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싱크탱크까지 영화 ‘오펜하이머’에 주목한 이유는

2023.08.03 06:00 입력 2023.08.03 09:23 수정

미국의 외교 전문 싱크탱크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영화 <오펜하이머> 상영회를 열었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에는 핵확산, 핵안보 분야 전문가와 반핵 활동가들이 두루 참여하는 토론회도 진행됐다.

핵 위험과 기후변화 등을 심층적이고도 성찰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정평이 난 매체인 미국 핵과학자회보(BAS) 7월호는 영화 개봉에 즈음해 <오펜하이머> 특집으로 구성됐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연구한 역사가, 핵물리학자, 히로시마 피폭 생존자를 연구한 정신의학자 등 다양한 필진의 기고는 물론 영화 감독과 원작자와의 심층 인터뷰까지, 영화에 대한 헌정호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BAS는 3일에는 국제 원로그룹 ‘디 엘더스’와 함께 <오펜하이머를 넘어서: 원자력의 과거에서 안전한 미래 구축으로 나아가기>라는 이름의 화상 세미나도 개최한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

개봉 2주차에 접어든 <오펜하이머>는 현재 전미 박스오피스 2위를 달리고 있다. 기자가 지난 주말 찾은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한 상영관 역시 만석이었다. 러닝타임이 3시간이나 되지만 대부분 관객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영화에 몰입했다.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인만큼 영화의 흥행은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가 외교안보 분야를 포함한 미국 학계와 워싱턴 정가에서까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영화 ‘같이 보기’는 물론이고, 영화의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다시 읽기’ 바람까지 불 조짐이다. 무엇이 <오펜하이머> 열풍, 아니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미국 핵과학자회보(BAS) 7월호 표지.

미국 핵과학자회보(BAS) 7월호 표지.

오펜하이머의 스토리가 지닌 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 그는 20세기 미국사, 나아가 세계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로 꼽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해, 대량살상무기의 시작을 열어젖혔다는 ‘원죄’ 탓이다.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수학한 뒤 미국으로 돌아와 양자역학 강의와 논문으로 학계의 스타가 됐다.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로스앨러모스 연구시설에 처박혀 핵무기 개발에 매진한 데는 나치와 히틀러를 막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동기도 작용했다.

원폭 실험을 통해 가공할 파괴력을 목격한 과학자들 사이에선 독일이 패망하자 일본에 꼭 원폭을 투하해야 하느냐는 논쟁이 빚어졌다. 미국 정부는 미군 인명 피해를 줄이려면 원폭 사용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에겐 개발한 기술의 사용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논리를 방패로 내세우며 사실상 원폭 투하를 방관했다.

그런데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고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달라졌다. 핵무기의 위험을 경고하고, 특히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 간 핵 군비 경쟁 과열을 막아야 한다고 외쳤다. 이로 인해 해리 트루먼 정부의 눈 밖에 난 오펜하이머는 ‘소련 스파이’ 혐의로 원자력에너지위원회(AEC)의 강도높은 조사를 받게 됐다. 간첩설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오펜하이머는 결국 1954년 AEC에 의해 기밀 접근 권한을 차단당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에서 ‘수소폭탄 반대자’로 거듭났다가, 매카시즘 광풍으로 비극적 말로를 맞은 굴곡진 오펜하이머의 삶은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를 가득 내포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라는 한 인물을 통해 인간의 탁월함과 어리석음, 논리와 모순을 마주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과오를 저지르지만 동시에 반성할 수도 있는 ‘양심’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일깨운다.

실제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모습. AP연합뉴스

실제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모습. AP연합뉴스

지금도 유효한 오펜하이머의 고민

핵 전쟁 위험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경고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핵 위협을 가하고 있는 2023년에도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미·러 갈등으로 핵 군축 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관련 협력이 잠정 중단됐고, 핵무기 증강에 속도를 내는 중국과 미국 간 군축 논의는 아예 없는 상황이다.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핵무력을 고도화하고 있고 중동에서는 이란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계속 가동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 오펜하이머도 창립 멤버로 참여한 BAS는 올해 초 ‘지구 종말’(둠스데이) 시계가 3년 만에 자정에서 10초 빨라진 11시 58분 30초를 가리킨다고 발표했다.

특히 ‘21세기 핵무기’로까지 비견되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오펜하이머의 메시지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에드워드 마키 상원의원(민주당)은 27일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기고에서 “미국은 군비경쟁을 우려하는 오펜하이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주 시작을 알리는 총을 쐈다”며 “핵무기에서 한 실수를 AI에서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마키 의원은 자신이 공동 발의한 AI의 핵무기 통제권 금지 법안 등의 통과를 촉구하면서 오펜하이머를 소환했다. 이미 주요국은 AI에 기반하거나 AI를 접목한 무기 체계 개발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출시된 챗GPT 등 생성형 AI가 인기를 끌면서 AI 남용 우려도 본격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AI의 개발 및 활용에 관한 최소한의 규범이나 윤리는 부재한 상황이다.

싱크탱크 등 전문가 그룹이 영화에 주목하는 포인트도 핵 위기를 해소하고 AI 등 신흥기술로 인한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차원이 주를 이룬다. 원작자와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시대의 고민을 반영하는 시의적절한 작품이 된 셈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

영화적 완성도 한 몫

‘의미’ 측면에서 많은 이들이 호응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이 영화는 물론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배우들의 명연기와 데뷔 24년 동안 작품 세계를 쉼없이 확장해온 놀란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다.

감독은 역사적 인물의 진중한 초상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면서도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아 예측을 비껴가는 장면 구성, 공감각적 영상미, 속도감 있는 편집과 음악의 조화 등과 같은 특유의 장기를 발휘한다.

대중에겐 배트맨 시리즈 <다크나이트> 3부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놀란 감독은 <메멘토> <인셉션>에서 인간 내면 탐구에 천착했고,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인터스텔라>에서 가족과 사회에 관한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 이번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이맥스로 대부분을 촬영한 <덩케르크>에서는 유혈이 낭자한 기존 전쟁 영화의 문법을 배격하고도 전쟁의 참상을 전달했다. <오펜하이머>에는 감독의 전작이 지닌 미덕이 조금씩 다 녹아있다.

놀란 감독 영화에 단골로 등장했지만 주연으로는 처음인 킬리언 머피는 섬세하고도 심지 굳은 연기를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로 끌어들이는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역의 맷 데이먼, 영화의 ‘빌런’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색다른 모습을 만나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오펜하이머에 큰 영향을 끼친 아내 키티로 분한 에밀리 블런트도 호평받고 있다.

[김유진의 워싱턴리포트] 미 싱크탱크까지 영화 ‘오펜하이머’에 주목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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