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과거 인터뷰③ 신해철 아내 윤원희가 고백한 러브스토리 그리고 교육철학

2014.10.28 14:19 입력 2014.10.28 14:40 수정
디지털뉴스팀

신해철의 아내 윤원희씨가 2011년 12월호 레이디경향에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와 아이에 대한 교육 철학을 밝혔다. 그녀는 “훗날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지금’일 것 같아요”라며 행복한 한 때를 추억으로 아로 새겼다. 그들의 행복한 한 때를 기억하는 팬들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 오늘의 비애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그녀는 여러모로 참 예뻤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미스코리아 출신다운 이기적인 몸매, 애교가 철철 넘치는 상냥한 성격, 게다가 똑똑한 두뇌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엄친딸’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서 ‘독설가’, ‘마왕’으로 불리는 신해철이 어린아이처럼 무장 해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사랑스러운 아내, 야무진 엄마 윤원희의 달콤한 가족 이야기.

■ 외모와 실력 모두 겸비한 ‘글로벌 재원’

윤원희(34)를 만났다. 오래전부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얼굴을 마주했다. 세련된 스타일에 도시적인 외모를 지닌 그녀는 알고 보니 아이 같은 구석이 더 많았다.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스튜디오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눈치 채서 움직일 줄 아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제가 많이 서툴죠? 잘 가르쳐주세요. 최대한 노력해볼게요~”라고 말하다가도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자 프로다운 표정과 몸짓으로 주위를 감탄케 했다.

윤원희는 늦둥이 외동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태어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가 10년을 살았고, 한국에 돌아와 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미국 스미스 대학교에 입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라며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일까, 그녀는 구김살 없이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었다.

신해철의 과거 인터뷰③ 신해철 아내 윤원희가 고백한 러브스토리 그리고 교육철학


“성격 자체가 워낙 쾌활해요. 일본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일본인 특유의 오버스러운 매너가 일찍이 몸에 배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저를 처음 보면 왠지 매일 스테이크만 썰 것 같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안 그래요. 한식 좋아하고, 특별히 가리는 게 없어요. 식성도 무척 좋아서 닭 한 마리를 혼자 다 먹을 정도예요. 먹는 것만 보면 장정 못지않죠(웃음).”

대학생활 중에는 특별한 경험을 많이 쌓았다. 1996년에는 미스코리아 뉴욕 진으로 선발돼 미모의 유학생으로 유명세를 날렸고, 대학교 3학년 때는 방학을 틈타 신라호텔 비즈니스센터에서 인턴 사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신라호텔에는 세계적인 금융회사 골드만삭스의 신용평가부서 직원들이 대거 묵고 있었는데, 윤원희는 그들 곁에서 일을 도우며 어깨너머로 실질적인 업무를 간접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누렸다. 골드만삭스 입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부터였다.

“인턴생활을 마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을 졸업하고 골드만삭스 신용평가부서에 입사 지원을 했어요. 인턴 시절 신라호텔에서 만났던 분들의 명함을 다시 찾아보고, 실제로 인터뷰하면서 아는 척하기도 했죠. 그런데 거기 입사 과정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인터뷰가 무려 5차까지 있었는데 일본, 홍콩, 뉴욕 등 해외 각 지부의 임원 50여 명과 일대일로 화상 면접을 봐야 했거든요. 다행히 운 좋게 합격하고 골드만삭스 일본 지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 뜨거운 사랑, 주말마다 태평양 건너다

하지만 한 남자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면서 윤원희의 직장생활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할 무렵 지인의 초대로 참석한 뉴욕대학교 유학생 파티에서 음반 작업을 위해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가수 신해철(43)을 우연히 만났다. 신해철은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파티에서 혼자 당당하게 라면을 끓여 먹는 윤원희의 엉덩이를 보고 반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는데, 사실 윤원희는 그때까지만 해도 서태지의 오랜 팬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태지가 오는 것도 아닌데 그 파티에 꼭 가야 하는 건가 싶었어요. 물론 신해철이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도 조금은 있었죠. 대학교 4학년 내내 모닝콜로 맞춰놓은 곡이 그가 부른 ‘일상으로의 초대’였거든요. 노래가 무척 좋아서 제가 직접 산 CD였어요. 그래서 일단 연예인 구경이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곧바로 연애를 시작하게 됐죠(웃음).”

그러나 교제를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윤원희가 골드만삭스 일본 지부로 발령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각자 새로운 연인을 만나 사랑을 키우느라 바빴다. 그렇게 영영 서로를 잊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윤원희가 6개월 만에 다시 뉴욕 지부로 연수를 나가면서 두 사람은 뜨겁게 재회했다.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고, 2주간 연수에 참석하지 않아 재적 처리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골드만삭스 유일의 연수 낙제생이었다”라고 웃음 지었다.

연수가 끝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연애는 계속됐다. 윤원희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 열 시간의 기다림 끝에 신해철을 만났다. 그러다가 다시 월요일 아침이 되면 일본으로 돌아가 공항에서 곧바로 출근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보냈다.

“둘 다 이야기하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국제전화로 밤새도록 통화를 하자니 비행기 표 값만큼 통화료가 나오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제가 주말마다 뉴욕에 가게 된 거죠. 어마어마한 열정이었던 것 같아요. 골드만삭스는 일이 많은 회사라서 매일 새벽 서너 시에 퇴근하고 아침 일곱 시까지 출근하는 시스템이었거든요. 그 와중에 주말마다 왕복 하루가 걸리는 곳으로 사랑을 찾아 왔다 갔다 하려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죠(웃음).”

신해철의 과거 인터뷰③ 신해철 아내 윤원희가 고백한 러브스토리 그리고 교육철학


■ 뜻밖의 암 선고, 사랑으로 극복하기까지

그러던 어느 날 신해철은 여느 때처럼 미국에서 주말을 보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윤원희를 애타게 붙잡았다. 아무 말도 없이 공항으로 가버린 그녀에게 당장 돌아오라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윤원희는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병가를 내고 며칠 더 뉴욕에 머물렀는데,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다 보니 그게 싫었나 봐요. 그날따라 가지 말라고 자꾸만 붙잡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에 몸이 좀 안 좋아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하고 미국에 남았죠. 그런데 말이 씨가 됐는지 며칠 후부터 컨디션이 점점 안 좋아지는 거예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악성종양이 몸에 퍼져 있는 것 같다면서 고국으로 돌아가 정밀 검사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미국에서는 시민권자가 아니면 보험 처리가 되지 않아서 비용이 꽤 비싸거든요. 그래서 황급히 한국으로 돌아와 재검사를 받은 결과 림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게다가 자궁경부암 초기 증상까지 나타났다고 하더라고요.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는데도 일하느라, 연애하느라 빨리 알아채지 못했던 거죠.”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전신 곳곳에 분포된 림프관을 타고 종양세포가 이미 다 퍼져 있었다. 하루라도 일찍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 것이 시급했다. 결국 그녀는 1년 6개월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에서 본격적인 항암 치료에 들어갔다. 신해철 역시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해 윤원희의 곁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줬다.

“만약 그 사람이 그때 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종양을 더 늦게 발견해서 잘못됐을지도 몰라요. 회사를 그만두고 건강부터 챙기자고 설득한 것도 그 사람이었고요. 그렇게 4개월 동안 방사선 항암 치료를 받으며 투병생활을 했어요. 방사선은 종양세포뿐만 아니라 정상 세포까지 함께 제거하기 때문에 후유증이 엄청나요. 저는 턱 밑부터 배꼽 부분까지 상반신 전체에 방사선을 쐤더니 늘 시름시름 앓았어요. 지금은 괜찮지만 그때는 급성 장염, 위염, 기흉, 성대 결절 등 온갖 병을 몸에 달고 살았거든요. 학교와 회사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제 별명이 ‘에너자이저 버니’였을 만큼 에너지가 넘쳤는데 아프기 시작하면서 정신만 멀쩡하고 늘 비실거리게 되니까 참 힘들었어요.”

■ 미안한 여자, 괜찮다는 남자

“우리 결혼할래요?”

그런 그녀에게 신해철은 어느 날 갑자기 청혼을 했다. 아직 몇 년 동안 몸 상태를 더 지켜봐야 하고, 언제 어느 곳이 또다시 망가져서 쓰러질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윤원희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 더 가까이서 돌봐주고 지켜주고 싶어 했다고 한다.

“방사선 치료 때문에 결혼하더라도 3년 동안 임신을 할 수 없고, 그 이후에 아이를 갖더라도 기형아가 태어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더니 괜찮다면서 오히려 저를 위로해줬어요. 향후 의학기술이 발전하면 그때는 더 잘 해결될 수 있고, 그것조차 안 되면 서로 합의하에 아이를 입양하자고도 했고요. 단순히 겉으로만 달래주는 게 아니라 제게 용기를 심어주면서 무척 진지하게 이야기해줬어요. 생각이 참 깊은 남자예요.”

양가에서도 큰 반대는 없었다. 특히 신해철의 집에서는 그가 결혼을 결심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반가워했다고.

“신해철씨가 한때 신부님이 될 거라고, 결혼도 절대 안 할 거라고 독신을 선언한 적이 있었대요. 그래서인지 저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시부모님께서는 비록 며느리가 몸이 좀 아프기는 해도 아들과 결혼을 해준다는 사실만으로 굉장히 고마워하셨어요. 혹시 반대하셨다가 아들이 평생 혼자 살까봐 걱정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면역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급히 실려 가고, 집에서도 몇 번씩이나 기절하기 일쑤였다.

“어른들이 조금 더 기다렸다가 어느 정도 체력이 다져졌을 때 결혼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는데 저희가 그냥 서둘렀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남편에게 하루에 밥 한 끼 차려주기도 힘들 정도로 매일 피곤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게 고역이었어요. 지방 공연을 가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현관까지 따라 나가다가 남편 뒤에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 적도 있어요.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기절하는 바람에 턱이 깨져서 피가 흘렀는데 남편이 그런 저를 안아서 침대에 눕혀놓고 무거운 마음으로 일하러 나갔죠. 아픈 아내를 두고 가야 했던 그 사람 마음도 참 힘들었을 거예요.”

지난 2010년에는 갑상선암으로 수술받기도 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었지만 신해철은 말끔하게 검정색 정장을 차려입고 수술실 앞에 나타나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9년 만에 다시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에 놀란 그가 이대로 아내를 잃을까봐 불안한 마음에 최대한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스케줄도 없는 날인데 왜 그렇게 입고 나타났냐고 물었더니 ‘이 모습이 당신이 나를 보는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으니까 막 입을 수는 없잖아…’라고 대답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경악할지 모르겠지만 저희 부부에게 암이라는 것은 좀 일상적이기도 했고, 그래서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저는 남편의 그런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고마웠어요.”

■ 5년 만에 임신 성공, 값진 사랑의 결실

윤원희는 신해철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낳아 키우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귀하게 얻은 아이들이다. 결혼 전부터 방사선 치료 때문에 혹시 임신을 못하게 되거나 아이를 갖더라도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던 윤원희는 투병생활을 마치고 3년 동안 피임을 했다. 그 뒤에도 한동안 주기적으로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 남아 있어서 임신을 시도할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허락해주실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리고 드디어 임신을 해도 괜찮을 거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트레이너와 함께 몸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는데 불과 한 달 만에 곧바로 임신이 되더라고요. 둘째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첫째 낳고 몸조리하다가 건강이 좋아지자마자 바로 생겼거든요. 저 대단하죠?(웃음)”

하지만 모든 게 일사천리로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임신 전후로 면역력이 다시 떨어질까봐 매일 인터넷이나 책으로 관련 정보를 찾아 읽고, 몸에 좋다는 것들은 모두 시도했다. 윤원희는 무엇보다 긍정적인 마인드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이를 갖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혼자 끙끙거리는 건 절대 도움이 안 돼요. 사람이 화를 내고, 걱정하고, 초조해하면 면역력이 열 배 정도 떨어진대요. 반면 크게 웃을 때는 면역력이 두세 배씩 올라가고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 자주 웃으려고 노력했어요. 많이 웃고, 천연 비타민을 포함한 건강식들을 틈틈이 챙겨 먹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했고요.”

결혼 5년 만에 첫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아버지는 당시 정종 한 병을 꺼내 마시면서 40분 동안 우셨다고 한다. 아픈 며느리에게 “손자를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차마 표현할 수 없어 속으로만 삭여야 했던 착잡한 감정들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순간과 겹쳐 한꺼번에 쏟아진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포기하고 계셨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다가 드디어 손자가 생긴다니까 만감이 교차하셨던 거죠. 남편이 장손이거든요. 얼마나 오랫동안 우셨는지 시어머님이 ‘덕분에 좋은 구경했다’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 조급해하지 말고 참된 행복 찾아가기

초보 엄마로 서툰 육아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첫째 딸 지유는 어느덧 여섯 살, 둘째 아들 동원이는 네 살이 됐다. 남편과 함께 장난을 치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언제 이렇게 훌쩍 컸나 싶어 신기하고, 이따금 가슴 깊은 곳에서 끝없는 감동이 밀려올 때도 있다.

“딸 지유는 남편한테 애인 같은 존재예요. 애교가 엄청나거든요. 남편도 점점 ‘딸바보’가 돼가고 있어요. 지유 앞에서는 완전 녹아내리거든요. 아들 동원이는 제 눈웃음을 물려받아서 웃는 얼굴이 참 예뻐요. 동원이 역시 애교가 많은데 제가 주로 받아주죠. 그럼 저는 ‘아들바보’인가요?(웃음)”

윤원희는 아이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스스로 삶을 즐기는 법을 깨우칠 수 있도록 키우고 싶다고 한다. 처음에는 남들이 하는 대로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등 조기 교육에 집중하는 편이었지만, 얼마 전부터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독일의 발도르프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고, 현재 두 아이 모두 한국에서 발도르프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유치원에 보내고 있다.

발도르프 교육 이념을 추구하는 학교는 전 세계 곳곳에 자리해 있다. 윤원희는 아이에게 발도르프 교육을 시키고 싶어서 일부러 발도르프 유치원을 찾아 서울 한남동에서 분당으로 이사까지 했다. 발도르프 교육은 아이들 중 누가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각자 다른 색깔을 존중해주자는 일종의 대안 교육이다. 하지만 대안 교육이라고 해서 무조건 무한한 자유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학습을 시키되 책상 앞이 아닌 자연 속에서 생체리듬에 맞춰 창의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매일 산에 오르는 시간이 있는데 돌멩이, 나뭇가지, 벌레 등으로 숫자를 익힌다고 해요. 어제 아이들을 데리고 유치원 뒷산에 같이 올라갔는데, 나뭇가지를 손으로 찢으면서 닭고기라고 하고, 거기에 나뭇잎을 돌돌 말아서는 닭고기 김밥이라고 하는 등 나뭇가지 하나로도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더라고요. 게다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운동하다 보니 신체 발달에도 매우 좋고요. 돌길 위를 걸으면서도 제법 균형을 잘 잡더라고요. 저보다 산을 잘 타는 것 같아요(웃음). 기회가 된다면 초등학교도 발도르프 교육을 하는 곳으로 보내고 싶어요. 과천 자유학교가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아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방법을 자신보다 일찍 깨달았으면 한다.

“저는 제가 좋아서 열심히 공부했고, 제가 원해서 골드만삭스라는 회사에 들어갔지만 결코 그게 행복해지는 길은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잠깐이나마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면서 돈도 많이 벌었지만 통장 잔고의 숫자가 행복의 척도는 아니더라고요.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막상 문화생활을 할 시간도 없었고, 어찌 보면 너무나 삶의 질이 떨어진 나날들의 연속이었으니까요. 가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라고는 고가의 명품들을 쇼핑하는 게 전부였고요. 그런 식으로는 절대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아요. 제 아이들은 저처럼 살지 말고 온전히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혹시라도 제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될 일이 생긴다면 아이들에게 미리 진정한 행복에 대해 가르쳐주지 못한 게 가장 마음에 걸릴 것 같기도 하고요.”

윤원희는 아내로, 엄마로 늘 사랑받으며 살 수 있어서 남편과 두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한다. 때로는 나중에 아이들이 자신처럼 아프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면서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단다.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할로윈 파티에 가기로 했다며 신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서는 그녀에게서 행복한 기운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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