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새로워지세요… 신비로움이 주는 감동, 그게 사랑이죠”

2015.03.27 21:44 입력 2015.03.27 22:53 수정

김용택 시인의 “뭐 할라고 결혼하냐”

아이들이 세상을 새로워하듯 삶도 사랑도 그렇게 느껴야‘나’를 고치고 바꾸고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부부의 삶 세상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는 학교는 바로 ‘부부’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살라. 김용택 시인(67)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이 말을 한동안 음미했다고 한다. 자신이 가르쳤던 아이들이 늘 세상을 새로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삶을, 사랑을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와 우리에게는 ‘사랑’이나 ‘시’ ‘문학’ 같은 거창한 말보다 ‘일상’과 ‘삶’을 새롭게 채워나가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김 시인은 경향신문 연중기획 ‘심리톡톡 시즌2-사랑에 관하여’ 3월 강연에서 ‘뭐 할라고 결혼하냐’라는 주제로 삶과 사랑에 대한 통찰을 들려줬다. 지난 23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김 시인의 강연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김용택 시인이 지난 23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심리톡톡 시즌2-사랑에 관하여’ 강연에서 “늘 새로워서 신비롭고, 신비로워서 감동할 수 있도록  삶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자신만의 통찰을 들려주고 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김용택 시인이 지난 23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심리톡톡 시즌2-사랑에 관하여’ 강연에서 “늘 새로워서 신비롭고, 신비로워서 감동할 수 있도록 삶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자신만의 통찰을 들려주고 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 아직도 또렷한 ‘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이라는 제 시에 얽힌 얘기부터 할게요. 저는 순창농림고를 졸업하고 22살 때 모교인 덕치초등학교 선생이 됐습니다.

11월 어느 날 퇴근을 하는데, 저 멀리 배추밭 쪽에서 어떤 여자가 배추 소쿠리를 머리에 인 채 서리 낀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겁니다.

빨간 스웨터에 월남치마를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았어요. 꼭 나한테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퍽 긴장이 됐는데, 나를 휙 지나쳐 가는 겁니다. 언뜻 날 보고 웃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쪽니가 딱 보였는데, 반해버렸죠. 알고 보니 이웃마을 처녀였어요. 편지를 썼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크리스마스 무렵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선물을 했어요. 물방울무늬 스카프. 지금도 기억이 또렷해요. 이듬해 봄, 보리걷이가 끝난 밭에 가설극장이 들어왔지요. 우연히 거길 갔는데, 그 여자가 거기 있었습니다. 발전기로 낸 불빛 밑에 처녀 여럿이 앉아 있었는데 그 여자가 참 예뻤어요. 그렇게 사귀기 시작했지요.

둘이 참 좋아했죠. 그 여자는 친구들과 동네에 놀러 와서 내가 집에서 책을 보고 앉아 있으면 작은 돌멩이를 창문에다 던졌지요. ‘어, 왔구나’ 하고 문을 열면 들어왔어요. 이불을 깔고 여럿이서 덮고 있으면 발을 더듬어서 그 여자 발을 찾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사라져버렸어요.

오랜 시간 뒤 ‘그 여자네 집’이란 시를 썼습니다. 제 아내도 그 시를 봤어요. 제가 가끔 놀리기도 해요. 시 중에 살구꽃이 나오는데, 제가 “그 여자네 집 살구꽃은 아직도 그렇게 예뻐”라고 하면 아내가 “저 썩을 놈의 살구나무 베어버려야 한다”고 하지요(웃음). 세월이 참 많이 흘렀지요. 지난번에 병원에 갔다가 전화를 하고 있는데 30대 중반의 여성이 옆에 계속 서 있는 거예요. 전화 끊고 나서 ‘누구냐’ 했더니 ‘그 여자네 집 딸’이라고 하더군요. 엄마를 닮아서 참 예쁘다, 그랬어요.

[‘심리톡톡’ 시즌2 - 사랑에 관하여]“늘 새로워지세요… 신비로움이 주는 감동, 그게 사랑이죠”

■ 부부, 나를 고치고 바꾸는 ‘학교’

저는 늦게 결혼했습니다. 초·중·고교 때 교과서밖에 안 보다가, 뒤늦게 책을 읽다 보니 정말 재미있었어요. 방학이 되면 전주에 가서 헌책을 한 아름 사서 버스를 타고 왔어요. 버스에서 내리면 지게로 책을 짊어지고 30분을 걸어서 집에 갔지요. 책에 빠져 살다 보니 어느덧 35살이었습니다. 결혼은 생각도 안 해 봤어요. 결혼을 하면 돈이 들 테니 책을 못 살 것 같았습니다.

1983년쯤인가, 시집 <섬진강>을 내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1년 후 탈상하고 제사 지내는 날 문상객 중에 여학생 한 명이 계속 내 옆에 앉아 있는 겁니다. 나중에 보니 셋째 동생과 같은 국문과 학생이었어요. 동생 졸업식에 갔는데 그 여학생이 학사모를 쓰고 서 있더군요. 졸업을 하고 얼마나 지났나, 그 여학생이 밤중에 우리 집에 혼자 왔기에 굉장히 혼냈어요. 여자 혼자 그 외진 길을 30분이나 걸어와야 하거든요. 그런데 한 달 뒤쯤 또 오더니 할 말이 있대요. 해보라 했더니 “선생님 저랑 같이 살면 안돼요?” 그래요. 제가 화를 냈죠. 나이 차가 너무 나잖아요. 그런데 다음주에 또 와서 계속 그 얘기를 해요.

그렇게 결혼식을 치렀는데 집이 너무 가난했어요. 밥을 지으려면 물을 길어와야 했고, 추운 겨울에도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야 했어요. 진짜 고생을 많이 했지요.

준비 없이 결혼하면서 저는 아내 말을 잘 듣자고 생각했습니다. “여보, 신은 양말은 뒤집지 말고 빨래통에 내놓아요.” 그러면 꼭 따랐어요. 아내 말을 한 1년 들었더니, 나를 다 고치고 바꿔놓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고 바뀔 수 있는 학교가 부부 아닐까요. 책을 읽어야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삶 속에서 자기를 고치고 바꿔서 맞추는 것도 공부지요. 공부가 안 이뤄지면 끊임없이 싸웁니다. 여태껏 아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이벤트를 한 적은 없지만, 지금도 집에서 하는 여러 일들을 전부 아내 위주로 맞춰서 해요. 집안에서 일상을 존중하는 삶이 중요하지요.

[‘심리톡톡’ 시즌2 - 사랑에 관하여]“늘 새로워지세요… 신비로움이 주는 감동, 그게 사랑이죠”

■ 새로우면 신비롭고, 감동한다

저는 오랫동안 아내와 부부로서 잘 산 편입니다. 그래도 세월이 가면 젊은 시절의 사랑과 애정은 식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처음 남자를, 여자를 만나면 서로 신비로움을 느끼고 늘 새로움을 얻습니다. 새롭기 때문에 신비롭고, 신비롭기 때문에 감동하면서 사는 겁니다. 사랑은 감동입니다. 감동은 스며들어서 내 생각과 행동을 바꿔줍니다.

이제는 100년을 사는 시대입니다. 제 나이는 이미 정년을 6~7년 넘겼네요. 이 인생, 죽을 때까지 행복할 수 있을까, 50년 동안 사랑한 아내를 또 30년 동안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수밖에요. 그래서 오늘 가지고 온 주제가 ‘뭐 할라고 결혼하냐’ 이겁니다.

부부간에 살면서도 새롭고 신비로워야 하죠. 초등학교 선생하면서 애들한테 배운 것이 애들은 늘 세상이 새롭다는 겁니다. 다 새것이니 재밌고, 지칠 줄을 모릅니다. 신비로우니 심심한 것도 없습니다. 신비롭기 때문에 감동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고치고 바꿔갑니다.

부부간에도 늘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공부입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책을 보는 것입니다. 아내는 신문 읽기도 좋아합니다. 책이나 신문을 나 혼자만 읽으면 재미없어 안사람과 같이 읽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얻기 때문에 새로워지는 겁니다. 새로워지기 때문에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고, 그러다 보면 감동하는 말들을 하게 되고 소통이 이뤄집니다.

또 하나는 예술적 감성을 놓치지 않는 겁니다. 아내는 결혼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술관을 다녔습니다. 계속 예술을 가까이 하고, 오랫동안 그림을 보다 보면 세상이 다 그림이 됩니다. 예술의 눈을 통해서 보면 새로운 겁니다. 예술 자체가 늘 새로운 것이잖아요. 한번은 그림 전시회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었어요. 아내한테 내가 사고 싶었던 그림이 있는데 한번 찾아보라고 했어요. 놀랍게도 나하고 똑같았어요. 그 그림을 사 놓고 2주일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 시보다 삶을, 사랑보다 일상을

보통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뼈를 깎는 아픔과 피를 말리는 고통이 있다고 하지요. 저는 시가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재밌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중요했어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시가 문득 써져요. 사는 게 글이 되고 시가 되는 겁니다. 시가 잘 안 써지더라도 그게 내 삶이에요. 늘 시를 쓰는 게 좋고 행복하지요.

우리 딸이 힘들게 공부를 했어요. 언젠가 그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너를 지켜준 게 무엇이냐고 물었어요. 딸이 엄마·아빠가 다정하게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참 행복하게 사는구나 느꼈고, 내가 잘못되면 저게 깨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버티고 견뎠다고 말하더군요. 놀라운 힘이지요. 이따금이라도 저녁 때 부부간에 애들이 보는 데서 밥을 드세요. 아이들에게 행복의 맛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애들이 커서 행복을 찾고, 창조하는 것이지요.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삶이라는 것이 사랑을 만나 살아가게 돼요. 그런데 다시 또 보면 사랑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아내를, 남편을 늘 새롭고 신비하게 느끼면서 서로 감동하며 사는 거지요. 그러면서 자기를 고치고, 바꾸고,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부부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진짜 사랑을 찾으려면 방황하라!

김용택 시인은 “방황해야 진짜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단 과거와 달리 수명이 늘었고, 100년을 산다고 하잖아요. 젊은이들에게 방황하고, 고민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실패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랑에 실패가 없으면 사랑이 커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사랑이 뭔지를 알고, 삶이 튼튼해지는 것이지요. 그냥 놀자는 게 아니라,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있는 힘을 다해서 찾아야 합니다. 마흔 살까지 방황하다가 그걸 찾았다 하더라도 10년이 지나면 50살인데, 그래도 살 날이 50년이나 더 남았잖아요.”

김 시인은 아들·딸에게 늘 “너는 길이 없는 산 앞에 서 있다”고 말한다고 했다. “인생에도 길 없다, 사랑에도 길 없다, 그러니 가보라고 말합니다. 길이 없는 산에 들어가서 길을 내면서 가라, 가시덩굴이 있을 것이고, 절벽이 있을 것이고, 호랑이가 나타날 수도 있고, 길이 끊길 수도 있다고 얘기하지요. 그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