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소수자의 목소리 외면하는 독단, 분열의 씨앗 키워 폭력의 꽃을 피워

2022.04.08 20:45 입력 2022.04.11 09:59 수정
박상진 부산외대 이탈리아어과 교수

누가 분열의 씨를 뿌리는가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 지방 영주 베르트랑은 영국 왕 헨리 2세와 아들을 서로 반목하게 한 죄로 지옥에서 자신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고통을 겪는다. 단테의 지옥에서 베르트랑처럼 불화를 조장한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몸이 바스라지는 상황에 처한다. 그림은 귀스타브 도레의 ‘보른의 베르트랑’.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 지방 영주 베르트랑은 영국 왕 헨리 2세와 아들을 서로 반목하게 한 죄로 지옥에서 자신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고통을 겪는다. 단테의 지옥에서 베르트랑처럼 불화를 조장한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몸이 바스라지는 상황에 처한다. 그림은 귀스타브 도레의 ‘보른의 베르트랑’.

불화를 조장한 죄를 지은 자들
지옥에서 몸이 잘리는 형벌 받아
세상에서 남들을 갈라놓는 것은
몸에서 머리를 떼어놓는 것과 같아

적이 있어야 살아남는 자들은
이념·인종·젠더·세대 등 쪼개
남을 부정하고 자기 편을 결집
그들이 남발하는 폭력의 언어는
불통을 풀지 못하는 무능의 표출

■의심의 눈을 가진 자들

분열의 씨를 뿌리는 자들은 늘 상대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상대를 믿지 못하니 더불어 사는 공생의 원리도 모른다. 어울려 공감과 합의를 도모하는 능력이 원래부터 부족하기 때문이다. 적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들은 이념, 인종, 국가, 정당, 젠더, 지역, 세대를 안에서부터 쪼개고 잘라서 부정하고 적을 만들어 선동을 통해 자기 편을 결집한다. 그리하여 상대에 의지할 줄 모르는 고립에 처하고, 고립에 처할수록 분파주의에 빠져들며 자신들이 옳다는 확신을 자기 편에게서만 인정받고 검증받는다. 한번 갈라진 분파는 계속해서 더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온화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화와 협의에 나서지 못하고, 편견이 빚어내는 폭력적 언어를 남발한다. 편견과 폭력의 언어는 불통을 풀지 못하는 무능력의 표출이다.

■찢어지고 갈라진 몸뚱이들

단테가 말레볼제의 아홉 번째 구렁에 내려가자 마귀들 손에 몸이 바스라지고 수족이 잘린 자들이 널려 있다. 불화를 조장한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다.

그때 턱부터 방귀 뀌는 곳까지 뜯겨진
어떤 자를 보았는데,
허리나 바닥이 구멍 난
술통도 그처럼 벌어지진 않으리

두 다리 사이에 내장들이 매달렸는데,
창자와 아울러 삼킨 것을 똥으로
만드는 처량한 주머니가 보이는 듯했노라.

내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나를 보며 두 손으로 가슴을 벌려 보이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찢어졌는지 보라!”
([지옥] 28곡 22~30행)

단테가 마주친 망령은 몸통이 뜯기고 벌어져 내장이 다리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원래 있어야 할 곳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해 처량해 보인다. 단테가 호기심을 보이자 이 망령은 손으로 가슴을 벌려 보이면서 찢겨나간 몸을 잘 보라고 외친다. 그의 몸은 부분이 전체와 유기적 관계를 이루지 못해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분열과 불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경고의 표시다.

몸이 찢긴 이 망령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이런 모습을 두고 단테를 편협한 그리스도교 중심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단테가 보여주려는 것은 한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분열의 모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종교지도자 무함마드보다는 그의 몸이 갈라지고 훼손된 이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종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공동체를 해치는 불통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무함마드를 비롯한 이곳의 죄인들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마귀의 손에 수족과 몸통이 잔인하게 잘려나간다. 그들의 상처는 한 바퀴를 다 돌기 전에 봉합되지만, 그다음 바퀴에서 다시 잘려나가기를 반복한다. 상처가 봉합되는 것은 다시 잘려나가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고, 몸이 잘려나가는 형벌은 그렇게 영원히 반복된다. 세상에서 저지른 분열의 죄가 공동체에 끼친 고통을 이곳 지옥에서 몸으로 뼈저리게 겪어야 하는 것이다.

옆을 바라보자 목에 구멍이 나고 코가 잘려나간 자가 눈에 들어온다. 피에르 다 메디치나라는 정치인으로, 단테 당시 명망이 높던 두 가문의 충돌을 선동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말을 한다. 입 대신에 목구멍을 열어 말을 시작하는데, 마귀가 목을 잘라 입까지 공기를 보내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지옥] 28곡 64~69행). 피에르는 옆에 있던 동료의 턱을 잡아 입을 벌린 다음 외친다.

“쫓겨나 있던 이자는 ‘준비된 사람이
망설이면 늘 괴로워진다’고 주장하며
체사레의 의심을 잠재웠지요.”

오, 그리도 뻔뻔하게 말했던
쿠리오는 목구멍에서 혀가 잘린 채
얼마나 기겁한 듯 보였던가!
([지옥] 28곡 97~102행)

이 동료는 거짓 조언으로 분열을 일으켰던 로마의 호민관 쿠리오. 피에르는 쿠리오의 입을 벌려 불화의 원천이 되는 입을 강조한다. 쿠리오의 입속에는 불화의 조언을 내뱉었던 혀가 잘려나가고 없다. 일찍이 폼페이우스가 통치하던 로마에서 도피해(“쫓겨난”) 카이사르(“체사레”)에게 의탁하고 있던 쿠리오는 ‘준비된 사람이 망설이면 늘 괴로워진다’는 말로 카이사르를 설득하여 루비콘강을 건너게 했다. 결국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치고 로마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 단테는 쿠리오의 조언에 기만과 불화의 씨가 들어 있다고 판단한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권력을 쥐면서 공화정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을 여러 번 촉발했고, 믿었던 측근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는 배신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혀가 잘려나간 쿠리오를 지나니, 이번에는 머리가 몸에서 분리된 베르트랑 드 보른이 나타난다.

잘린 머리를 머리채로 잡았는데,
마치 초롱불처럼 손에서 대롱거렸다.
그게 우리를 쳐다보며 말하더라.
“슬프도다!”
...
서로 굳게 믿는 자들을 내가 갈라놓았으니,
고달프도다! 나의 머리를 이 몸통에 있는
제 출발점에서 떼어내 들고 다닌다오.
응보는 내게 그렇게 드러나고 있소.”
([지옥] 28곡 121~142행)

베르트랑은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 지방 영주였는데, 모시던 영국 왕 헨리 2세의 차남을 꾀어 아버지를 배신하게 했다. 붙어 있어야 마땅할 관계를 분리한 죄로 그는 지금 분리의 고통을 겪고 있다. 척추(“출발점”)에서 잘려나간 머리를 초롱불 삼아 들고 다니며 휴대용 확성기처럼 목소리를 낸다.

세상에서 남을 갈라놓았던 수고로운 일로 지금 그는 슬프고 고달프다. 그의 슬픔과 고달픔은 자신이 몸으로 겪고 있는 분열에서 나온다. 갈라치기를 획책한 죄는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는 징벌, 잘린 머리를 들고 다니며 분리된 몸을 자기 눈으로 바라보는 징벌을 받는다. 분열을 저지른 죄라는 원인은 분리된 몸이라는 결과와 하나를 이루고, 그는 스스로 저지른 죄의 본질을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저지른 죄에 응분의 보복을 가하는 “응보”임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아무는 상처

나는 그에게 몸을 돌려 자세히 바라보았다.
금발에 고귀하고 우아한 모습이었지만,
충격이 한쪽 눈썹을 갈라놓았다.

내가 전혀 본 적이 없다고 겸손하게
부인했을 때, 그가 말하길
“자 보시오” 하며,
가슴 위의 상처를 내게 보여 주었다.
([연옥] 3곡 106~111행)

연옥에서 단테가 만난 만프레디는 시칠리아 왕국을 다스린 호헨슈타우펜 왕가 페데리코 2세의 서자였다. 아버지 뒤를 이어 통치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견제를 하려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와 우르바누스 4세에게서 파문을 당하고, 이들을 등에 업은 프랑스의 샤를 앙주와 벌인 전쟁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단테는 페데리코 2세에 이어 만프레디가 쌓아올린 정치와 문화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만프레디는 수려한 외모와 정중한 태도로 유명했다. 파문을 당했어도 여기 연옥에서는 마치 순교자 같은 고귀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만프레디는 단테에게 세상에서 자기를 본 적 있는지 물으며 명성을 자랑하는 듯 보인다. 이에 단테가 자세히 뜯어보다가 고귀하고 우아한 모습에 대비되는, 눈썹에 난 상처를 발견한다. 이 상처는 만프레디 자신이 눈을 낮춰(즉 교만을 누그러뜨리며) 아래쪽 가슴에 위치한 다른 상처를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단테가 지옥에서 마주친 여러 죄인들의 상처가 불화와 분열의 징표였다면 이곳 연옥에서 죄를 씻는 만프레디의 상처는 겸손의 징표다. 그의 상처는 반드시 치료되고 완전히 아물며, 그리하여 그는 파문당한 죄인이 아니라 순교자가 된다. 파문은 누군가를 상대하지 못할 사람으로 간주하여 공동체로부터 분리하는 조처를, 순교는 분리된 누군가를 믿음의 동반자로 삼아 공생의 공동체를 세우려는 시도를 뜻한다. 지옥의 잘린 몸들이 영원히 반복되는 응보의 형벌이라면, 연옥의 갈라진 상처는 언젠가 받을 구원과 희망의 토대가 된다.

■상처를 봉합한다는 것

천국의 공동체는 분열의 과정에서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 아닌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곳이다. 윌리엄 헌트의 ‘희생양’ 그림.

천국의 공동체는 분열의 과정에서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 아닌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곳이다. 윌리엄 헌트의 ‘희생양’ 그림.

모두가 행복한 천국의 공동체는
희생양 만들기를 강요하지 않아
이질적인 서로에게 자신을 열고
갈라진 틈에 ‘화합의 씨앗’ 뿌려야

천국의 영혼들은 조화를 유지하는 반면 지옥과 연옥의 영혼들은 계속해서 불화에 휩싸여 있다. 생전의 삶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말이다. 둘로 나누는 것은 대립과 불화를 먹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진 몹쓸 능력이고, 결국 지옥의 깊은 구렁에서 이리저리 잘려나가는 자신의 몸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바라보는 처지를 만들 뿐이다. 이는 세상에서 분열을 획책할 때 겪지 못했던 고통이리라. 그때 ‘나’는 ‘우리’ 패거리 속에 안주하여 항상 안전했으니까.

순순히 지도자를 따르는 유순한 양떼는 이질성을 꺼리고 감당하지 못하며, 그래서 더 힘센 쪽을 선택하여 그 속에서 웅크린다. 상대와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권력에 생각 없이 순응하는 모습이다. 이질성에 대한 두려움, 타자를 들이고 타자와 섞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 두려움이 불통을 조장하고 분열을 지원한다. 만프레디가 겸손하게 보여주는 상처는 분열을 포용과 소통의 토대로 바꾸는 출발점이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바치는 공동체는 공동체가 아니다. 천국의 공동체는 결코 공리주의나 성장주의에 맞춰 조립한 결과물이 아니라 차이에 더 섬세하게 접근하고 차이를 끊임없이 조절하는 과정이다.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자들은 천국의 조절을 방해하고 편파적 이상을 강요한다. 분열의 씨앗은 혐오의 싹을 틔우고 대립의 잎을 달다가 폭력의 꽃을 피운다. 특히 사회적 소수자가 내는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단, ‘다른 시선’을 못 본 척하는 오만은 그 분열의 씨앗에 물이 되고 햇볕이 된다.

천국의 시민은 갈라진 틈에 화합의 씨앗을 뿌려 사랑의 연대로 키워내는 구성원이다. 그들이 씨앗에 주는 물과 빛은 타자의 자리에 설 줄 아는 배려와 관용, 사유의 능력이다. 다수와 소수가 서로의 이질성을 먼저 인정하고 이질적인 서로에게 자신부터 마음을 여는, 누구나 용기를 내서 해야 하는 의식적 실천이다. 그리하여 천국의 공동체는 ‘다수’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곳이다. 머나먼 곳이지만, 그곳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삶은 이미 행복할 것이다.

▶박상진

[박상진의 우리 시대의 단테 읽기]⑫소수자의 목소리 외면하는 독단, 분열의 씨앗 키워 폭력의 꽃을 피워


영국 옥스퍼드대 문학박사. 이탈리아 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미국 하버드대와 UC버클리 방문교수를 지냈고, 현재 부산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신곡> <데카메론> <아방가르드 예술론> <대중문학론> 등의 역서와 <단테 ‘신곡’ 연구> <사랑의 지성: 단테의 세계, 언어, 얼굴> <단테> <단테가 읽어주는 ‘신곡’> <열림의 이론과 실제> <비동일화의 지평> <Comparative Study of Korean Literature: Literary Migration> 등의 저서가 있다.


※필자 사정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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