높은 핀란드, 일본, 싱가포르, 에스토니아와 비교해 분석한 결과 “(한국 학생이) 실생활 맥락에서 문제를 이해하여 수학적 해석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포함한 첨단산업의 시대를 맞아 수학적 추론능력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다수에게는 실생활에서의 수학 소양에 더 초점을 맞춘 교육이 높은 효율을 보일 수 있고, 반대로 수학적 역량이 뛰어난 소수에게는 그에 걸맞은 맞춤형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AI 연구자인 서창호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인공지능은 수학 의존도가 매우 높은 연구 분야라,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키는 과정을 보는 눈을 가지려면 수학의 언어를 알아야만 한다”면서도 “그렇다고 수학의 모든 언어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미적분은 몰라도 크게 상관없다”고 말했다.

시험을 통한 줄세우기에만 중점을 둔 수학교육은 대학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영역까지 미리 학습하게 하는 낭비와 비효율을 부른다.

서 교수는 “수학의 중요한 언어들이 초·중·고교 시기에 학생들에게 너무 많이 쏟아지는 문제 때문에 아예 수학에 관심을 잃고 수포자가 돼 버리면 관심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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