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실루엣···심령사진 속, 누구냐 넌

2018.08.30 09:59 입력 2018.08.30 10:21 수정

작자 미상, 아서 코난 도일 뒤에 찍힌 유령. 1920. 영국도서관 소장.

작자 미상, 아서 코난 도일 뒤에 찍힌 유령. 1920. 영국도서관 소장.

명탐정 셜록 홈즈는 철저한 사실주의자다. 사건 조사에서 필요한 것은 사실뿐이라며 단서를 찾아 나선다. 단서 없는 추리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아서 코난 도일(1859~1930)의 첫 셜록 홈즈 시리즈 <주홍색 연구>에서 홈즈는 고도로 훈련된 추리력의 위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논리학자는 바다를 보거나 폭포 소리를 듣지 않고서도 물 한 방울만으로 그것이 대서양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어디 것인지를 유추해 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만사는 거대한 하나의 사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고리 하나만 보더라도 언제든 전체적인 특성을 알아낼 수 있다.”

과장이 아니었다. 화학실험실에서 처음 만난 존 왓슨의 과거사를 홈즈는 단번에 읽어낸다. 추리의 결정적인 단서는 왓슨의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색. 고도로 훈련된 홈즈의 추리력은 직관이라 추측될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모든 단서를 종합해 군의관이었던 왓슨의 과거를 추론해낸다. 왓슨에게 건네는 홈즈의 첫 인사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오셨군요!”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코팅글리 요정 사진에 대한 책 표지. 1922.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코팅글리 요정 사진에 대한 책 표지. 1922.

셜로키언(셜록 홈즈의 팬)들이 경악했다. <마지막 사건>을 맡은 홈즈가 모리어티 교수를 끌어안고 폭포로 뛰어내려 버렸다. 1893년 매정하게 셜록 홈즈를 죽여버린 코난 도일은 런던심령학회에 가입했다. 말년에는 심령술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접신을 신봉하며 마녀법 폐지에 앞장섰다. 유령과 같은 영적인 존재가 찍힌 심령사진(spirit photography)에도 열광했다. 1920년 코팅글리 마을에서 요정이 사진에 찍혔다. 요정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던 코난 도일은 사진을 들고 카메라 회사인 코닥의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1926년에 발간한 <심령주의의 역사>에서 코난 도일은 당시에 유명했던 심령사진가의 사진술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

난감하다. 사진에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점은,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라자면 ‘그것이, 존재, 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런데 사진에 요정과 유령이 찍혀 있다. 사진에 찍힌 인물을 유령이라고 말했던 바르트의 표현은 단지 은유일 따름일 텐데 사진 속에는 계속 유령이 등장했다. ‘유령은, 존재, 하고’ 있을까?

윌리엄 멈러, <매리 토드 링컨 여사 뒤에 찍힌 링컨 대통령의 유령>. 1870.

윌리엄 멈러, <매리 토드 링컨 여사 뒤에 찍힌 링컨 대통령의 유령>. 1870.

유령은 사진술의 역사 초창기 때부터 사진 속에 출몰했다. 최초의 심령사진가라 불리는 미국의 윌리엄 멈러(1832~1884)는 아주 유명한 유령을 사진 찍었다. 1865년에 암살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유령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찍는다는 윌리엄 멈러의 소문을 들은 링컨 대통령의 미망인 메리 토드 링컨 여사가 윌리엄 멈러를 찾아갔다. 심령사진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미망인은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은 유령의 존재를 증명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미망인의 뒤에 링컨의 혼령이 나타났다. 희미한 윤곽의 링컨 대통령은 그녀의 어깨위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국에도 윌리엄 멈러와 견줄 만한 유명한 심령사진가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다. 목수였던 윌리엄 호프(1863~1933)가 찍은 친구의 사진 속에서 유령이 발견됐다. 유령 사진을 찍었다는 소문은 한 과학자의 귀에 들어왔다. 사별한 아내를 못 잊는 과학자였다. 그는 윌리엄 호프에게 간청했다. 사진 속에 그녀를 초대하라고. 초대장은 망자에게 전달됐다. 과학자의 초상 사진에 출현한 사별한 아내의 사진은 설득력이 강했다. 심령사진가로 이름을 떨친 윌리엄 호프는 심령단체 ‘크루써클’을 만들고 자기 자신이 회장이 됐다.

일본에도 초현실적인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좀 무섭다. 최초의 관절귀신이 등장했던 스즈키 코지의 공포소설 <링>의 주인공에 얽힌 이야기다. 우물에 빠져 죽은 사다코가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내용은 소설의 허구다. 그런데 사다코의 어머니로 나온 시즈코는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초반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쿠라이 도모키치 박사는 영능력(靈能力)을 가진 영매를 통한 심령술을 연구했다. 그가 연구했던 열 명의 영매들은 각기 다른 능력을 갖고 있었다. 영적인 존재를 보는 영시(靈視), 막힌 물체를 훤히 꿰뚫어보는 투시(透視), 생각만으로 사진을 찍는 염사(念寫·thoughtphotography) 능력이다. 염사는 영매인 사람의 생각이 그대로 필름에 현상되기 때문에 서양의 심령사진과 달리 카메라가 필요 없었다. 염사 현상을 발견한 도미키치 박사는 1931년 영국으로 건너가 심령사진가인 윌리엄 호프에게 또 다른 심령사진인 염사 사진을 소개했다. 시즈코는 후쿠라이 박사가 연구했던 염사 능력을 갖고 있던 영매 중의 한 명이었다.

윌리엄 호프, <한 노부부의 뒤에 찍힌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한 유령>. 1920.

윌리엄 호프, <한 노부부의 뒤에 찍힌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한 유령>. 1920.

초현실적 현상을 기록한 사진들에 대한 단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19세기 중반은 심령술이 발흥했던 시기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소통할 수 있다는 심령술에 대한 믿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출현한 기술이 촉매재가 됐다. 스미소니언 미국 종교역사 큐레이터 피터 맨소는 2017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죽은 자를 만나는 방법’이라는 칼럼에서 심령술을 믿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힘의 존재 근거를 전기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심령술사 중 제일 유명했던 뉴욕 하이즈빌의 폭스 자매는 죽은 자와 소통하는 그들의 능력을 전기 신호인 전보와 비교했다.”

사진술이 완성될 무렵, 미국에 또 하나의 희대의 발명품이 등장했다. 실시간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 새뮤얼 모스의 전보가 그것이다(공교롭게도 전보를 발명한 모스도 사진을 발명한 다게르와 마찬가지로 화가였다.). 모스의 첫 전보 내용도 심령술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44년 5월24일 워싱턴에 있던 모스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다른 도시인 볼티모어로 송신한다. “신은 무엇을 만드셨는가?” 이에 심령술사 폭스 자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전보는 사무엘 모스의 전보보다 앞선 것이다.” 심령술을 믿는 신자들도 동조했다. 그들은 영적인 교류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을 창간했는데, 매체 이름이 ‘스피리추얼 텔레그래프’였다. 귀신과 대화하는 모임인 교령회에 참여한 신자들은 서로의 몸을 구리줄로 연결시켰다. 죽은 자의 영혼과 교접하는 영매들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배터리’였다.

영적인 존재와 교류한다고 주장했던 심령술사들은 사람의 육안으로 안 보이던 것까지 세세하게 잡아내는 사진술에도 매료됐다. 지금에야 당연한 것처럼 떠올리는 이미지들은 카메라 기술이 발전되기 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영상들이었다. 1878년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달리는 말을 사진 찍기 전에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의 말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림 속에 나타난 달리는 말의 이미지들은 앞발과 뒷발이 전후로 쭉 뻗은 채 공중에 도약해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진에 찍힌 달리는 말의 모습은 달랐다. 공중에 떠 있는 상태의 말은 두 다리가 오므려진 상태였다. 바닥에 떨어지는 왕관 모양의 물방울에 대한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러한 사진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물방울이 그러한 모습으로 떨어진다고 인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시지각 능력은 그렇게 빠른 순간을 포착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사진은 전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를 증명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을 사진 찍을 수 있다는 심령사진가 윌리엄 멈러의 주장은 당시 분위기와 안성맞춤이었다. 남북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사진 속에서라도 이 세상을 떠난 가족들과 재회하고 싶어했다. 상실의 아픔은 큰 돈벌이였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달리는 말의 연속 동작>. 1878.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달리는 말의 연속 동작>.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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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술의 원리에 정통한 사람들은 멈러의 심령사진술을 의심했다. 에이브러햄 보가더스라는 한 사진가는 멈러가 찍었던 링컨의 유령 사진을 찍었다. 물론 보가더스가 찍은 링컨 유령 사진은 심령사진이 아니라 이중노출로 찍은 연출사진이었다. 멈러는 가짜 심령사진 판매 혐의로 뉴욕 경찰에 체포돼 법정에 섰다. 일대 사기극으로 끝날 줄 알았던 멈러의 심령사진술은, 그러나 무죄 판결을 받으며 생명력을 이어갔다. 사별한 가족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계속 윌리엄 멈러를 찾아갔다.

영국의 윌리엄 호프 심령사진도 도마 위에 올랐다. 멈러와 마찬가지로 호프의 심령사진도 이중노출로 찍혔다는 의혹이었다. 한 심령학회 조사관이 특정 표시가 있는 사진 건판을 윌리엄 호프에게 제공하며 심령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호프가 찍은 심령사진에는 조사관만 알고 있는 특정 표식이 없었다. 윌리엄 호프가 미리 준비한 조작된 사진 건판을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호프의 심령사진이 조작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제시됐지만 심령술을 믿는 사람들을 깨우치지는 못했다. 심령학회 회원인 코난 도일도 호프의 심령사진을 지지하며 가짜라는 증거를 제시한 조사관을 비난했다. 다음은 셜록 홈즈 저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상상하기 힘든 코난 도일의 말이다.

“어떤 현상이 불가사의하고 경이롭게 느껴진다면 법칙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기적은 정확한 법칙을 따른다.”(사이먼 파크 <코넌 도일의 말> 마음산책)

코난 도일은 말을 바꾸었다. 단서가 없는 추리는 추측일 뿐이라던(<보헤미안 스캔들>에서), 초자연적 현상이라면 수사할 필요도 없다는(<버스커빌 가문의 개>에서) 셜록 홈즈의 말을 배반했다. 홈즈의 죽음에 격분했던 셜로키언들처럼 작가를 비난해야 할까?

뛰어난 추리력을 갖춘 인물을 창조해낸 비범한 작가였지만 아서 코난 도일 역시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코난 도일이 심령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부친의 사망이었다. 가족들의 죽음은 계속 이어졌다. 첫 번째 부인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들과 남동생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아홉 명의 가족이 코난 도일의 곁을 떠난 것이다. 심령술을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거리가 됐지만 코난 도일은 어쨌든 영매를 통해 죽은 아들과 조우했다(고 주장했다).

아브라함 보가더스가 찍은 링컨 유령 사진. 윌리엄 멈러의 재판에서 이중 노출로 심령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증거로 사용됐다.

아브라함 보가더스가 찍은 링컨 유령 사진. 윌리엄 멈러의 재판에서 이중 노출로 심령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증거로 사용됐다.

19세기 후반,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사진 속에 출몰했던 유령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유령의 역사>(오롯 출판)를 서술한 프랑스 역사가 장클로드 슈미트는 ‘산 자가 죽은 자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유령의 출현은 억울하게 죽게 된 망자의 귀환이 아니다. 살아있는 자들이 생각하는 억울했던 망자의 기억에서 유령이 나타난다. 코난 도일과 링컨 대통령의 미망인이 심령사진을 믿었던 것은 사별한 가족들을 잊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는 지금의 현대인들은 망자들에 대한 기억을 가두어 놓는다고 장클로드 슈미트는 걱정한다. 현대 사회의 죽음은 감추어진 죽음이다. 슈미트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며 유령의 역사를 끝맺는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머지않아 다시 나타날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유령처럼 수수께끼가 풀리고 마법이 깨질 때까지 안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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