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드래그 아티스트’ 모지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희망 찾는…나는 구더기”

2022.06.20 18:02 입력 2022.06.20 20:14 수정

23일 개봉 다큐멘터리 ‘모어’ 주연

발레리노보다 발레리나 되고 싶었던 나

남성답게 살지 않는 내게 세상은 물었다

‘너는 왜 그러냐, 무엇이냐’고 더 이상 묻지마라

영화 <모어>의 주인공 모지민씨는 드래그 퀸으로 20여년 무대에 섰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모어>의 주인공 모지민씨는 드래그 퀸으로 20여년 무대에 섰다. ㈜엣나인필름 제공.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클럽.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 빨간색 문을 열면 무대 가운데 그가 서 있다. 화려한 가발과 그보다 더 화려한 모자를 썼다. 높고 커다란 하이힐을 신었다. 기다란 속눈썹을 붙이고, 진한 화장을 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 몸을 좌우로 흔들고, 빙글빙글 돌고, 텀블링을 하고, 뛰고 구른다. 드래그 퀸 모지민씨(44)다. 드래그는 지정성별이나 성정체성, 지위에 기대되는 모습과 상관없이 자신을 꾸미고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말한다.

모씨는 1978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오줌을 앉아서 누고, 바지 대신 치마를 입었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상은의 <담다디>를 따라 부르고 추면서 동네에서 유명했다. 주어진 성별인 남성답게 살지 않는 그에게 세상은 자꾸 ‘너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괴로움 속에 수면제를 잔뜩 먹었다가 토한 날도 있다. 중학교 선생님이 재능을 알아본 덕에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발레는 지긋지긋한, 욕창 같은 삶에 날개를 달아줬다고 그는 말했다. 발레를 무기로 고향을 벗어나 서울로 가고자 했다. 목포예술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에 진학해 서울로 왔다.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가 되고 싶던 그의 뺨을 올려붙이며 한 선배가 “너 그 여성성 버려”라고 말했다. 그는 생각했다. ‘네버엔딩 스토리구나.’ 서울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것을 견뎠지만 목적지에서 만난 혐오와 차별은 그를 더 몰아세웠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듯했다. 그때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연인 제냐가 나타났다. 키다리아저씨 같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 손을 꼭 붙잡고 산 지 24년이 흘렀다.

그 후 모씨는 이태원 트랜스젠더 클럽에서 드래그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그는 스스로를 모어(毛魚)라고 불렀다. 털 난 물고기처럼 이질적인 존재라는 뜻을 담았다. 클럽을 기반으로 20여년간 공연하며 뮤지컬, TV 광고, 연극, 패션쇼 등에도 참여해 이름을 알렸다. 스톤월 항쟁(미국 최초의 성 소수자 인권 운동)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13 프루트케이크>로 뉴욕 라 마마 시어터에 서고, 뮤지컬 <헤드윅> 원작자인 존 카메론 미첼의 투어에도 함께 했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가 오는 23일 개봉한다. 지난 15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그를 만났다. 화면 밖의 그는 단단하고 매끈한 차돌을 닮았다. 여러 번 꾹꾹 눌러쓴 글씨 같기도 했다. 유난히 존재감과 윤곽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지난 15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모지민씨를 만났다. ㈜엣나인필름 제공.

지난 15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모지민씨를 만났다. ㈜엣나인필름 제공.

국가는 그를 남성으로 여기고, 누군가는 그를 ‘언니’라고 부른다. 모씨는 성별 이분법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고, 자신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라고 소개한다. 성별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논바이너리’라는 말로도 자신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는 “나라는 존재로서 아름답게, 끼스럽게 살아갈 것”이라면서 “나는 이 사회 어디에도 속하기에 애매하기도, 때로는 적절하기도 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저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타이틀을 알고 싶어 하잖아요. 그냥 넘어가도 될 것을. ‘너는 왜 그래’ ‘왜 그런 옷을 입었어’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저는 엄마 배 속에서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이게 나 자체인데 사람들은 자꾸 그것을 따지고, 굉장히 폭력적으로 말을 해요. 그래서 언제까지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야 되느냐, 나는 더 이상 입이 아파 말할 수 없으니 묻지 마라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제가 트랜스젠더이긴 하지만 퀴어든 일반(성소수자가 아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인간이다. 인간 모지민이라는 거예요.”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욕망이 저를 포기하지 않고 살게 해주는 것 같고, 그게 저의 가장 원초적인 힘이다.

- ‘드래그 아티스트’ 모지민

모씨는 ‘아름답다’는 어휘를 유난히 자주 사용했다. 그는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욕망이 저를 포기하지 않게 살게 해주는 것 같고, 그게 저의 가장 원초적인 힘이다. 아름다움을 좇아 살아왔고, 앞으로도 아름답게 늙고 싶다”고 했다.

아름다움을 좇아 화려한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 뒤에는 더 큰 외로움이 따라왔다.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 시작한 드래그 쇼에서도 폭력이 만연했다. 매일 ‘내일 그만둬야지’ 생각하며 20여년을 버텨왔다.

“드래그 쇼를 처음 시작한 2000년은 트랜스젠더라는 말도 생소했던 시절입니다. ‘여장 남자’다, ‘게이들이 쇼한다’는 식으로 얘기했어요. 유년 시절의 폭력을 발레로 버텨서 드래그 퀸이 됐지만 그 안에도 어마어마한 폭력이 있었어요. 말이 좋아 드래그 ‘쇼’지 결국 클럽이고 술집이고, 화류계였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막말을 하고, 병이 날아다니고, 싸움이 나고, 경찰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쇼를 할 땐 무조건 ‘입을 찢어야’(웃어야) 했어요. ‘나 오늘 우울해’하며 멜랑꼴리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찬란한 쇼의 뒤편에서 뼈가 시리고 에였어요.”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때문에 그만둘 순 없었다. 애증 덩어리라고 표현한다. 무서워서 도망치지 못하고 억겁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코로나19 시기 클럽이 영업을 하지 못하면서 일이 끊겼다. 해외 공연이나 워크숍도 중단됐다. 모진 세상에서 그는 또 살아남았다. 모씨는 “저는 현재 저를 구더기라고 표현한다. 이전에는 ‘털난 물고기’였지만 그것마저 너무 미화시킨 표현”이라며 “구더기라고 하면 사람들은 부정적이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절망의 구렁텅이 안에서 희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인생이 아름답다고,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다짜고짜 인생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이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던가요. 우리가 이렇게 좋은 곳에서 인터뷰하고 그런 시간은 너무 아름답지만 뒤돌아서면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요.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고, 부모님은 병들고, 상황은 안 좋죠. 이 모든 고통은 결국 죽어야 끝이 나요. 저는 좋은 말만 쓰기를 절대 원치 않고요. 정말 그 현실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욕창,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버티다 보면 도사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요.”

영화 <모어> 속 한 장면.  이일하 감독은 이랑, 한영애, 정수라 등의 노래와 모지민씨의 퍼포먼스를 삽입해 뮤지컬, 뮤직비디오, 연극 등의 요소가 섞인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모어> 속 한 장면. 이일하 감독은 이랑, 한영애, 정수라 등의 노래와 모지민씨의 퍼포먼스를 삽입해 뮤지컬, 뮤직비디오, 연극 등의 요소가 섞인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모어> 속 한 장면.

영화 <모어>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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