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퀸’ 문소리

2011.05.25 14:07 입력 2011.05.25 14:14 수정
배장수 선임기자

# ‘한공주’로 공주 등극

문소리(文素利)는 배우다. 진짜 배우다. 연기 이상의 연기를 하는 ‘연기 퀸’이다. 연극영화과 출신이 아니고, 동숭동에서 잔뼈가 굵은 이도 아니지만, 연기력만큼은 남다른 깊이와 넓이를 지녔다. 개성 있는 연기를 통해 인기를 획득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actor star)다. 강수연·전도연과 함께 독보적인 여배우로 손꼽힌다.

세 여배우는 칸·베를린·베니스, 이른바 3대 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주인공이다. 강수연은 <씨받이>(감독 임권택)로 1987년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문소리는 <오아시스>(감독 이창동)로 2002년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전도연은 <밀양>(감독 이창동)으로 2007년 제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움켜쥐었다.

영화 ‘오아시스’에 출연한 영화배우 문소리 (2002.07)

영화 ‘오아시스’에 출연한 영화배우 문소리 (2002.07)

<오아시스>는 문소리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문소리는 이 영화에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로 완벽하게 변신, 국내외 상을 휩쓸었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제23회 청룡영화상 여자신인상, 제10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올해의 주연연기상(여),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 및 신인여우상 등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등극했다. 두 번째 영화로 이처럼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사례는 국내 배우 가운데 문소리가 유일하다.

문소리는 기자회견에서 “앞으로도 영화를 계속하고 싶다”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상 받은 것 다 잊고 <오아시스>를 만들던 마음자세로 임하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앞으로는 더 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박하사탕>(2000) 이후 2년 간 충무로의 부름을 받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과 기대감을 드러냈다. <박하사탕>으로 주목을 끌었지만 이후 <블랙컷>(2001) <외계의 제19호 계획>(2001) <봄산에>(2002) <상암동 월드컵>(2002) <승부>(2002) 등 단편영화에 출연하거나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는 데 그친 것이다.

어쨌든 문소리는 이듬해 세 번째 영화 <바람난 가족>(감독 임상수)으로 다시 한 번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았다. 여주인공 ‘은호정’ 역을 맡아 제14회 스톡홀름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제29회 시애틀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제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 제11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올해의 여우연기상, 제2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여우주연상, 제41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주연 배우로서의 발판을 탄탄하게 다졌다.

# 스물다섯 살에 데뷔
문소리는 1999년 2월 성균관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그 해에 서울예대 연극학과에 합격했다. 연기 경험이 일천하고 인맥도 없는 점을 감안, 연극을 전공하기로 한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그 무렵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2000) 오디션에 응모했다. ‘씨네21’에 난, 친구가 오려온 오디션 공모 기사를 보고, 기사에는 성별이나 나이·경력을 따지지 않고 문성근·명계남 씨가 연기아카데미도 운영할 거라는 내용 등이 실려 있었다. 문소리는 오디션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에 응모했다. 2~3개월이 걸린 오디션에 합격, 스물다섯 살에 늦깎이로 데뷔했다.

이 과정에 문소리는 수차례 오디션을 보면서 두 길을 놓고 갈등했다. 최종 합격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오디션을 중간에 포기하고 대학에 갈 건지, 오디션에서 결국 낙마하는 걸 감수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다.

문소리는 고민 끝에 여자 조감독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조감독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결정이 어떻게 날는지 모르겠다면서 이창동 감독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 이 감독에게 전화를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모른다”였다. 이 감독은 “내 마음은 너랑 끝까지 가는 건데 주변 반대가 심하다”고 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게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결정은 네 몫”이라고 했다.

문소리는 대학을 포기, 등록금을 반환받았다. 통화 당시 이창동 감독은 주변 반대를 피하고 머리도 식힐 겸 강원도로 가는 중이었다. 길 가에 차를 대고 문소리의 고민에 진지하게 응했다. 만약 문소리가 이 감독과 통화를 마친 뒤에 오디션을 포기하고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면, 이 감독이 문소리의 전화를 무시했다면, 오늘의 문소리는 없었을는지 모를 일이다.

문소리는 훗날 자신의 캐스팅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남자주인공은 신인(설경구)으로 하더라도 흥행을 고려할 때 여자주인공은 유명 배우로 해야 한다고 문소리 캐스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이 감독은 얼굴부터 목까지 붉어지며 연기하는 문소리의 모습에 요즘에도 저런 처자가 있다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대부분의 관객은 평범한 사람이고,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아름다움을 갖춘 여배우를 찾았는데 문소리가 거기에 딱 맞았다. 두드러진 미모는 아니지만 배우로서 충분히 예쁘다고 생각, 문소리를 밀어붙였다. 만약 이 감독이 자신의 주장을 굽혔다면 오늘의 문소리는 존재하지 않을는지 모를 일이다.

# 배우고 또 배우고
한 편의 영화(연극)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평범한 여고생이던 문소리가 배우가 된 것도 이에 해당한다. 1990년 잠실여고 1학년 때 최민식·신구 주연 연극 <에쿠우스>를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게 배우를 지망한 결정적 동기인 것이다.

<에쿠우스>는 문소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연극이다. 문소리는 집에 와서 잠을 청할 때에도 <에쿠우스>에서 헤어나지 못 했다. 극중 대사가 계속 맴돌고, 무대장치며 말·투구 등 소품까지 눈에 어른거린 것이다.

당시 문소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말랐고 많이 아파 약을 늘 달고 살았다. 그래서 연기는 자기가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고 막연히 동경만 했다. 1993년 대학에 입학한 뒤 건강이 좋아지면서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평소 꿈꾸던 것 중의 하나인 연극을 시작했다.

영화 ‘오아시스’ 여배우 문소리 (2002.07)

영화 ‘오아시스’ 여배우 문소리 (2002.07)

문소리는 연극 동아리와 함께 국악반에도 들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다뤘던 서양악기와 다른 국악기가 신기해 가야금 등을 배웠다. 판소리도 익혔다. 3학년 1학기 때에는 기성 극단에 들어갔다. 중간고사 기간에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입단했다. 문소리는 “왼쪽 길로 가면 학교가 나오고 오른쪽 길로 가면 극단(한강)이 나오는데 시험을 포기하고 연극을 택했다”면서 “그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고 털어놨다.

극단 한강에서 문소리는 우편물 작업 등 사무보조부터 맡았다. 청소도 했다. 그런 중 창작극 <교실 이데아> 공연에 참여했다. 다른 배우들과 달리 연습이 한창 진행되던 중간에. 학생들이 다루는 악기가 하모니카 등에 지나지 않아 뭔가 보완이 필요했는데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아 부잣집 여학생으로 출연했다. 중학생 때부터 배운 바이올린 덕분에 빨리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문소리는 이와 관련 “연기를 하면서 더욱 느꼈는데 배우는 늘 배워야 한다”고 했다. “배울 게 정말 많다”며 “기술을 익히거나 지식을 쌓는 과정이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고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여유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문소리는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인 남해성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수강생들과 함께 남원에 내려가 1개월 동안 ‘산(山) 공부’도 했다. 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발레도 배웠다. 그러느라 대학을 입학 동기들보다 1년 반이나 늦게 졸업했다.

<오아시스>의 ‘한공주’를 맡은 것도 이와 관련이 없지 않다. 우연히, 운 좋게 맡은 게 아니다. <박하사탕>으로 데뷔한 직후 뇌성마비 장애인 복지관을 찾아가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고 봉사활동을 해온 걸 계기로 ‘한공주’를 맡게 된 것이다.

# 역시 문소리!
<오아시스>의 ‘한공주’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누구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만한 배역이다. 이창동 감독은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의 경우도 전례를 찾기 힘들어 여배우는 원래 이런 연기 안 하는 건가, 이거(오아시스) 접어야 하는 거 아닌 가하는 비장함까지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교육학을 전공했고 교사자격증이 있는 문소리는 복지관 측 제안으로 여러 봉사활동 중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장애인을 위한 과외공부를 맡아 왔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자교실 수업도 했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창동 감독은 문소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문소리는 이 감독의 요청에 부응, 그날그날의 경험을 들려줬다. <박하사탕> 때 신인을 기용해 이 감독이 힘들었던 점을 감안, <오아시스>는 유명 배우와 하시라고도 했다. 이 감독은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고, 유명인에게 부탁하는 게 어렵고, 가족 같은 사람들과 하고 싶다”면서 문소리에게 오디션 기회를 줬다. 6mm 카메라를 주고 2주 동안 연습하면서 그 과정을 찍어오라고 했다.

문소리는 오디션을 위해 <나의 왼발> 등 장애인이 나오는 비디오는 빼놓지 않고 빌려봤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뇌성마비는 선천적인 데에다 백 명이면 백 명 모두 상태가 달라 모델로 삼을 만한 대상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방문을 잠그고 2주간 연습을 했다. 눈을 돌리면 팔과 입이 풀리고, 몸이 되면 감정이입이 안 되는 경우가 잇달았다. 그렇게 2주가 흘러갔다.

그런데 오디션을 앞두고 문소리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게 두려웠다.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플레이 버튼을 못 누르고 그만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는 못 하겠다면서 비디오를 들고 도망치듯 영화사를 나와 버렸다. 이 감독은 순간 <오아시스>를 덮어야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소리가 마음의 문을 너무 굳게 닫은 것처럼 보여 오지혜(42)에게 부탁을 했다. 같은 여자로서, 여배우로서 문소리와 얘기를 나눠보면 어떻겠느냐고.

오지혜는 문소리를 나무랐다. 신인에게 오디션 기회가 주어진 게 어딘데 뭐가 잘 났다고 거절하느냐고, 그런다고 자존심이 사느냐고. 어설픈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던 문소리는 선배의 말에 자신이 부끄러웠고,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지혜가 비디오를 보고 “해볼만 하다”고 하자 용기를 냈다.

문소리는 이후 2개월여 동안 연습을 거듭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었다. 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나가 장애체험도 했다. 이어 6개월의 촬영기간 동안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았다. 이 감독의 주문에 응하느라 실신 지경에 이를 만큼 혼신을 다했다. ‘한공주’가 ‘홍종두’(설경구)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과일 깎는 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하는 장면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이라는 주장을 펴 찍지 않는 결론을 끌어내기도 했다. 분장실에서 쭈그리고 자다가 깨어나 거울을 보는데 문소리가 아니라 ‘한공주’가 보였다는 칭찬을 들었다. 촬영을 모두 마쳤을 때에는 골반이 약간 뒤틀려 교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이 감독은 “문소리를 만난 것은 나에게 정말 행운”이라며 “풍부한 감성과 뛰어난 연기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영화에 대한 엄청난 헌신과 감독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작업을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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