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뛰어야 살고 살기 위해 뛰는 원전 노동자…'최전선의 사람들'

2022.04.22 17:00 입력 2022.04.22 23:09 수정

최전선의 사람들
가타야마 나쓰코 지음·이언숙 옮김 | 푸른숲 | 432쪽 | 2만3000원

<최전선의 사람들>은 2011년 3월부터 9년간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현장 노동자들을 취재한 르포르타주다. 사진은 2012년 제1원전 4호기 수조에서 핵연료를 꺼내는 노동자들의 모습. 도쿄전력 제공

<최전선의 사람들>은 2011년 3월부터 9년간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현장 노동자들을 취재한 르포르타주다. 사진은 2012년 제1원전 4호기 수조에서 핵연료를 꺼내는 노동자들의 모습. 도쿄전력 제공

“근처 대기 장소에서 현장까지 이동 시간을 감안하면 한 사람이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5분 내외였다. 감독이 ‘출발’ 신호를 보내면 작업자들은 일제히 전력 질주한다. 연장을 들고 발판을 딛고 올라 볼트 한두 개를 조이면 돌아와야 한다. 묵직한 텅스텐 조끼를 입었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

장면만 뚝 떼어놓고 보면 괴이한 게임 같다.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선 일상이 된 노동의 현실이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제1원전 1·3·4호기에서 수소 폭발이 발생했다. 영화라면 이쯤에서 비감 어린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11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사고는 여전히 수습 중이며 재난은 진행 중이다. 지금도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는 매일 약 4000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고농도 방사선을 내뿜는 핵연료파편(데브리)과 사용후핵연료 등 각종 잔해를 냉각·반출·처리하는 일, 이 과정에서 발생한 수백만t의 오염수를 수습하고 보관하는 일, 궁극적으로 원전의 완전한 ‘폐로’에 다다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일들이 ‘사람’의 손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치사량의 방사선이 시시각각 덮쳐오는 현장이지만 사람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최전선의 사람들>은 후쿠시마라는 최전선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책이다. 책은 거대한 참사의 여파를 막아낸 사람들의 노고를 충실히 기록하는 한편, 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대우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에 비판의 날을 세운다. 도쿄신문 사회부 기자인 저자 가타야마 나쓰코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부터 2019년까지 9년간 후쿠시마 제1원전 현장을 취재했다. 100여명에 달하는 취재원과 인터뷰했고 179권의 취재 노트로 기록했다. 그가 만난 취재원 대부분은 “쓰다 버려지는 일회용품” “방사선 총알받이” 등으로 스스로를 비유하던 원전 노동자들이었다. 대형 재난 앞에 국가가 감당하지 않은 책임을, 온몸으로 떠맡은 이들의 9년이 이 책에 담겼다.

책은 저자가 140여회 연재한 기획기사 ‘후쿠시마 작업자 일지’를 토대로 한다. 사고 현장에 내려진 ‘함구령’을 뚫고 파친코장, 노래방, 술집,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털어놓은 노동자들의 말들을 그들이 직접 써내린 ‘작업 일지’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9년간 기록된 노동자들의 말들은 저마다 다채롭다. 일과 삶, 가족 등 주제도 다양할 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사람 안에서 말들이 충돌할 때도 있다. 노동자 료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고 전부터 후쿠시마 제1원전 하청업체 직원이었던 그는, 지진 이후 안전한 곳으로 피난한 가족을 두고 홀로 후쿠시마로 향했다. 업체 사장마저 방사선량이 더 안정되면 돌아가자며 말렸지만, 료씨는 완고했다. 고향에 기여하고 싶었고, 그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아이들과 아내까지 그를 따라 후쿠시마로 돌아왔다. 2011년에 그렇게 완고했던 료씨의 마음은 2018년 “이제 후쿠시마 제1원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문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책과 삶]뛰어야 살고 살기 위해 뛰는 원전 노동자…'최전선의 사람들'


후쿠시마 참사 여파를 막아낸 건
각자의 선의와 필요로 현장에 모인
노숙자·주민·폭력배 등 사람들

9년간 기록한 다채로운 목소리선
“방사선 총알받이”라는 자조도
“고향 되찾겠다”는 책임감도 보여

피폭량 한도 지키려는 몸부림에도
사고 축소 급급한 정부의 무관심…
국가는 ‘사람’을 언제쯤 지켜낼까

‘후쿠시마 원전 노동자’라는 하나의 말로 묶인다고, 이들의 얼굴까지 하나일 순 없다. 하루 벌어 사는 막일꾼이나 노숙인부터 “후쿠시마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는 음식점 종업원과 우체국 직원, “마침 하는 일이 없어서”라는 고미술상, “일당이 괜찮아서”라는 파견 노동자, 심지어 조직폭력배들까지 책은 ‘죽음의 도시’로 몰려든 개개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물론 “돈이 필요했다” “갈 곳이 원전밖에 없다”며 솔직히 털어놓는 이들도 있었지만, 노동자 중 다수는 “우리 힘으로 고향을 되찾고 싶다” “방사선을 막지 못하면 우리 아이들에게 쏟아져 내릴 것이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원전에서 일해왔다는 책임감이 있다” 등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긴급 작업에 뛰어든 이들이었다. “사고를 낸 것도 사람이지만 수습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선한 의도가 이들을 40초 만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시간당 650㏜(시버트)의 고선량 방사선이 존재하는 현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선한 마음은 쉽게 짓밟혔다. 책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원전에 온 노동자들의 모습과, 이들을 이용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지킬 생각은 없는 정부와 기업의 행태를 대조하듯 비춘다. 방사능 피폭 위험이 산재하는 현장인 만큼 당연히 노동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점프슈트 방호복을 입고, 옷 틈새로 방사성 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손목과 발목 부분에 테이프를 감는다. 그다음 커다란 필터가 달린 전면 마스크를 쓴다. 손에는 면장갑과 고무장갑을 이중·삼중으로 끼고 작업화 위에는 비닐 커버를 씌운다.” 상황에 따라 15~16㎏짜리 텅스텐 조끼나 비닐 판초를 껴입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방사성 물질이 몸에 직접 닿는 것을 막아주긴 하지만 대부분의 방사선이 방호복을 투과한다”.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막아주지 못하는 것은 방호복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을 위험으로 내모는 것은 사고를 축소하는 데만 몰두한 정부의 무관심이다. 저자는 “우리는 방사선량에 좌우되는 단역 배우”라고 자조하는 노동자 기씨의 말을 기록한다. 기씨 역시 료씨처럼 사고 전부터 제1원전에서 일하던 하청업체 직원이었다. 사고 직후 빠르게 원전으로 돌아와 궂은일을 도맡아온 그지만, 그는 현장에서 해고와 재고용을 거듭하며 직무가 바뀌는 일을 반복해서 겪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도쿄전력에서 대형 건설업체, 그 밑으로 7·8차 하청까지 줄줄이 얽혀 있는 다중 하청 구조였다. 원전 사고 이후 투입된 노동자들의 방사선 피폭량 한도는 5년간 100m㏜(밀리시버트) 또는 긴급 작업 시 250m㏜로 정해져 있는데, 이를 기준 삼아 매년 정해둔 피폭량 한도를 넘어서면 작업자들은 일터를 떠날 수밖에 없다. 본사나 원청 직원의 경우 피폭량 한도가 초과되지 않도록 고선량·저선량 업무를 번갈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지만, 자신이 몇차 하청업체 소속인 줄도 모르는 노동자들은 고선량 작업만 연달아 맡다 빠르게 버려지는 “고선량 요원”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도쿄전력 제공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도쿄전력 제공

하청업체 간부들은 노동자들에게 피폭량을 측정하는 휴대용 선량계를 가지고 다니지 않도록 지시하거나 납판으로 선량계 덮개를 만들기도 했다. 하청업체들은 작업자들이 피폭량 상한에 도달해 경쟁입찰에서 원전 일을 수주하지 못할까봐 늘 전전긍긍했다. 고선량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늘 “뛰어”를 외치며 이동 시간을 줄이는 것 역시 정해진 피폭량 한도를 지켜 해고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저자는 후쿠시마 원전 노동자들이 열악한 대우 속에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체르노빌 원전 노동자처럼 조직을 결성하지 못하는 이유로 다양한 하청으로 소속이 조각난 상황을 꼽기도 했다.

하청의 ‘급’이 낮은 노동자일수록 ‘피폭량 한도’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지만, 정부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저자는 정부와 기업에 있어 ‘피폭량 한도’는 그냥 숫자였음을 지적한다. 그는 “2011년 3월 정부특례로 후쿠시마 제1원전 긴급 작업의 방사선 피폭량 한도가 100m㏜에서 250m㏜로 상향 조정됐다”고 밝히며 “이때 당국의 논의에서 상향 수치를 500m㏜까지 올리고 구명 작업 지원자의 피폭 한도를 무제한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2011년 12월16일, 갑자기 이루어진 “사고는 수습됐다”는 정부의 단언도 현장과 노동자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와 무시에서 비롯했다. 당시 저자와 만난 노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며 현장의 위험을 토로했다. ‘사고 수습’ 선언의 여파는 결국 노동자들에게 향했다. 위험수당은 사라지고 일당도 내려갔다. 기업이 내던 숙박비와 식비도 노동자 몫으로 돌아갔다. 현장의 위험성은 변한 것이 없는데 ‘보여주기식 정책’으로 마스크와 방호복만 가벼워졌다.

저자는 “작업자가 계속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며 “사람을 지키는 국가를 바란다”고 썼다. 재난 앞에서 국가의 책무는 무엇보다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에 있음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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