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전파로 라디오를 들으며 전자파 유해성 기사를 읽는다. 음악을 듣게 해주는 전파는 고맙지만, 전자파는 왠지 피하고 싶다. 전파는 좋은 것이고, 전자파는 나쁜 것일까?
전자파는 표준 용어가 아니어서 전자기파로 부르는 것이 맞다. 전파도 좀 이상하다. 자연에는 전파(電波)와 자파(磁波)가 따로 없어, 둘은 서로를 만들어내며 전자기파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radio wave인 전파를 직역해 라디오파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전기만의 파동으로 오해하는 이는 없고, 이미 널리 쓰여 이제 와서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물리학은 자연을 객관적인 실체로 기술하고자 하지만. 어쨌든 인간은 인간의 언어로 자연을 기술한다.
전기(electricity)는 호박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elecktron이 어원이다. 보석의 일종인 호박을 천으로 문지르면 곁에 놓인 작은 물체를 잡아당기는 현상이 전기의 어원이다. 자기(magnetism)는 자석으로 쓰이는 자철광의 산지 고대의 마그네시아(Magnesia)가 어원이다. 조선시대 참료의 시에 침개상투희유연(針芥相投喜有緣)의 글귀가 있다. 침개상투는 “바늘(針)이 자석에 이끌리고, 작은 겨자씨(芥)가 호박에 이끌리듯 서로 마음을 나눈 친구”를 뜻하는 고전 글귀에서 따온 얘기(정민의 <우리 한시 삼백선: 7언 절구 편>)라 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기와 자기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자연현상이다.
대학생 때, 같은 방향으로 전류가 흐르는 두 도선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자기력이 생긴다는 것을 배우고 고개를 갸웃한 기억이 있다. 첫 번째 도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전자가 보면 두 번째 도선의 전자는 나란히 같이 움직여 정지한 것으로 보인다. 둘 사이에는 서로 밀어내는 전기력이 작용할 것 같은데, 왜 두 도선은 서로 잡아당길까?
금속 도선 안에서 양전하를 띤 원자핵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고 전자들은 도선 안을 자유롭게 움직인다. 첫 번째 도선에서 움직이는 전자가 두 번째 도선의 원자핵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은 정지한 관찰자가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운동 방향으로 길이가 줄어든 모습을 본다는 것을 알려준다. 첫 번째 도선의 전자가 보면 두 번째 도선의 양전하를 띤 원자핵들은 더 조밀하게 배열되어 더 높은 양전하 밀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게 된다. 한편, 두 번째 도선의 전자들은 첫 번째 도선의 전자와 함께 나란히 같은 속력으로 움직여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여서 두 번째 도선의 음전하 밀도에는 길이 수축 효과가 없다. 결국, 첫 번째 도선의 전자가 힐끗 옆 도선을 보면 그곳의 양전하 밀도가 음전하 밀도보다 더 커보이게 되고, 두 도선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존재하게 된다. 전류가 흐르는 두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자기력은 전하 사이의 전기력에 특수상대론의 길이 수축 효과를 적용한 결과다.
전파는 라디오파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아보이고, 전자파 대신 전자기파로 부르는 것이 맞다. 주변 물리학자들이 더 아쉬워하는 것이 속도와 속력이다. 중력, 전자기력처럼 힘력(力)이 들어 있는 용어 중에는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가진 벡터가 많다.
한편, ‘온도’나 ‘습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도’자를 돌림자로 갖는 양들은 크기는 있지만 방향을 갖지 않는 스칼라가 많다. 내가 동쪽 방향으로 힘을 주어 물체를 밀 수는 있어도 온도를 동쪽 방향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물리량과 비교하면, 속력을 벡터로 그리고 속력의 크기를 속도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거꾸로다.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정착되어 널리 이용되는 과학의 용어에도 맥락과 역사가 담겨 있어 용어의 갑작스러운 변경은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파라고 좋은 것도, 전자파라고 나쁜 것도 아니다. 전자파는 학술용어가 아니어서 전자기파라고 부르는 것이 맞고, 전파는 방송에 사용하는 파장이 긴 전자기파를 일컬을 뿐이다. 어쨌든 우리가 특정 용어를 서로 다른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이 흐름으로 이어지면 과학의 개념에 가치의 판단을 담게 되는 것은 늘 주의할 일이다. 고립계의 엔트로피가 늘어난다는 사실로부터 엔트로피는 나쁜 것이니 줄여야 한다는 당위의 주장을 이끌어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은 자연을 말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 과학 용어가 담긴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안에 담긴 사실과 가치를 늘 저울질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