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남녀’ 은하선 하차와 교육방송의 자기부정

2018.01.19 17:31 입력 2018.01.19 17:33 수정
위근우 | 칼럼니스트

소수자 목소리 듣자더니…EBS, 약자들에 침묵을 가르치나

본론부터 이야기하겠다. 은하선 작가의 EBS <까칠남녀> 강제 하차를 반대한다. 지난해 12월25일과 올해 1월1일, 2주에 걸쳐 <까칠남녀> ‘모르는 형님-성소수자 특집’이 방영된 이후, 전국학부모교육시민단체연합을 비롯해 동성애 반대를 주장하는 단체 및 개인들이 EBS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까칠남녀> 측은 고정 패널이자 해당 특집에서 바이섹슈얼을 대표해 출연한 은하선 작가를 하차시켰다. 반대 시위 이전에 이미 종영이 결정난 시즌 1 마지막 녹화와 2회 방영만을 앞둔 상황이었다.

은하선 작가가 패널로 출연한 EBS <까칠남녀>. 성소수자임을 밝힌 은하선 작가는 동성애 반대 단체들로부터 ‘음란기구 파는 여자’로 폄하되며 비판을 받아왔다.

은하선 작가가 패널로 출연한 EBS <까칠남녀>. 성소수자임을 밝힌 은하선 작가는 동성애 반대 단체들로부터 ‘음란기구 파는 여자’로 폄하되며 비판을 받아왔다.

해당 프로그램의 류재호 CP는 은하선 작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퀴어문화축제 후원 번호를 <까칠남녀> 담당 PD 번호라며 항의하고 싶으면 여기로 문자 보내라고 한 행동에 대해, 범죄로 볼 수도 있다는 말로 하차를 정당화했다. 틀렸다. 은하선 작가의 행동에 단 하나의 잘못이 있었다면 그가 장난과 놀림의 대상으로 삼은 호모포비아들의 사고력을 너무 높게 예상했다는 것뿐이다. #이 붙은 번호를 개인 번호라고 착각할 리 없다는, 그 스스로 바이섹슈얼이자 출연자인 사람이 제작진에게 항의하라고 번호를 공유할 리 없다는 상식선의 예측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은하선 작가가 패널로 출연한 EBS <까칠남녀>. 성소수자임을 밝힌 은하선 작가는 동성애 반대 단체들로부터 ‘음란기구 파는 여자’로 폄하되며 비판을 받아왔다.

은하선 작가가 패널로 출연한 EBS <까칠남녀>. 성소수자임을 밝힌 은하선 작가는 동성애 반대 단체들로부터 ‘음란기구 파는 여자’로 폄하되며 비판을 받아왔다.

불필요한 장난이었을지는 몰라도 의도적 거짓말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이후 은하선 본인은 환불 절차에 대한 안내와 추후 공지까지 약속했다. 류재호 CP에겐 못마땅한 사건이었을지 몰라도, 본인이 그렇게 느꼈다고 어떤 행동이 그대로 범죄 요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하차의 진짜 이유라면 부실하고, 구실이라면 구차하다. 개인 혹은 집단의 감정에 의존한 도덕적 결단이 도덕적 논증을 대체하며 이 사달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더더욱 문제적이다.

EBS 측의 진짜 의도와는 별개로, 혹은 그들 스스로 믿고 있는 의도와는 별개로, 이 사태가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건 그래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일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다. 왜 까마귀의 날갯짓에 젊은 여성이자 섹스에 대한 담론을 말하는 바이섹슈얼 출연자만이 떨어졌는가, 그것의 포괄적 맥락은 무엇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주는 정치적 메시지는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뜻이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하차가 결정된 정영진 사례와 비교해보라. 이미 이 지면을 통해 그가 <까칠남녀>라는 기획의 의도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어떻게 수행적인 모순을 일으켰는지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가 팟캐스트에 출연해 프로그램과 동료 패널들을 모욕하고 비웃은 건 스스로 프로그램의 가치를 부정한 것에 가깝다. 은하선은 오히려 그 반대다.

성소수자 특집 방영 전부터 부당한 압박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출연자이자 성소수성의 당사자로서 그에 대해 대응한 것을 하차의 이유로 삼는다면, 그것의 정치적 의미는 침묵의 권장이다.

류재호 CP를 비롯한 EBS 측에선 보수 기독교 단체 및 학부모 단체의 압박 때문에 성소수자 출연자를 하차시킨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들의 결정이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부당해도 싸우지 말라. 성소수자는 튀는 행동을 하지 말라. 이것은 EBS 앞에서 반대 시위를 한 이들을 포함해 한국의 호모포비아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은가.

[위근우의 리플레이]‘까칠남녀’ 은하선 하차와 교육방송의 자기부정

그래서 은하선 작가의 하차는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의 성취에 대한 방송사 스스로의 자기부정에 가깝다.

레즈비언을 대표해 <까칠남녀>에 출연한 김보미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존재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존재가 인지되는 게 먼저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성소수자)은 더 떠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이 공중파가, 교육방송이 해야 할 일이다.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 문제가 하나의 정치적 쟁점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공론장 안에서의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하며, 공론장의 일원으로서의 매스미디어는 그렇게 명료화된 정치적 쟁점을 대중적 의제와 대중적 언어로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 수많은 다채널 및 뉴미디어 시대에 그럼에도 공중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정확히 지적했듯 “무시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적 관계다”.

명백히 존재하는 성소수자가 대중의 시야에 비춰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적인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합심한 정치적 배제의 문제다. 존재 자체를 지우길 강요받는 성소수자를 공론장의 동등한 일원으로 소개한 것이 지난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이었다.

그 방송을 반대한 이들도, 반대하진 않지만 시기상조였다 말하는 이들도, 방송은 좋았지만 방송의 당사자였던 성소수자가 불필요한 장난을 했으니 하차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모두 해당 방송의 실천적 효과를 지우고 다시 사회적 약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데 동참 중인 것이다. 하지만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이번 사태는 혐오와 차별의 부정의를 해결하는 데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기다림이란 없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가령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해 “차별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 피해자가 있는 만큼 국가 차원에서 이를 예방하고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에 공감”한다면서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절차적으로 옳은 말 같지만, 바로 그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이 참여가 자유롭고 의견이 평등하게 교환되는 공론장이며, 누구든 그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차별금지다.

사회적 합의의 출발을 위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려준 공중파 프로그램에 쏟아진 비난과 방송국의 부적절한 대응은, 소수자에게 참여 동등을 보장하지 않는 사회적 합의 선행이란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구적인지 실증해준다. 실재하는 혐오와 차별의 권력 앞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공론장은 이미 파산한 것이다.

공론장에서의 합리적 대화가 무너진 지점에서 가능한 것은 불복종운동뿐이다. 이번 사태 이후 손희정, 이현재, 손아람 등 <까칠남녀> 패널들은 은하선 작가 하차에 항의하는 의미로 마지막 녹화를 보이콧했고, 해당 녹화는 취소됐다. 글을 쓰는 지금으로선 어차피 2회밖에 안 남은 방송을 취소하고 종영을 앞당길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때부턴 시청자 차원에서의 불복종운동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위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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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태가 거기까지 가길 바라지 않는다면, 공중파이자 교육방송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할 의지를 아직 잃지 않았다면,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하겠다. <까칠남녀> 마지막 방송에 EBS 류재호 CP와 장해랑 사장, 두 남성이 출연해 최대한 성실히 사과하고, 다른 출연자들의 비판을 경청하며 자신들이 저지른 불의의 실체를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젠더 토크쇼로서의 교육적 역할을 수행적으로 증명해내는 것이다.

이미 권력을 갖춘 위치의 나이 든 남성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큼 방송을 통한 강압 없는 교육의 효과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테니까.

지금 자기 증명이 필요한 건 은하선 작가가 아니라 EB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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