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인 만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18.03.02 17:18 입력 2018.03.02 17:26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살다 보면 논쟁할 가치조차 없는 것도 있다

윤서인에 대해 유의미한 비평을 할 수 있을까? 지난 2월23일 인터넷 언론 미디어펜에 연재 중인 ‘윤서인의 미펜툰’(이하 ‘미펜툰’)에서 그는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부위원장 방남을 성폭행범 조두순(만화 속에선 조두숭)이 피해자의 집을 방문한 것으로 비유해 그렸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사람들은 공분했고 미디어펜은 해당 만화를 삭제했으며, 윤서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고 웬일로 윤서인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형식적으로나마 사과했다.

만화가 윤서인씨가 그린 ‘동성애 반대’ 만화 <니가 꼭 행복했으면>. 이 만화는 기독교 선교에 관련된 한 앱에 연재됐다.

만화가 윤서인씨가 그린 ‘동성애 반대’ 만화 <니가 꼭 행복했으면>. 이 만화는 기독교 선교에 관련된 한 앱에 연재됐다.

만화가 윤서인

만화가 윤서인

본인조차 ‘아차’ 싶었던 이 저열한 묘사를 비판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윤서인의 만화에 대한 비평적인 개입엔 한계가 생긴다. 최소한의 윤리적 알리바이도 없는 이 얄팍한 텍스트가 왜 불의한지 딱히 길게 설명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논의의 수준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문제가 된 회차를 제외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전에 그린 ‘침묵’ 편에선 2013년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사건 때 목소리를 높이던 여성단체가 최근의 이윤택 성폭력 폭로 건에선 침묵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이 역시 최근의 미투 운동과 그 이전부터의 문화계 성폭력 폭로 운동에 여성단체들이 얼마나 열심히 활동해왔는지 조금도 모르거나 알고도 외면했다는 점에서 팩트 없는 망상에 가깝다.

과연 윤서인에 대해 청와대 청원을 통해 처벌을 요청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인지는 의문이지만, 타당성도 사실성도 포기한 텍스트에 비평을 통한 피드백을 하는 것도 요원하긴 마찬가지다. 웬만한 비판엔 눈도 꿈쩍하지 않는 그의 정신세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ㆍ그가 그려낸 팩트 없는 망상
저열한 묘사를 비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러려면 비평 수준은 바닥을 쳐야 한다

무시와 모욕이 답일까.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다. ‘미펜툰’을 비롯해 과거의 ‘조이라이드’ ‘자유원샷’ 등의 연재물에서 공통적으로 윤서인은 대상을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로 몰아 비난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가령 2016년 겨울 민중궐기에 대해 시위대가 경찰 차벽을 부수는 모습을 그려 넣고 ‘내(시위대)가 하면 착한 폭력’이라 비꼬는 식이다. 물론 경찰의 차벽 자체가 위헌 소지가 다분한 공권력의 폭력이라는 맥락은 싹 지운 자기 입맛대로의 재구성이다. 매우 선동적이지만 그리 교묘하진 않다. 그의 만화가 불쾌한 건 단순히 악의 때문이 아니라 그 악의와 무지를 당당하고 투명하게 전시해서다. 윤서인의 만화는 무시무시한 악의 현현보다는 못생긴 알몸의 과시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의 만화에서 부당한 논리로 비난받는 시위대, 여성단체, 진보정당 지지자 등을 수세적으로 변호하기보다는 차라리 만화의 민망한 형상을 싸늘히 비웃어주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여기서 비평의 역할은 윤서인의 텍스트를 부여잡고 성실히 싸우는 것이 아닌, 여기에 논쟁적 가치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논의의 장에서 치워버리는 청소부 역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비평은 다시 한 번 한계를 경험한다. 아무리 저열한 텍스트를 앞에 놓고도 비평은 진정한 의미의 청소부가 될 수 없다. 물론 윤서인의 만화가 왜 담론의 장에서 치워져야 하는지, 그가 그려온 수많은 에피소드 안에서 증명하며 남은 지면을 채우는 건 어렵지 않다. 그렇게 비웃고 무시하려 해도, 연초의 화재 사고들을 소재로 한 ‘과묵한 사람들’ 편에서 진보 인사들의 ‘내로남불’을 비난하기 위해 화재 피해 유가족들이 “진실을 인양해주셔야죠”라고 외치는 가상의 장면을 그린 걸 보며 분노하지 않기란 어렵다.

ㆍ무시와 모욕이 답일까
부당한 논리에 피해받은 이들을 수세적으로 변호하기보다 차라리 만화의 민망한 형상을 비웃는 게 나을지 모른다

이 에피소드는 앞서 말한 조두순 비유만큼 저열하고 악독하다. 여전히 진실을 인양하지 못한 세월호 유족에 대한 2차 가해이며, 화재 사고 유족의 슬픔에 공감하기보다는 진보 인사에 대한 비난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화재 피해자에게도 모욕적이다. 과거 ‘조이라이드’에서 안전을 위해선 노란 리본 백 개보다 노란 깜빡이 한 번이 중요하다며 세월호 진실 인양을 위한 시민운동을 모독했던 그가 국가적 재난을 소재로 다루고 다시 한 번 세월호를 인용하는 것이야말로 의심의 여지없는 ‘내로남불’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상처와 역함과 분노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윤서인씨는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부위원장의 방남을 성폭행범 조두순이 피해자 가족을 찾아오는 데 비유한 바 있다. 청와대 청원 홈페이지에는 이 만화가 조두순 사건 피해자를 우롱했다며 작가의 처벌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8일 만에 18만명이 넘는 참여인을 모았다.

윤서인씨는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부위원장의 방남을 성폭행범 조두순이 피해자 가족을 찾아오는 데 비유한 바 있다. 청와대 청원 홈페이지에는 이 만화가 조두순 사건 피해자를 우롱했다며 작가의 처벌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8일 만에 18만명이 넘는 참여인을 모았다.

윤서인의 만화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은, 그래서 텍스트 분석 너머의 문제로 넘어간다. 앞서 보았듯 조금의 상식만 있어도 그의 만화가 얼마나 부실한 논리로 구성되었는지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조선일보, 뉴데일리, 자유경제원, 미디어펜 등을 오가며 꾸준히 연재처를 유지하는 윤서인을 보며 상식의 허망함을 경험하게 된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합리주의의 실천적 한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나는 항상 히틀러를 완벽히 굴복시킬 수 있는 답이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다. 하늘에 있는 신이 우리 편이라고 한다면 굴복시킬 수 있을까? (중략) 히틀러가 그의 비판자들에게 답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그 자신이 배태되어 있는 의사소통행위 맥락이 전제하고 있는 것을 반박하는 모순을 야기한다고 하면 히틀러를 굴복시킬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잘못된 신념을 믿는 이를 그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설복할 수 있는가? 물론 윤서인 개인을 설득하거나 굴복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비슷한 성향의 독자들을 타깃으로 한 뉴데일리나 미디어펜 같은 매체가 윤서인을 중용하는 한 그의 헛소리는 상식적인 독자를 괴롭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능한가?

우선 지난 정권이 그러했듯 정파적 입장으로 억압하는 것은 가장 먼저 제외되어야 할 비민주적인 선택지다. 신념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하다. 윤서인에게도 자신이 상식이라는 신념은 있다. ‘미펜툰’ 매 회마다 청와대 청원을 넣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신문고를 울리는 방식은 직관적으로도 이상하며, 분노의 동의 숫자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상식이 상식으로서 유의미한 사회적 구속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상식과 몰상식의 합의된 기준을 마련할 합리적 공론장과, 그렇게 구분된 몰상식을 공론장에서 몰아낼 실질적 힘이 필요하다.

ㆍ물론 그를 굴복시킬 필요는 없다
몰상식한 차별·혐오·비하는 비판적 논증과 의제화를 통해 공론장에서 몰아내면 그만이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현재 발의된 혐오표현 규제 법안이 더 보완되어 통과되거나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이 입법된다면 어떨까. 이미 앞의 예에서 윤서인이 발화한 여성혐오, 노동자 계급 차별, 유족 비하 등을 찾기란 어렵지 않으며 무엇보다 그는 ‘본격 동성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은 만화’ <니가 꼭 행복했으면>으로 확실한 동성애 혐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해당 법안이 권고나 조정 수준의 힘만 발휘하더라도 윤서인이나 비슷한 부류의 차별과 혐오표현 문제를 공론장 안에서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의제화한 뒤 담론 영역에서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건강한 공론장과 차별금지법에 대한 요청은 특정한 정파적 요청이 아니다. 윤서인에게 분노할 만큼의 정서적 민감함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꽤 명확하다. 그리고 그 흐름 안에서 비평 역시 공론장의 일부로서 아주 작은 밥값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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