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선, ‘시선의 혁명’을 이루다

2018.06.21 10:35 입력 2018.06.21 10:45 수정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관광객들이 러시아 전통복장을 한 여성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관광객들이 러시아 전통복장을 한 여성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유럽을 배회하던 하나의 유령이 러시아에 도착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10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청산한 블라드미르 레닌을 태운 봉인열차는 적국 독일을 통과해 상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광장에 모인 농민들, 노동자, 군인들은 레닌의 러시아 입성을 열렬히 환호했다. 그리고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인터내셔널가! 레닌이 외쳤다.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

상트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본부는 레닌의 4월 테제를 발표했다. 당면한 혁명을 완수할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였다. 제국주의 전쟁 반대, 지주의 토지 몰수 및 국유화, 제3인터내셔널 창설…. 6개월 뒤인 붉은 10월, 군중들은 구세력의 온상인 겨울궁전으로 쳐들어갔다. 모든 권력은 농민, 군인, 노동자로 구성된 소비에트로 넘어갔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이다. 격랑의 파도를 현장에서 지켜봤던 미국 저널리스트 존 리드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었다.

알렉산더 로드첸코 <라이카를 든 소녀> 1934. / 스페이스아트J 제공

알렉산더 로드첸코 <라이카를 든 소녀> 1934. / 스페이스아트J 제공

여기는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7월15일까지 러시아 11개 도시에서 열리는 2018월드컵 개최 도시 중의 하나이자 한국 대표팀의 베이스캠프다. 수도 모스크바의 북서쪽, 핀란드만을 마주한다. 지난 14일 월드컵 개막을 축하하는 페스티벌이 겨울궁전 인근 광장에서 열렸다. 세계 각국의 축구팬들은 광장에 모여 세계 축구 축제의 시작을 환호했다. 자국 국기를 든 이란, 모로코 팬들은 다음날 열릴 그들의 경기를 응원하며 넵스키 대로를 활보했다. 축제는 밤새 지속됐다.

6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해가 지지 않는다. 자정이 지나 해가 지나 싶더니 바로 날이 밝는다. ‘백야의 도시’라는 별명 이외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다양한 별명을 갖고 있다. 북쪽의 베네치아, 유럽을 향한 창, 유령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원래 핀란드만의 늪지대였다. 300여년 전 표트르 대제(1682~1725)가 적국 스웨덴의 견제와 유럽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도시를 세웠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수도 천도였다. 도시는 그래서 성스런(sanit) 표트르(Peter) 대제의 도시(burg), 상트페테부르그(Sanit Peterburg)다. 러시아식으로는 ‘페트로그라드’다. 200여년이 흐른 후 도시는 이름을 바꿔 달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세기의 혁명가 동지 레닌을 추앙하며 그들의 땅을 ‘레닌그라드’라고 불렀다.

레닌의 혁명은 정치에서 끝나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하부구조의 전복은 상부구조로 이어졌다.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혁명에 참여했듯이 예술인들도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부르주아들의 고상한 예술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예술도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 구축을 견인해야 했다.

알렉산더 로드첸코의 계단. 1929.

알렉산더 로드첸코의 계단. 1929.

구축주의(constructivism) 예술의 선구자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삶 속의 예술을 표방했다. 그는 볼셰비키혁명 3주년을 기념해 제3인터내셔녈 기념탑 모형을 제작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인 에펠탑보다 90여미터 높은 396미터의 인공구조물이었다. 인터내셔널 기념탑에는 코민테른의 강당과 방송국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기술적인 문제로 기념탑 건설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형성을 강조한 타틀린의 기하학적 추상성은 알렉산더 로드첸코, 엘 리시츠키 등의 젊은 예술가들이 이어받아 새로운 상부구조를 건설하는 정신적 지주가 됐다.

예술 타도! 테크닉 만세! 로드첸코는 사진의 메시지 전달력에 주목했다. 사진은 다른 어떤 매체보다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문자를 모르는 농민들에게도 효과적이었다. 사진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수단이었다. 로드첸코의 렌즈는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새롭게 구성했다.

‘여러분은 현대사진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점이 배꼽 시점을 제외한 하이 앵글, 로 앵글, 혹은 다른 시점인 것을 이해하는가? 대중이 새로운 시점에서 보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오브제를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과 위치에서 촬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로드첸코의 사진전 <혁명의 사진, 사진의 혁명>이 지난해 아트스페이스J에서 열렸다. 로드첸코는 응당 그러해야만 할 것 같은 위치에서(배꼽 시점) 세상을 바라보기를 거부했다. 이 세상에 눈이 달린 피조물이 비단 인간일 뿐이겠는가? 로드첸코의 시선은 인간의 시선을 전복한다. 벌레의 눈, 하늘을 나는 새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봤다. 극단적인 로와 하이 앵글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파격적이었다. 그는 빌딩의 소방 사다리에서 내려오는 사람(<Fire Escape> 1925)과 트럼펫 연주자(<Pioneer with a Trumpet> 1930)를 벌레처럼 낮은 위치에서 바라보고, 공중전화로 통화하는 여인을(<Courier Girl> 1928) 날아가는 새처럼 포착했다. 로드첸코의 시선이 배꼽 시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된 카메라 기술 덕분이었다. 작고 가벼운 라이카 카메라는 실험적인 사진작가들의 무기가 됐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영화에 등장할 것만 같은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있다. 어깨에 라이카 카메라를 둘러 멘 사진의 구도는 심하게 기울어졌다. 로드첸코가 애용했던 대각선 구성이 돋보이는 <라이카를 든 소녀(1934)> 사진이다. 격자로 교차하는 대각선은 감옥 창살처럼 보이고, 소녀는 거기에 갇혀 있다. 소녀가 불안해 보이는 이유다. 1929년에 찍은 <계단>에서도 긴장감 도는 대각선 구도가 반복된다. 아기를 안고 계단을 오르는 여인의 뒷모습이 불안해 보이는 이유도 삐뚤어진 사선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한편의 영화에서 떠오르는 연상 작용에도 기인한다. 로드첸코와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이다.

영화 전함포템킨 오데사의 계단 장면, 로드첸코의 계단, 영화 언터처블의 총격 장면.

영화 전함포템킨 오데사의 계단 장면, 로드첸코의 계단, 영화 언터처블의 총격 장면.

무성 영화이지만 전함 포템킨은 지금 다시 봐도 긴장감이 감돈다. 대살육의 현장 한가운데 천진난만한 표정의 아기를 실은 유모차가 위태롭게 계단을 굴러 내려온다. 영화의 백미로 손꼽히는 오데사의 계단 장면이다. 혼비백산 도망치는 군중들, 그들을 향해 발포하는 군인들 그리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내려오는 유모차의 교차 편집은 관객들의 동공을 확장하게 만든다. 상이한, 상반된, 속성이 다른 이미지들의 몽타주 편집은 서로 충돌하며 새로운 의미와 감성을 만들어낸다. 마치 정반합의 헤겔 변증법 같다. 영화 편집의 교과서가 된 오데사의 계단 장면은 훗날 할리우드 갱스터 영화 <언터처블(1987)>에서도 되풀이 됐다. 에이젠슈타인에 대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오마쥬다.

몽타주는 구축주의자들의 인쇄매체에도 활용됐다. 상이한 이미지들의 병치와 혼합은 새로운 의미를 구축했다. 한 사진의 사건이나 피사체는 가위로 오려져 새로운 공간에 삽입됐다. 원래는 익숙했고, 당연해 보였던 그 사건이나 피사체의 외양은 비연속적인 장면에 재배치됨으로써 정치적인 의미를 전한다고 존 버거는 포토몽타주의 효과를 설명했다.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문자나 그림이 추가되기도 했다. 로드첸코, 리시츠키 등이 활용한 몽타주 기법은 1922년에 조직된 예술좌익전선 기관지 레프(LEF)에도 활용됐고, 대중 계몽을 위한 포스터 제작에도 쓰였다.

2018러시아월드컵 공식 포스터 / fifa

2018러시아월드컵 공식 포스터 / fifa

2018러시아월드컵 공식 포스터는 복고풍이다. 흑거미라 불리는 전설의 골키퍼 야신이 공을 막는 그림의 포스터다. 작가 이고르 구로비치는 1920년대 러시아 후기 구축주의에서 영감을 받았다. 특유의 찐빵 모자를 눌러 쓴 야신이 날아오는 공을 향해 팔을 쭉 뽑는 모습은 로드첸코가 애용했던 대각선 구도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축구공에 덧입힌 러시아 땅덩이의 모습도 그가 시도했던 새의 눈으로 바라본 시점이다. 축구경기장을 상징하는 녹색의 동심원, 축구공에서 발산되는 주황색의 가시광선에서도 구축주의의 기하학적 특성을 엿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축구도 녹색 도화지 위에 그리는 기하학이다. 골라인과 터치라인으로 구성된 직사각형 녹색 그라운드는 하프라인, 센터서클, 패널티에어리어, 골에어리어, 코너에어리어 등의 선과 원으로 구성된다. 직선과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축구공, 공중 도약과 질주를 반복하는 선수들의 움직임도 선으로 표시될 수 있다. 경기장 전체는 하나의 커다란 원이다.

필드 위의 사진기자들은 축구선수처럼 보이지 않는 선을 추적한다. 축구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축구공이 도달할 지점을 먼저 예측하고 렌즈를 돌린다. 영특한 선수들도 사진기자들의 시선을 알고 있다. 득점에 성공한 공격수는 특유의 세리모니를 펼치며 사진기자를 향해 달려간다. ‘죽음의 조’라 불릴 정도로 어려운 경기 일정이겠지만 사진기자로 향해 달려가며 환호하는 한국 대표팀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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