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정권 이어지며 비판 없이 통용되는 ‘전쟁·군사 용어’

2015.02.27 21:13 입력 2015.02.27 21:27 수정
김여란 기자

‘유신’정권 용어부터 일제 답습

정치권이나 운동선수들을 설명할 때 ‘전열을 정비한다’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이곤 한다. 전열은 ‘전쟁에 참가하는 부대의 대열’을 뜻하는 말로 일본어에서 온 말이다. 이한섭 교수의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쓰였던 ‘전열’ 중 확인되는 가장 최초 기록은 동아일보 1926년 12월31일자 기사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전쟁, 군사 용어에서 나온 일본어는 그 용례가 넓어진 채 우리 일상 언어 생활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침략을 위해 만든 전체주의·국수주의적인 이념에서 비롯된 말이 여전히 우리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위해 힘쓴다는 뜻의 ‘멸사봉공’은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여전히 즐겨 쓰고 언론에서도 받아 쓴다. 이 또한 중국 고전에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아니라 일제가 만든 말이다. 멸사봉공에는 ‘황국의 신민’으로서 힘을 길러 군국에 보답하고 국가 전체의 목적을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해도 좋다는 전체주의적 의식이 깃들어 있다.

‘유치원 입소 대기’ 등으로 쓰이는 ‘입소’도 일본어에서 온 말이다. 훈련, 교육, 연구를 위하여 훈련소나 연구소 등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위해 훈련받거나 군대에 들어가는 일을 부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1942년 잡지 ‘대동아’에는 “이번 지원병의 입소는 징병제의 실시를 앞두고 처음으로 맞게 되느니만큼 다른 때에 비해서 한층 더 의의가 깊다고 봅니다”라는 구절이 실려 있다. ‘전멸’ ‘몰살’은 전투에서 지거나 망하거나 죽거나 하여 모두 완전히 없어짐을 뜻하는 말로 역시 일제 군사 용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처럼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가 우리 일상 언어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한국 근대사에서 군부정권이 30여년 가까이 이어지며 사회를 지배한 것과도 연관된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이름부터 일제를 답습한다.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유신’이라는 말은 1868년 일본의 근대화 운동 ‘메이지유신’에서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처음 쓰였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제가 조선을 수탈할 때 그랬듯 강력하고 억압적인 군사 문화를 교육, 법률 등 사회 전반에 적용해 시민들을 길들이고 통치했다.

전문가들은 “제국주의 침략 때 만들어진 전쟁 용어가 비판 의식 없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한국 정치와 사회적 제도가 실제 우리 사는 삶이 전시처럼 치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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