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가 한글정책 맡다보니 해방 후에도 언어 침략 계속”

2015.02.27 21:12 입력 2015.02.27 21:27 수정
김여란 기자

문학평론가 김우종 인터뷰

▲ “지식인에게 익숙한 일본어 부끄러워하지 않고 계속 사용
우리말로 된 작품 드물어… 한글 축적 기회 저절로 박탈
정권 억압에 표현의 자유 제한… 자기 검열 스스로 구속당해”

문학평론가 김우종씨(86)는 1929년에 태어나 일제시대 중학교를 다니던 중 해방을 맞았다. 우리글과 문학을 보듬는 데 평생을 보냈지만 언어를 통해 각인된 일제의 식민권력은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그를 떠나지 않았다. 김씨는 “해방 후 일제는 떠났지만 언어의 침략은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해방 직후 눈에 보이는 친일잔재 청산작업에 비해, 언어를 통한 무형의 식민잔재 청산 작업이 소홀히 다뤄지면서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우리는 일제의 언어적 식민지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식민지배 후 일제 문화와 함께 각 분야에 많은 일어와 일본식 한자어들이 침투해 있었지만 우리는 그게 한국어로 알고 쓰거나 일어인 줄 알면서도 썼습니다. 최근까지도 정부 고위층이 ‘찌라시’라는 일본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처럼 말이죠. 되돌아보면 해방 직후에도 강한 신념이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일본어 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 1월 말 만난 문학평론가 김우종씨(86)는 “해방 이후부터가 진짜 문제였다. 해방되자마자 우리말과 글을 찾았다고 해도, 찾은 언어가 표현해야 할 정신과 문학은 제대로 되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지난 1월 말 만난 문학평론가 김우종씨(86)는 “해방 이후부터가 진짜 문제였다. 해방되자마자 우리말과 글을 찾았다고 해도, 찾은 언어가 표현해야 할 정신과 문학은 제대로 되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특히 지식인들에게 해방 이후 일본어는 한글보다 편리하고 익숙한 언어였다. 일본어는 잘하는데 한글로 읽고 쓰기가 서투른 지식인들은 이를 큰 허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김씨의 지적이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불편함을 느꼈어야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해방 직후 미군정 행정 권한이 일본인에서 조선인들로 이양됐으나 한글 정책이 제대로 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군정이 일제 잔재 청산을 행정 목표로 제시하긴 했지만 행정 요원들 대부분이 친일파로 채워지면서 배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해방을 맞은 1945년 김씨는 개성 송도중학교 2학년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학교에서 대표적 ‘친일파’로 여겨진 교사 5명이 퇴출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금세 돌아왔다. 김씨는 해방 후 1년 뒤인 1946년 등굣길에서 기세등등하게 복귀하던 친일파 교사들과의 만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등 뒤에서 미군 지프차 하나가 경적을 울리며 ‘야, 우종아 타’ 그러더라고요. 한국 사람은 아무나 그런 차를 못 탈 때였죠. 돌아보니까 쫓겨났던 선생들이었어요. (그들은) 미 육군사령부 군정청 교육분야 고위 간부가 돼 있었어요. (친일파로 쫓겨났던) 교사들이 거꾸로 학교 교사들을 모두 앉혀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가더라구요.”

열여섯 때부터 문학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김씨가 청소년기에 읽은 문학 작품도 대부분 일본어판이었다. ‘세계문학전집’, ‘사상대전집’ 등 질 좋은 외국 문학은 일본어본뿐이었다. 그런 상황은 해방 후에도 오래 이어졌다. 일본어로 문학을 접한 김씨는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에 일본어 어휘와 표현법에 익숙해졌으니 해방 뒤에도 글을 쓰려고 하면 일어로 된 표현이 먼저 떠올랐고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리말로 된 작품은 매우 적었기 때문에 한글 축적의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생이 되던 1950년까지 문학 독서를 거의 일문판에 의지했다. 우리말로 된 작품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당연했다. 대학에 가서도 대부분 외국어 서적으로 공부했다.

하지만 김씨는 “일제시대 우리말과 글을 빼앗겨서 분하고 억울하다는 마음은 잘 몰랐다”고 했다. 민족 정체성 차원에서 우리말에 대한 자각을 한 것은 일제의 어문정책이 폭력과 결합되면서부터였다.

김씨는 마을의 작은 학교에서 조선어만 배우다 1941년 처음 공립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일본어를 전혀 못했다. 교장이 일본어로 질문하는 걸 알아듣지 못해 시험에 떨어졌고 아버지가 기부금을 내 겨우 학교에 들어갔다. 어느 날 학교에서 한 학생이 무심코 ‘일본어’라는 말을 썼다가 교사에게 목검으로 초주검이 될 만큼 맞았다. 일본어를 ‘국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김씨는 “선생이 ‘그럼 네 국어는 조선어냐’면서 애를 때렸다. ‘일본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국어인 일본어를 지역 용어로 격하시킨다는 게 체벌 이유였다”고 말했다. 그는 “상황이 이러니 학교에서 우리말을 쓴다는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고 했다.

김씨가 다녔던 송도중에는 ‘가나다라마바사’라고 불리던 한글 선생이 있었다. 김씨가 학교에 갔을 때 그는 이미 조선어 대신 주판으로 산수를 가르치던 처지였다. 일제가 창씨 개명을 강요하자 이 교사는 ‘가나다’ 발음이 나는 일본어를 골라 성을 바꿨고 학생들은 그가 지나가면 우스갯소리처럼 ‘가나다라마바사’라고 읊조렸다. 어느 날 일본 경찰이 그 교사를 체포해 갔다. 해방 후에야 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지팡이를 짚고 다리 한쪽을 저는 불구가 돼 있었다.

“댁을 찾아가 물어보니 ‘감옥에서 일본 형사가 쇠막대기로 주리를 틀어서 정강이가 으스러졌다’고 하셨지요.”

김씨는 이처럼 일본어를 매개로 한 억압과 복종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무의식을 지배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등교하면 스피커를 통해 교장이 부르는 일본풍의 ‘천황폐하 찬미가’가 흘러나왔다. 이후 황국신민의 선서를 암송했다. 매일 아침조회 시간에는 궁성요배를 했다.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중학교에 가면 학교마다 일본인 군인 2명이 배속됐다. 장교 1명과 사병 1명이 학생들에게 일본 군대와 비슷한 복장을 입히고 군사 정신을 가르쳤다.

김씨는 “일제시대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며 배웠던 것처럼 해방되고도 윗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집단 속에 매인 단체 생활과 순종이 강요됐다”고 말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때인 1946년 상급생에게 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배들에게 끌려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맞았던 기억도 갖고 있다. 경례는 일제시대 문화였다.

김씨는 “일제시대 우리가 우리의 표현과 말을 잃었다가 해방된 뒤 말은 찾았지만, 억압적인 체제 하에서 정당한 주장을 하지 못한다는 점은 군부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 ‘문인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렀다. 1974년 1월 문인들이 개헌지지 성명을 발표하자 보안사는 김씨와 이호철·임헌영 등 문인 5명이 북한과 내통한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고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당시 김씨는 일본에서 발행되던 잡지 ‘한양’지에 글을 쓰고 있었는데 졸지에 이 잡지가 북한의 위장 기관지가 됐다. 2011년에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인간첩단 사건 이후 김씨의 아내는 충격으로 병원을 다니다 사망했고 그는 살던 곳에서 이사했다. 자녀들은 학교에 제대로 나가지 못했고 김씨의 책은 출판금지됐다. 김씨는 “결국 일제시대나 박정희 시대나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진실이 숨겨지는 일들이 이어졌고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친일 행적에 관해 논란이 분분한 미당 서정주를 날 세워 비판하는 이들 중 하나다. 김씨는 “문인간첩단 사건 이후 서정주의 시가 전과 다르게 보였다”고 했다. 군사 정권 때 가혹한 폭력을 겪고 나서 일제 때 친일했던 시인의 시에서 새로 분노를 느꼈다는 건 흥미로운 지점이다.

김씨는 문학계에서도 일제 때 비롯된 억압 기제가 오래 이어졌고 여전히 유효하다고 봤다. 그는 “문학이 제대로 자유를 누리게 된 건 1983년 연재를 시작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분수령”이라며 “<태백산맥>이 ‘좌익’의 묻힌 이야기를 쓰고 독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키면서 문학계에도 숨겨졌던 역사적 사실을 작품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제는 정부에 의한 통제라는 것은 거의 느끼기 어렵지만 문인들 스스로 자기검열에 구속당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서정주의 친일 이야기를 언급했다고 해서 원고를 받아주지 않거나 항의를 받는 일도 있었다”며 “오래된 일이라고 해서 논의 자체가 거부되는 것은 문제”라고 밝혔다.

▲ 문학평론가 김우종씨(86)

1929년 2월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마을 소학교 산양학원에서 공부하다가 1941년 공립학교인 연백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944년 해방 전년에 개성 송도중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고 1957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했다. 1960년대 ‘참여문학 논쟁’을 이끈 인물로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충남대, 경희대, 덕성여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한국대학신문사 주필, 참여연대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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