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배려’ ‘예산 절감’ 내세워 재판 거래…피해자들은 없었다

2019.05.05 21:36 입력 2019.05.05 21:56 수정

그들에게 ‘국익’은 무엇이었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지난해 5월31일 대법원 앞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피해사건 재판거래와 대법원 사법권 남용 문제 대응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에 참석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재판에선 여러 과거사 문제가 피해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국익’과 ‘예산 절감’ 효과에서만 다뤄진 사실이 확인됐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지난해 5월31일 대법원 앞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피해사건 재판거래와 대법원 사법권 남용 문제 대응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에 참석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재판에선 여러 과거사 문제가 피해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국익’과 ‘예산 절감’ 효과에서만 다뤄진 사실이 확인됐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할 경우 (피해자들에게 줘야 할) 배상액이 1조3000억원을 넘게 되나 법원의 화해 및 각하 판결로 예산을 절감하게 됨.”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 판결 받은 1100여명에 대해 배상액이 5500억원에 달하나 대법원 판결로 전액 면제됨.”

지난 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60) 재판에서 처음 공개된 ‘대법원장 접견 및 오찬 말씀자료’란 제목의 문건 핵심 내용이다. 검찰은 이날 증인으로 나온 박상언 판사(42)에게 이 문건 작성 경위를 신문했다.

박 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면담이 이뤄진 2015년 8월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근무했다. 박 판사는 두 사람의 회동 전 이 문건을 청와대 법무비서관실에 보냈다. 박 판사는 “문건을 작성한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e메일 흔적이 남았다. ‘양승태 대법원’은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금을 받았다면 화해로 간주하고, 긴급조치가 위헌이더라도 국민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인정되지는 않는다는 판결을 냈다.

양승태 대법원 때 과거사 청산은 후퇴했다. 수십년간 고통을 겪은 피해자들이 이 판결로 구제가 어렵게 됐다며 눈물을 흘릴 때 대법원은 청와대에 ‘예산 절감 효과’를 내세웠다. 재판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와 박근혜 정부 외교부가 강제징용 사건을 어떻게 다뤘는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들 논의에 피해자들은 없었다.

■ 외교부 “사법적 해결밖에 없다”

2012년 대법서 원심판결 깨고
강제징용 피해자 손 들어주자
외교부 발칵 뒤집어져

법원행정처와 외교부 밀월의 단초는 2012년 5월24일 대법원 판결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미쓰비시중공업·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법원 제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가 일본 기업 승소였던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해 피해자들 손을 들어준 것이다. 외교부는 발칵 뒤집혔다. 법정에서 검찰이 공개한 당시 문건들을 보면 외교부는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이었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한·일관계의 법적 기반이 붕괴된다고 외교부는 판단했다. 대법원이 파기환송한 사건은 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 재판을 거쳐 대법원에 다시 올라온다. 외교부는 이 재상고심을 노렸다.

재상고심 최종판결 늦추려는
외교부 문건들 임종헌 통해서
법원행정처 심의관 문건 반영

2013년 8월 외교부 내의 한일청구권협정 대책 태스크포스(TF)가 작성한 ‘강제동원 피해자문제 관련 법률전문가 간담회 결과’ 문건에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 시점을 최대한 연기하기 위한 노력 필요, 일정 시간(최소한 1년)이 요구되는바 대법원 판결이 조기에 선고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제목과 작성자가 없는 어떤 문건에는 ‘일본 기업에 대한 자료 제공’도 방안 중 하나로 쓰여 있다. 피고인 일본 기업을 통해 외교부 입장을 우회적으로 대법원에 전달한다는 취지를 담은 문건이다. 검찰은 “문건에는 자료 전달 과정에서 유출되지 않게 보안이 필요하다고 나와 있다”고 설명했다.

이병기 당시 주일대사(나중에 대통령비서실장 역임)와 목영준 김앤장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헌법재판관 역임)은 각각 보고서와 의견서를 냈다. 이 전 대사 보고서에는 “전원합의체 구성의 필요성, 기존 대법원 판결이 행정부·국회의 기존 입장과 배치되는 측면을 사법부에 전달해 신중한 판결을 내리도록 유도”라고 나온다. 목 위원장 의견서에도 “전원합의체 심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대법원 측에 적절하게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 있다.

2013년 12월1일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공관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황교안 법무부 장관·차한성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모였다. 이른바 ‘1차 소인수회의(소규모 집중 회의)’다. 회의를 앞두고 생산된 외교부 문건들에는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주자니 국고 부담이 되고, 화해기금을 설립하자니 일본 정부와 기업들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쓰여 있다. “사법적 해결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2012년 대법원 판결이 바뀌어야 한다. 최대한 심리 절차를 지연해줄 것을 요청한다.” 박근혜 정부의 결론이었다.

■ 양승태 퇴임 앞두고 의견서 독촉

외교부 문건들은 임 전 차장을 통해 법원행정처로 건너가 심의관들 문건에 반영됐다. 사법정책실 심의관 때 강제징용 사건 관련 문건을 작성한 박찬익 전 판사(44)는 지난달 24일 증인으로 나와 “임 전 차장으로부터 받은 외교부 문건을 참고해 작성했다”고 했다. 박 전 판사가 작성한 문건 한 대목에는 외교부와의 관계 악화, 심리불속행 기각 여부를 검토한 대목도 있다. 박 전 판사는 “절차적으로 외교부를 좀 배려할 수도 있지 않으냐는 (임 전 차장의) 말이 있었다”고 했다. 박 전 판사는 임 전 차장 지시로 문건을 당시 대법원 민사총괄재판연구관이었던 황진구 판사에게 전달하면서 심리불속행 부분은 뺐다. 박 전 판사는 “전달하는 게 좀 주저됐다. 판단의 시기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에 대법원에 보내기에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외교부 정모 사무관의 업무수첩 2015년 6월 부분에는 ‘KNC→대법→외교부’라는 글자가 나온다. KNC는 김앤장을 가리킨다. 정 사무관은 법정에서 “김앤장이 대법원에 (외교부의) 의견 제출 촉구서를 제출하고, 대법원이 그걸 외교부에 보내면 외교부가 의견을 제출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계획은 철저했지만 이행이 되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 퇴임을 1년 앞둔 2016년 9월29일, 임 전 차장과 이민걸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을 찾아갔다. 외교부가 강제징용 사건에 대한 의견서를 대법원에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증인으로 나온 이 전 실장은 외교부 방문 목적에 대해 ‘촉구’ ‘독촉’이라는 단어를 썼다.

“외교부에서 의견서를 제출한다고 해서 대법원 규칙도 바꿨는데 제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당시 위안부 합의라든지 재단 설립 때문에 국민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외교부가 신중을 기해서 의견서 제출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 대법원장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라도 의견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사건을) 처리하기 어렵다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법원행정처가) 의견서를 ‘촉구’ 내지는 ‘독촉’하러 간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이 전 실장)

■ 2012년 판결 재검토 필요했다는 연구관

“재판에 영향 끼친 적 없고
다양한 검토가 무슨 문제냐”
임종헌 나름의 반격 나서

임 전 차장도 나름의 반격을 하고 있다. 자신이 외교부와 접촉하고 심의관에게 강제징용 사건 관련 검토를 시켰을지언정 대법원 재판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제징용 사건 담당 재판연구관으로 있으면서 외교부 입장이 담긴 법원행정처 문건을 전달받은 이원 판사는 지난달 22일 증인으로 나와 “외교부가 2012년 판결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인식은 했지만, 법원행정처 문건을 통해서만 인식한 것은 아니다. 다른 자료도 검토했다”며 임 전 차장 주장을 뒷받침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었다는 재판연구관들 증언은 임 전 차장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수 있다. 대법원이 사건을 재상고심에서 바로 확정하지 않고 오래 심리한 원인은 외교부 때문이라고 검찰은 지적하지만, 임 전 차장은 대법원이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고 검토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한다. 이 판사는 “2012년 판결에서 청구권협정을 추상적으로 다뤘고, 증거가 추가로 제출돼 다시 검토해야 했다”고 했다. 황진구 판사도 “2012년 판결 이후에 찬반 논문이 많이 나왔다”며 “2012년 판결 때는 청구권협정의 효력이나 적용 범위 등은 주된 쟁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검찰은 외교부 요청을 들어준 대신 법원행정처가 법관 해외 파견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법관 해외 파견은 정책적으로 필요했고, 법원행정처가 원하던 오스트리아 빈이 아닌 스위스 제네바 파견을 받았다는 점을 임 전 차장은 파고든다. 법관 해외 파견 담당자였던 외교부 허모 사무관이 지난달 29일 증인으로 나오자 임 전 차장은 “비엔나(빈)에는 국제상거래를 다루는 기구가 있고, 여기서 만든 모델법은 전 세계 관련 입법의 표준이 된다”며 “대한민국의 국익을 반영하기 위해 상사법 전문가인 법관을 파견할 필요성이 크지 않으냐”고 따져 물었다.

“법원행정처 너무 오만했다”
이민걸의 ‘법정 반성’만 무색
민주화 관련 피해자 구제도
청과 거래로 과거사 청산 후퇴

이민걸 전 실장의 뒤늦은 ‘법정 반성’만 무색해졌다. “사법행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저로서는 여러 가지로 송구스럽습니다. 외교부와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나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법원행정처가 너무 오만하고 타성에 젖었기 때문입니다….”

강제징용 사건의 원고 9명 중 8명은 대법원의 최종 판결 선고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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