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

2009.10.11 17:46
김재중·사진 김정근기자

그리스·로마 ‘원전의 감동’ 전령사

국내에서 ‘그리스·로마 고전’ 하면 제일 먼저 꼽히는 이름.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70)다. 국내에는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본이 수없이 많이 출간돼 있는데 영어나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중역본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천 교수가 50편 넘게 작업한 번역본은 다르다. 모두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기초한 ‘원전번역’이다. 천 교수의 번역본 대부분에 ‘국내 최초’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 이유다.

[월요 문화인]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

천 교수의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 이력은 37년 전 시작되지만 2004년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이후 놀라울 정도의 가속도가 붙었다. 퇴임 후 ‘그리스 3대 비극작가’로 불리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전체 작품 33편,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국내 최초로 원전 번역했다. 지난 8월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9월에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개정증보판을 내놨다. 2004년 천 교수가 번역한 아폴로도로스의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를 처음 낸 후 그의 책을 전담해서 출판하고 있는 숲 출판사의 강규순 사장은 “천 선생님은 다른 사람이 이미 번역했거나 번역할 수 있는 것은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면서 “개정판의 경우도 ‘내가 언제 다시 손을 댈 수 있겠느냐’면서 심혈을 기울이신다”고 전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송파구에 있는 천 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커튼이 드리워져 어둑한 그의 서재에 자리잡은 책상 위에는 밝게 빛나는 스탠드와 커다란 컴퓨터 모니터가 놓여 있다. 모니터 안에서는 2500여년 전 그리스에서 씌어진 고전 하나가 2009년 대한민국의 언어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그리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이 11편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에 4편을 번역했는데 마저 번역해 전집을 내려고요. 제가 안하면 책이 나올 거 같지 않아요. 그런데 너무 힘이 듭니다. 비극은 뚜렷한 줄거리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쉬운데 희극은 사건의 큰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는 정치가들을 즉흥적으로 공격하거나 말장난으로 웃기기 때문에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아요.”

천 교수의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 경향은 정년퇴임을 전후로 변화를 겪는다. 과거엔 문구 하나 하나를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직역에 주력했지만 지금은 현대의 한국인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쓴다.

수도 없이 받았을 질문, 즉 ‘왜 그토록 그리스·로마 고전에 매달리는가’에 대해 천 교수는 ‘감동’을 꼽았다. “3대 비극작가가 쓴 것이 300편이 넘지만 남은 것은 33편밖에 안 돼요. 두고두고 읽힐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잊힌 거지요. 우리 시대의 방송 드라마만 봐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머리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중요한 문제에 천착했기 때문에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재미로 읽을 수도 있지만 감동을 받기를 원하지요. 동서양을 떠나서 고전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생각거리를 줍니다.”

비극에서 시작된 천 교수의 그리스 고전 여행은 자연스럽게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탐색으로 확장됐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공직자들을 투표로 선출하고, 민회에서 중요 사안을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꽃 피었습니다. 철학, 역사, 서사시, 드라마, 조각, 건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죠. 무엇보다 통치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가기보다 잘잘못을 따져보고 행동으로 의사를 표현했던 아테네인들이 부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그가 대학 시절 그리스어 문법과 강독 수업을 통해 그리스 고전을 처음 접한 뒤 독일 유학에서 전공인 독문학 대신 그리스어·라틴어 공부에 더 몰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천 교수는 “대학 2학년 때 <일리아스>와 씨름했기 때문에 어디에 누가 나온다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기억난다”면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다.

천 교수의 일과는 새벽 5시30분에 시작된다. 매일 아침 남한산성에 있는 약수터까지 2시간 동안 산책을 한 뒤 오전 10시부터 책상에 앉아 오후 6시까지 2500여년 전 지중해와 2009년 한국을 연결시키는 작업에 매달린다. “중간에 밥 먹고, 차 마시고, 쉬는 시간을 빼면 하루 평균 6시간 정도 작업합니다. 하루 평균 50~60행 정도를 번역하는데 단번에 이해되는 것은 몇문장 안 돼요.”

“얼마나 더 이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머릿속엔 앞으로 번역할 작품들의 목록이 빼곡한 듯했다. 과거에 몇편 손댔던 희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전집과 세네카의 비극이 그것이다. “세네카의 비극이 9편 남아 있는데, 그의 비극은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연결시켜주는 다리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세네카의 비극을 몇편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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