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베트남전 파병 논쟁

2015.07.14 22:05 입력 2015.07.14 22:08 수정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전쟁 특수·민간인 학살·고엽제 보상… 50년 지났어도 엇갈린 평가

▲ 파병 당시엔 안보 영향 논란
미국에 더 큰 요구하기 위해
오히려 여당이 나서 “반대”

▲ 민간인 학살·고엽제 문제 등
1990년대 이후 다시 쟁점화

▲ 전쟁 특수 실제 효과 있었나
유신 선포 빌미 되지 않았나
고엽제 환자 피해 보상은?
미래 위해 논쟁 계속돼야

2003년 10월20일 국회에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여당인 민주당은 정부의 이라크 파병 정책에 반대한 반면 야당인 한나라당은 찬성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런데 논쟁은 이라크 파병뿐만 아니라 40여년 전에 있었던 베트남 파병이 가져온 효과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평가는 전투병 파병이 시작된 1965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논란이 이뤄지는 이슈다. 현재의 논란은 전쟁특수를 통한 경제적 이득과 참전으로 인한 한국군과 베트남 민간인들의 피해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지만, 파병 당시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논쟁이 이루어졌다. 바로 베트남 파병이 한국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맹호부대 장병들이 1967년 1월 베트콩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베트남전에 파병된 맹호부대 장병들이 1967년 1월 베트콩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파병 당시엔 논쟁 확산되지 않아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고, 불과 10여년 전까지도 한국전쟁이라는 전면전이 진행됐으며, 정전협정으로 전면전은 중단됐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 전투병의 파병이 가져올 안보적 효과가 논란의 초점이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베트남 파병이 안보 공백을 가져올 것이며, 스스로의 안보를 지키지 못해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병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과 규모에 변동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관점에서 파병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만약 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않는다면, 주한미군의 일부 또는 전부가 베트남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의 도발을 막는 억지력으로서 미군의 역할과 규모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 점을 강조했는데, 실상 파병 시점에서 한국군 파병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반전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한국전쟁 때 도와줬던 미국에 보은해야 한다는 것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여기에 더해 1964년부터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인해 위수령이 선포될 정도로 사회적 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반대 의견이 너무 나오지 않아서일까? 반대 의견이 강해야만 파병을 요구한 미국에 무언가 더 큰 요구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국회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반대한 사람은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의 옆에 서 있었던 차지철이다. 그는 남베트남 정부가 외국군의 지원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파병에 반대했으며, 정규군 대신 의용군을 파병할 것을 주장했다(경향신문 1965년 1월16·19일자). 상임위 표결에서는 찬성표를 던졌지만.

1965년 1월 1차 전투부대 파병 당시 국회 표결에서 야당은 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을 미국이 약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권했고, 2차 증파 논의에서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지만, 야당의 중진인 김준연과 조윤형은 찬성표를 던졌다. 여당인 공화당의 당론은 찬성이었지만, 공화당 박종태 의원은 가장 강력하게 파병을 반대했다.

그는 “자유 진영 가운데도 영국·프랑스 등 많은 나라들이 월남 파병을 반대하고 있으며, 월남 파병으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체의 강력한 국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미국의 입장과 중립국 등 국제여론을 중시해야 할 한국의 입장은 다르다”고 주장했다(경향신문 1965년 8월7일자).

베트남전 파병을 둘러싼 찬반 양론을 다룬 경향신문 1965년 1월16일자 기사.

베트남전 파병을 둘러싼 찬반 양론을 다룬 경향신문 1965년 1월16일자 기사.

■ 장준하 국회 질의로 파병 쟁점화

베트남 파병이 다시 도마에 오른 것은 장준하를 통해서였다. 장준하는 1968년과 1969년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 문제에 대해 질의했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정전협상을 제안했고, 철군을 공약으로 내건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이었다. 미국의 베트남 정책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한국군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베트남에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후 1985년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이 출간될 때까지, 그리고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베트남 파병은 한국 사회에서 잊혀졌다.

1990년 김민웅이 미국 자료에 근거해 월간지 ‘말’에 쓴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제제기, 1992년 9월26일 고엽제 피해자들이 정부의 대책 마련을 주장하면서 고속도로에서 벌인 시위, 1993년 드라마로 방영된 <머나먼 쏭바강>으로 인해 베트남 파병 문제는 다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전쟁특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전쟁기간 발생했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당시 미국 자료와 베트남 현지 증언을 통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음을 주장하는 반면, 참전 군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것은 민간인이 아니라 베트콩이었으며, 북한군이 한국군으로 변장해 민간인들을 죽인 경우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논쟁은 폭력적인 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2000년 구수정과 고경태 기자의 민간인 학살 보도에 반발하는 참전군인들이 한겨레신문사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간인 학살을 언급한 교과서 대표필자의 학교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가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논의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던 원래의 목적, 즉 한·미동맹과 안보를 위한 목적은 달성되었는가? 1970년대 한국군의 현대화 작업이 긍정적인 답변의 근거가 된다면,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과 울진·삼척 사건으로 대표되는 남북 간 안보위기,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그리고 1970년대 한·미관계의 악화는 부정적 답변의 근거가 될 것이다.

파병의 군사적 효과에 대해서도 논쟁이 필요하다. 이세호 사령관은 실전 경험, 현대전의 최신 전술과 전투장비, 외국군과의 연합작전 능력 등을 들어 군사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야전 소대장의 평가는 다르다. 베트남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공비 토벌’이었으며, 막대한 물량 지원하에 일방적으로 벌인 전투는 전력 증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쟁특수와 유신 선포, 고엽제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전쟁특수가 그렇게 컸다면 왜 196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부실기업 위기가 발생했을까? 그럼에도 전쟁특수가 없었다면 1973년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이 가능했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한 물적 토대의 구축이 없었다면, 유신체제 선포가 가능했을까? 미군과 호주군의 고엽제 환자를 위한 기금은 마련됐는데, 한국에서는 참전군인과 고엽제 환자들에 대한 조사와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베트남에 파병됐던 한국군은 1973년 모두 귀환했지만,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과 평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특수에 대한 기억과 기대는 지금도 해외파병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과 파병에 대한 객관적 연구와 그 평가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 ‘같고도 다른’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미국 주도의 분단 후… 한국은 ‘남침 전면전’, 남베트남은 ‘내부 시민전쟁’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성격의 전쟁으로 보인다.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한 남쪽의 저항.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과 기본적 성격부터 달랐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침략에 의한 전쟁이었지만, 베트남전쟁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베트콩들의 전쟁이었다. 북베트남의 지원이 없었다면 베트콩이 20년이 넘도록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지만, 전쟁의 본질은 시민전쟁이었다. 그러나 두 전쟁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17도선을 중심으로 베트남이 분단된 것은 1954년의 제네바회담이었고, 이 회담은 본래 한국에서 정전협정 직후 평화협정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열린 고위급 정치회담이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대신 베트남 분단을 결정해 베트남전쟁의 기원이 됐다.

베트남의 분단 자체도 1953년 7월 한국의 정전협정과 인과관계가 있다.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중단되자 중국의 지원이 북베트남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로 인해 1954년 초 북베트남 공산당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했고, 프랑스는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베트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미국은 제네바회담을 제안했고, 결과적으로 베트남 분단을 결정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이 본격적인 개입을 결정한 것은 중국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1964년이었고, 전쟁 기간 중 북베트남 폭격을 계속했지만, 지상군이 17도선을 넘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 북진이 중국군을 초래했고, 이것이 미군에 재앙이 되었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은 1975년 남베트남 정부의 패망으로 끝났지만, 한국전쟁은 정전체제가 계속되고 있다. 베트남과 달리 남한이 북한을 압도하고 있음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언제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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