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음악상 선정의 변이 날린 그 ‘어퍼컷’은 어디로

2020.03.06 16:12 입력 2020.03.06 16:14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오명과 누명에 맞선 시원한 한 방?그 펀치는 누가 뻗고 누가 맞았나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으로 선정된 검정치마의 <THIRSTY> 앨범 커버. 허버트 L 스트록 감독의 1957년작 <I Was a Teenage Frankenstein>의 한 장면을 사용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으로 선정된 검정치마의 <THIRSTY> 앨범 커버. 허버트 L 스트록 감독의 1957년작 <I Was a Teenage Frankenstein>의 한 장면을 사용했다.

여성 착취의 모티브가
반성 없이 재현된다고 비판 받은
검정치마의 ‘THIRSTY’를
최우수 모던록 음반에 뽑은 한대음

어퍼컷이란 단어를 발화했을 뿐
어떤 타격도 시도하지 않았고
논쟁의 링에 뛰어드는 대신
무책임하게 레토닉만 던졌다

하나의 펀치가 발화됐다. ‘휘둘렀다’가 아닌 ‘발화됐다’다.

지난 2월 말 한국대중음악상(이하 한대음) 최우수 모던록 음반으로 선정된 검정치마(조휴일)의 <THIRSTY>에 대해 한 선정위원은 “특정 이념에 기댄 ‘틀린 질문’으로 예술가의 표현할 자유를 농락한 이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판단과 해석의 자유로 이 앨범에 오명과 누명을 덧씌웠다. ‘최우수 모던록 음반’이라는 결과는 조휴일이 한 컷을 가져와 앨범 커버로 쓴 허버트 L 스트록의 영화와 두 번째 곡 제목으로 쓴 샘 멘데스의 영화는 고사하고 지난 앨범(<Team Baby>)과 이번 앨범 간, 곡과 곡 사이 맥락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작품을 비난한 모든 이들에게 날리는 시원한 어퍼컷이다”라는 공식적인 선정의 변을 남겼다.

그가 겨냥한 건, 해당 음반과 뮤지션에 여성혐오의 혐의를 둔 비판들인데, 이 비판들이 “오명과 누명”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대음 수상을 한 것이 그들에 대한 어퍼컷, 그것도 시원한 어퍼컷이 된다는 이야기다. 우선 단어의 조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어퍼컷은 어떻게 시원할 수 있는가. 아마도 맞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닐 것이다. 어퍼컷을 한 대 맞고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경험이나, 어퍼컷에 앓던 이가 빠진다거나, 어퍼컷이 지압처럼 시원할 가능성은 배제하겠다.

그렇다면 어퍼컷을 날리거나 구경하는 입장에서의 시원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도 맞을 만한 사람이 맞았다는, 본인 혹은 본인이 이입한 누군가의 정당한 펀치가 정당한 위치에 꽂혔다는 것에 대한 사필귀정의 통쾌함을 뜻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펀치는 누가 뻗고 누가 맞았나. 왜 시원한가. 이것은 벌어진 사건에 대한 진술인가, 이 발화 자체가 펀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인가.

물론 조금 더 정석적인 접근도 가능하다. 그가 부당하다고 전제한 “특정 이념에 기댄 (…) 판단과 해석”의 관점에서 다시 <THIRSTY>에 대한 비평적 반박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가령 박정훈 ‘오마이뉴스’ 기자는 브런치 매거진을 통해 <THIRSTY>에 수록된 ‘광견일기’의 화자와 1집 수록곡 ‘강아지’의 화자를 연결해(선정의 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앨범 간, 곡과 곡 사이 맥락”을 고려해) ‘우리가 알던 여자애는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가 됐고’(강아지)란 가사가 ‘내가 원하는 건 오 분 길게는 십오 분 (중략) 내 여자는 멀리 있고 넌 그냥 그렇고’(광견일기)라는 가사로 반복되며 여성 착취의 모티브가 반성 없이 재현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다른 반론도 가능하다. “두 번째 곡 제목으로 쓴 샘 멘데스의 영화”를 고려해 ‘Lester Burnham’(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이란 곡을 보더라도 ‘내 마음엔 커다란 구멍’이라는 가사는 여전히 남자 화자의 자기연민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정작 노래 제목으로 쓰인 Lester Burnham이란 이름이 Humbert Learns(<로리타>의 주인공)의 애너그램이며 이미 여기에 소아성애와 자기애로 점철된 중년 남성에 대한 경멸과 패러디가 담겨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해당 가사야말로 “맥락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것이지 않은가?

이 해석이 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당 가사들과 태도에 대한 비판이 뮤지션의 디스코그래피와 레퍼런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단정은 더더욱 과하다. 이러한 과도함까지만 지적하고 다시 처음의 문제제기로 돌아가겠다. 어퍼컷의 행방에 대하여.

왜 어퍼컷이 중요한가. 그 펀치의 궤적만이 논란이 된 선정의 변이 실제로 수행한 일이 무엇인지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어퍼컷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최우수 모던록 음반’이라는 결과는 (…) 시원한 어퍼컷이다”라는 문장에서 ‘최우수 모던록 음반이라는 결과’는 ‘시원한 어퍼컷’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즉 최우수 모던록 음반이라는 결정을 내린 한대음의 행위가 어퍼컷을 날리는 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그는 실제로 한대음이 시상을 통해 어퍼컷을 날렸다는 사실을 진술한 걸까.

한 명의 선정위원이 한대음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당연한 지적과 별개로 이 해석은 두 가지 이유로 좌초하는데, 만약 그런 의미였다면 글쓴이는 한대음이 ‘이번 수상작에 대한 비판은 부당한데 이 작품이 수상했다는 사실이 비판이 틀렸다는 반증(어퍼컷)이 되기 때문이다’라는 민망한 순환논증을 받아들이는 비논리적 집단이라고 공표하거나, 작품성에 집중한 공정한 평가 대신 ‘특정 이념’에 대한 반격을 위해 수상작을 결정하는 소인배들이라고 고백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어떤 방향으로든 상의 권위가 무너지기에 어퍼컷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하체가 무너진 복싱 선수가 날리는 어퍼컷의 궤적이란 얼마나 보잘것없겠는가. 하여 해당 문장은 한대음이 실제로 한 일에 대한 사실 진술이라기보다는, 글쓴이가 한대음의 선택을 어퍼컷으로 정의함으로써 이 선택이 “예술가의 표현할 자유를 농락한 이들”에게 어퍼컷을 날리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선언으로 보는 게 좀 더 온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 선언은 결과적으로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실망스러울 만큼 단순하다. 그는 ‘어퍼컷’이란 단어를 발화했을 뿐, 실제로 어퍼컷에 준하는 어떠한 타격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상을 받았으니
그 비판은 틀렸다는 반증이라고?
특정 이념을 반격하기 위해
수상을 결정했다고 고백한 셈

성실히 논쟁적 주먹을 뻗는 것이
공론의 장에 선 비평자의 책무
어설픈 사이다 썰은 비평이 아니다

한대음 수상작 선정 이후 저 선정의 변에 대해 현역 뮤지션이나 심지어 일부 동료 선정위원들까지 어퍼컷이란 표현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지만, 사실 비평가가 어퍼컷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틀렸다고 생각되는 해석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은 공론장 안에서 비평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핵심적 요소다. 저 짧은 평이 문제인 건, 비평가가 실제로 펀치를 휘두르고 그에 대한 반박까지 감내하는 논쟁의 링에 뛰어드는 대신 ‘어퍼컷’이라는 레토릭만 무책임하게 던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평보단 차라리 확증편향의 풍문에 가까워 보인다.

여성주의적 비판이 이번에 제대로 한 대 맞았대(아이고 고소해라), 라는 풍문. 검정치마에 대한 저 선정의 변이 타당하다고 수용되려면, 최소한 검정치마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이 “맥락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이 암묵적 동의를 얻을 정도로 논의가 진행 및 종결되었거나, 한대음의 권위가 수상에 대한 비판이 틀렸다는 걸 보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검정치마의 여성혐오적 가사에 대한 질문은 앨범을 둘러싼 맥락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몇 가지는 유효하며, 한대음의 권위에 대한 과대한 해석은 오히려 이들 비평가 집단에 대한 신뢰를 해치는 역설이 발생한다. 하여 시원한 어퍼컷은 어디에도 없다. 휘두른 사람도 없고 맞은 사람도 없다. 단지, 그랬더라는 실체 없는 풍문을 듣고 시원해할 일련의 청자들이 가정될 뿐이다.

이번 검정치마 선정의 변에 대한 논란이 한 비평가의 부적절한 단어 선택에 대한 트집 잡기 혹은 해프닝 이상의 의미를 갖는 건 이 지점이다. 비평이 풍문으로 대체되어서는 안된다는 원론 때문만은 아니다. 해당 평이 지난 몇 년간 시도된 여성주의적 비평에 대한 반발로 시도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문적 비평가로서 텍스트에 대한 논의가 여성혐오 유무만으로 소급되는 것을 우려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이에 대한 진정성을 감안하더라도, 비평가가 할 일은 이러한 논의에 수행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어야지 한 줌의 권위로 논쟁의 종결 선언을 하는 것이어선 안된다. 선후관계를 오해해선 안된다. 마음에 안 드는 대상에게 펀치를 휘두르기 위해 공론장이라는 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장이라는 링의 가치를 증명하고 지키기 위해 성실히 논쟁적 주먹을 뻗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평의 책무다.

[위근우의 리플레이]한국대중음악상 선정의 변이 날린 그 ‘어퍼컷’은 어디로

하지만 왜 유독 여성혐오 비판이라는 상대에 대해서만, 조금 더 확장하면 표현의 자유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을 묻는 상대에 대해서만 비평의 책무를 포기하고 서둘러 승리 선언을 하는가. 왜 정말로 어퍼컷을 날리는 대신, 상대가 어퍼컷에 맞았더라는 ‘사이다 썰’로 변죽을 울리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 보장되어야 한다는 가정에 기대서만 타격을 펼칠 수 있던 문화적 리버럴리스트 비평이 그 가정 자체를 되묻는 상대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곤혹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저 섣부른 정신 승리의 제스처야말로 패배에 대한 두려움의 증거 아닐까. 하지만 비평의 실패는 논쟁에서의 패배가 아닌 비평의 책무에 대한 포기로 결정된다. 그러니, 갈고닦은 어퍼컷을 제대로 보여주거나 제대로 카운터를 맞아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승리와 패배를 떠나 오직 그것만이 비평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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